체육철학 +37

 

 

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스포츠도덕이란 어떤 것일까? 전통적 의미에서 스포츠도덕은 스포츠규칙의 자발적 준수를 의미하였다. 철학자 게르하르트는 스포츠는 규칙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선수들이 규칙을 충실하게 지키는 한에서만 스포츠를 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스포츠선수는 자신이 참가하는 스포츠경기에서 그것의 구성적 조건인 규칙을 충실하게 준수해야만 스포츠선수라는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참가한 스포츠경기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스포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더 이상 스포츠선수도 아닌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스포츠규칙을 준수하지 않는 모든 선수는 스포츠선수가 아닌 자가 되며 비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자가 되는 것인가?

 

 


만일 스포츠에서 도덕적 선수와 비도덕적 선수의 구별 기준, 참된 의미에서의 스포츠선수와 스포츠선수가 아닌 자의 구별 기준이 규칙의 자발적 준수에 있다면 대부분의 선수들은 비도덕적 선수 또는 스포츠선수가 아닌 자에 속하게 될 것이다. 현대 경쟁스포츠에서 규칙 위반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경기 장면을 관찰해보면 규칙 위반은 비도덕적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경기의 일부처럼 보인다. 심판은 규칙을 위반한 선수에게 규칙 위반의 정도에 따라 경고, 패널티 부여, 퇴장 같은 벌칙을 부과한다. 선수들이 위반해도 스포츠선수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규칙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경기에서 규칙 위반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이와 같은 현실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의미에서 스포츠도덕의 준수를 강력하게 주장한다면 그와 같은 주장은 현실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잠재적으로 모든 선수들을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현실적 스포츠상황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 스포츠윤리는 정정당당한 승리,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등을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상대를 속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태권도, 축구, 핸드볼, 농구 등에서 페인트모션은 비도덕적인 행위가 된다. 그러나 현실적 스포츠상황에서 이와 같은 행위는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태권도경기에서 페인트모션, 축구경기에서 파울을 유도하기 위한 과장된 제스처, 하키선수들의 폭력 등은 비도덕적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경기의 일부라는 인상을 준다. 현실적으로 페인트모션을 썼다고 비난을 받거나 제재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규칙 위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관중들은 적절한 시기에 규칙을 위반한 선수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기도 한다. 물론 모든 규칙 위반에는 그에 상응하는 페널티가 부과되지만 그 이상의 도덕적 비난은 없다. 주지하다시피 경쟁적 스포츠종목들에서 일종의 속임수인 페인트모션은 승리하기 위한 기술의 주요 부분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포츠규칙 일반에 대한 절대적 준수를 강조하는 스포츠도덕은 비현실적이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전통적 도덕 정의는 스포츠의 도덕을 구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다루었기 때문에 스포츠상황에서 도덕적으로 행위 하라는 요청은 준수하기 쉽지 않은 요청이 되었다. 필자는 여기서 스포츠의 작은 도덕과 큰 도덕의 구별, 즉 경기에서 위반이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규칙과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규칙의 구별을 제안하고자 한다. 위반이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규칙은 스포츠경기에서 구체적인 규칙을 준수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축구경기에서 골키퍼를 제외하고 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작은 도덕이다. 이렇듯 작은 도덕은 규칙의 존중이나 규칙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의미한다. 한편 경기에서 그 위반이 결코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큰 도덕은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금지된 수단이나 물질을 사용하거나 승부조작에 개입하는 일과 관련된다. 도핑이나 승부조작 금지 요청에 대한 기대는 경기 상황에서의 경기규칙 준수 요청에 대한 기대보다 크기 때문에 전자를 큰 도덕이라고 했고, 후자를 작은 도덕이라고 했다.


도덕 커뮤니케이션은 존중과 무시라는 주도적 코드에 따라 작동하는데, 작은 도덕의 경우 이 코드가 적용되는 대상이 특정 행위 영역에 속한 인격에게만 국한되는 경향이 있지만 큰 도덕의 경우 전 인격과 관련이 된다. 쉽게 말해 한 선수가 작은 도덕을 위반했을 때, 예컨대 경기규칙을 어겼을 때 선수로서 그의 인격에만 파울, 경고, 퇴장 같은 제재가 가해지지만 큰 도덕을 위반했을 때는 선수이자 일반인으로서 그의 인격 전체에 선수자격박탈, 벌금, 사회적 비난, 법적 처벌 같은 제재가 가해진다. 도핑 금지 외에 승부조작 금지도 스포츠의 큰 도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스포츠도덕의 구별은 스포츠의 문제를 조금 더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현재 스포츠에서 가장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큰 도덕의 위반이다. 특히 도핑과 승부조작이 여기에 해당한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작은 도덕의 위반은 경기의 일부로 볼 수도 있다. 작은 도덕의 위반은 경기를 흥미롭게 만들어주기조차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도덕의 위반은 크게 문제시될 것이 없다. 그러나 큰 도덕의 위반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흔히 스포츠를 일컬어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한다. 영화나 연극, 소설은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스포츠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스포츠를 매력적이게 만든다. 예측을 불허하는 결과, 한 순간에 뒤바뀐 승부는 관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만일 승부가 사전에 조작된 것이라면, 승리가 속임수를 동원해서 얻은 것이라면 관중의 실망은 클 것이다. 그에 따라 그들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크게 반감될 것이다. 스포츠를 가장 매력적이게 만드는 요인이 사라지기 때문에 스포츠는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이유에서 스포츠단체들은 도핑이나 승부조작 같은 큰 도덕의 위반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로 반응한다.


만일 우리가 실천해야만 할 도덕을 큰 도덕에만 국한하여 볼 경우에 우리에게 중요한 도덕실천이란 페인트모션을 하지 않거나 경기 중에 파울을 범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승리하는 그런 행동의 실천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선수들이 도핑을 하지 않게 만드는 일, 선수들이 승부조작의 유혹을 뿌리치고 여기에 가담하지 않게 만드는 일이 우리의 관건이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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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태구 2014.03.04 14:59 신고

    작은 도덕과 큰 도덕 인상적인 설명이네요. 학교현장에서 결국 스포츠맨십의 교육은 작은 도덕의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제미있게 보았습니다.

 

 

 

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박근혜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겠다고 약속한 이후 사회 곳곳에서 행복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사실 행복은 오래전부터 여러 학자들의 주요 관심 대상이었다. 행복에 대한 초기의 관심은 주로 철학이나 심리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행복은 점점 더 경제학의 관심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행복에 대한 경제적 접근법의 대표적 척도는 국내총생산이다. 국내총생산은 최근까지 행복의 또 다른 표현인 삶의 질 또는 생활수준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항상 국민의 행복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경제학자 이스털린에 따르면 수십 년간 미국내총생산이 크게 상승했음에도 미국민의 평균적 행복감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지난 50년간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지만 국민행복지수는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2013 OECD가 발표한 행복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36개국 가운데 26위로 기록되어 있다. 2012년 12월 미국 갤럽이 발표한 국가별 행복도 설문조사에서도 148개국 중 97위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우리는 국가가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다른 요인들도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고 결론 내려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성장 이외에 어떤 요소들을 고려해야만할까?


잠시 1인당 GDP가 2000달러도 안되지만 국민의 97%가 행복한 나라로 알려진 부탄으로 눈을 돌려보자. 부탄의 4대 국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는 이미 1972년 국가발전은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국민의 삶의 질과 행복감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국내총생산 대신에 국민행복지수를 국가발전의 지표로 설정하자고 제안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부탄정부는 2008년 11월부터 국민행복지수를 국가 정책의 기본 틀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부탄의 국민행복지수 산출 지표에는 건강, 시간 활용 방법, 생활수준, 공동체, 심리적 행복, 문화, 교육, 환경, 올바른 정치 등 모두 아홉 가지 요인이 포함되어 있다.

 

작년 문화체육관광부가 국민체육진흥공단에 의뢰하여 실시한 국민생활체육 참여 실태조사에서는 사교성, 변화 수용력, 긍정적 인생 관리, 삶의 통제력, 삶의 기본적 욕구 충족도, 주변 친화, 목표달성 노력 등 모두 일곱 가지 요인을 행복지수의 지표로 활용하였다. 한편 미국의 갤럽은 50년 동안 150개국에서 매년 1000명을 대상(총인원 500만 명 이상)으로 행복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요인들을 조사하였으며, 직업적 웰빙, 사회적 웰빙, 경제적 웰빙, 육체적 웰빙, 커뮤니티 웰빙 다섯 가지 요인들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사람들은 행복을 느낀다고 결론을 내렸다. 부탄이나 국민체육진흥공단의 행복 지표들은 모두 이 다섯 가지 요인들로 수렴될 수 있다. 따라서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이 다섯 가지라고 결론 내려도 좋을 것이다.

 

 


체육활동 참여는 행복지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2012년 국민생활체육 참여 실태조사에 따르면 체육활동 참여는 행복지수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의 평균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5점대로 나타나고 있는데 비해 체육활동 참여자의 경우 7점대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또한 체육활동 참여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행복지수 또한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부터 우리는 체육활동 참여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확신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체육활동 참여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체육활동이 신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놀이적 소통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체육은 무엇보다도 스포츠적 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놀이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진지성의 세계, 부자유의 왕국, 필연의 원리가 지배하는 노동의 세계와는 다른 시간과 공간을 생성해준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놀이의 특성을 자유성, 무목적성, 독자적 세계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부담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이에서 부담 없이 가볍게 만나 함께 즐기며, 쉽게 친교 할 수 있다. 특히 체육은 신체활동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소통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가깝게 만들어준다. 신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소통은 상호간의 보이지 않는 벽을 쉽게 허물어주고, 거리를 좁혀준다. 그도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인식을 일깨워주며 상호 이해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집단 구성원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단합대회도 대부분 함께 음식을 먹는 회식이거나 함께 몸을 맞대고 땀을 흘리는 체육활동 같이 신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소통 형식을 띠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몸에 의한 또는 몸을 통한 소통은 말이나 글에 의한 소통보다 훨씬 직접적이다. 감정의 전달과 유대감 형성이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체육활동은 사회적 웰빙을 위한 이상적 조건을 제공해준다.


체육활동 참여는 육체적 웰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은 수십만 년 동안 줄곧 신체운동에 크게 의존하면서 살아왔다.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하여, 또는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하여 부지런히 신체를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현대인들은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게끔 조건이 갖추어진 사회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 결과 일상에서 신체운동의 양은 현저하게 줄고 있다. 이렇게 삶의 방식이 변했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은 신체를 많이 움직여야만 하는 생물학적 구조자체는 변화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은 신체의 기능을 적절하게 유지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활발하게 운동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신체의 정상적 기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운동이 부족한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운동부족은 이미 많은 의학적 연구에 의해 소위 현대병 또는 성인병의 주요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절한 신체운동이 필요하다. 체육의 핵심인 스포츠는 무엇보다도 신체운동을 핵으로 하는 인간의 활동양식이다. 스포츠를 규칙적으로 수행하게 되면 근육이 굵어지고, 탄력성이 커지며, 수축과 확장의 범위가 커지고 지구력이 강하게 된다. 반복적인 신체훈련을 통해 근육이 굵어지면 에너지원이 되는 물질인 글리코겐, 크레아틴인산, 크레아틴, 아데노신 등이 증가되며, 미오글로빈을 증가시켜 지구력을 증대시킨다. 또한 허파의 크기를 증대시켜 폐활량이 커지며 결과적으로 산소섭취량이 증가되어 에너지 발생이 더욱 활발하게 된다. 또한 대뇌피질의 지각력, 통합능력을 증대시키며 근지각, 자세지각, 운동지각을 개선하여 신경기능을 향상시켜 동작이 민첩하고 정확해진다. 스포츠는 이상에서 열거한 생리적 효과 외에도 영양의 소화, 흡수 능력을 향상시켜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해준다. 이렇듯 체육활동은 육체적 웰빙을 위한 이상적 조건을 제공해 준다.


이외에도 체육활동 참여는 삶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직장생활에 충실하게 함으로써 직업적 웰빙에도 적지 않게 기여한다. 또한 조기축구회나 배드민턴동호회 같이 지역별로 활성화되어 있는 동호회 중심 체육활동은 주민들 상호간의 소통을 촉진시켜주고 지역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주며, 지역의 일원이라는 소속감과 유대감을 강화시켜줌으로써 커뮤니티 웰빙에도 적지 않게 기여한다. 이렇게 체육활동 참여는 참여자의 행복지수를 여러 차원에서 높여준다. 그래서 체육활동에 주기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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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근대올림픽이 시작된 이후 경쟁스포츠는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꾸준하게 발전해왔으며, 현대인의 여가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스포츠는 이 과정에서 아마추어리즘,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같은 가치들을 표방함으로써 사회의 제 영역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았으며, 이에 힘입어 언론과 방송 같은 대중매체, 정치, 경제, 학문, 교육 등의 사회영역들과도 튼튼한 연결망을 형성하였고, 이 영역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사회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경쟁스포츠는 그 동안 지녀왔던 긍정적 이미지를 점차 상실하고 있으며, 비판적 학자들과 진보적 언론으로부터 온갖 비리와 기만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있고, 다른 사회영역들과 맺었던 협력적 관계도 점차 느슨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장기화할 경우 경쟁스포츠는 사회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날 우려가 있으며, 대중과 사회영역들로부터 외면당할 가능성이 높다.


경쟁스포츠가 각종 비리와 기만의 온상으로 지목받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승부조작과 도핑 같은 일탈 행위 때문이다. 특히 도핑은 그동안 스포츠가 지녀왔던 공정하고 건강한 이미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림으로써 경쟁스포츠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호의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도핑스캔들이 일간지와 TV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빈번하게 터져 나오면서 도핑은 우연적이며 일회적인 일탈형식이라는 대중의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신문구독자들이나 TV시청자들은 이와 같은 깨달음을 통해 공정함이나 건강 같은 긍정적 가치들과 결부되었던 경쟁스포츠를 기만, 약물, 질병, 죽음 같은 부정적 가치들과 결부시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스포츠의 긍정적 이미지를 자사의 상품 광고에 이용해왔던 기업들은 스포츠에 대한 계속적인 재정지원을 주저하고 있으며, 스포츠의 재현 기능에 기대어 평판과 지지율을 상승시키려고 노력해왔던 정치단체들 역시 스포츠에 무심해지고 있고, 교육 행정가들은 학교체육수업에서 ‘비-교육적’ 경쟁스포츠를 배제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IOC는 이와 같은 위기적 상황을 벗어나고자 도핑과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학계, 법조계, 정계, 대중매체 등 사회의 여러 영역들과 협력하여 경쟁스포츠에서 도핑을 근절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 기울여진 도핑 방지노력은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도핑혐의가 인정된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

 

IOC가 도핑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WADA가 창설되었고, 도핑검사기술은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국가별로 운동선수들에 대한 반-도핑 교육도 강화되었고, 도핑을 자행한 선수들에 대한 처벌 규정도 한층 엄격해졌다. 그러나 도핑적발건수는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현재 도핑은 전문적인 선수들의 영역을 넘어서 아마추어선수들과 스포츠동호인들에게까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지금까지 기울여온 도핑방지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동안 학계는 도핑의 원인을 분석하고 방지대책을 마련하는 일과 관련하여 윤리적 차원과 법적 차원에 국한하여 논의를 진행해왔다. 윤리적 차원의 논의는 도핑의 원인을 운동선수 또는 경쟁스포츠관련자 개인의 윤리 의식 결핍에서 찾고, 이들의 윤리 의식을 강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서 윤리 의식의 강화는 주로 반-도핑 교육과 반-도핑 홍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한편 법적 차원의 논의는 운동선수 내부의 감시자, 즉 윤리의식이나 스포츠맨십 같은 운동선수의 양심만으로는 도핑 근절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서 민법이나 형법에 의한 처벌 같은 외적 제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윤리적 차원의 논의와 법적 차원의 논의는 서로 뉘앙스는 다르지만 도핑의 원인과 책임을 철저하게 운동선수나 코치, 스포츠단체 관련자, 스포츠의학자 같은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개인화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개인화전략은 문제의 소재와 책임 전가를 분명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이에 근거하여 문제 해결 방법을 쉽게 도출해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용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도핑현상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효과적 방지 대책을 세우기 위한 전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인화전략이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경쟁스포츠의 도핑은 쉽게 이해될 수 있거나 쉽게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도핑은 다양한 관점들과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축구에 대해 …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 이제 당신은 … 한 스타디움의 관중석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 주심을 제외하고 모든 선수가 당신에게만 보이지 않는 마법의 외투를 입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검은색 반바지 차림으로 잔디밭을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노란색 카드를 공중에서 휘두르기도 하고, 호루라기를 부르고, 대화를 하기도 하고(혼잣말?), 욕설을 내뱉고, 주의를 주고, 얼굴을 찡그리고 거친 몸짓을 하는 남자를 보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 당신은 그가 나사가 하나 풀리고, 신진대사가 불균형하거나, 또는 정신적으로 뭔가 혼란스러운 사람이라고 추측할 것이다”(박현용 역, 2010)

 

위의 예는 개인의 행위가 심리적 과정보다는 사회적 맥락을 통해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기존의 윤리학 및 법학적 논의는 도핑 같은 일탈행위가 이루어지는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행위자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정이자 이기적인 동기로 감축시켜 설명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물론 기존의 논의 가운데는 도핑 같은 일탈행위의 원인으로 경쟁스포츠의 구조적 특성인 승리지상주의를 지목하고 해법으로 그것의 약화 또는 제거를 제안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관점 역시 경쟁스포츠와 연결되어 있는 더 넓은 사회적 맥락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앞의 예를 조금 더 진행시켜보자. 이제 선수들을 가렸던 투명망토가 벗겨졌다고 상상해보자. 이제 당신은 심판의 행동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그가 왜 뛰어다니고 소리치고 인상을 쓰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심판이 특정 팀에게만 유리하게 판정을 내린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분노하면서 그가 정신이 나갔거나 실수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판정실수가 반복될 경우 또 다시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게 될 것이며, 그에 대해 화를 내거나 자질을 탓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언론 보도를 통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의 통장에 일주일전 거액의 돈이 입금되었으며, 돈의 출처는 그가 유리하게 판정했던 팀을 후원하는 기업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면 의심스러웠던 그의 행동들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예가 말해주고 있듯이 개인의 행동은 행동이 이루어지는 체계의 기대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체계와 구조적으로 연동되어 있는 다른 사회체계(위 예에서는 경제)의 기대구조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도핑 같은 일탈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핑을 자행한 개별 행위자의 동기뿐만 아니라, 그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여러 사회체계들의 관계가 폭 넓게 분석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 맥락들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고 제시된 도핑의 원인 분석과 방지 대책은 설명력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기도 어렵다. 도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개인화전략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금지조처 이외에도 경쟁스포츠와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체계들의 기대구조, 상호침투, 교란 등에 대한 폭넓고 심도 있는 분석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체계들 상호간의 조정과 간섭 전략을 개발해내는 일이 필요하다.

 

 

ⓒ 스포츠둥지

 

 

 

박현용 역(2010). 축구의 미학: 세계 석학들 축구를 논하다. 초록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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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준한 2013.05.26 19:25 신고

    사람마다 생각하는것이 다르겠지만 이글 하나를 읽으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이듭니다.
    그것은과연 도핑이 나쁜것인가 괜찮을것도 같은데 라는 생각입니다.
    요즘에 성폭행범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반해 법적인 제제를 가해도 하루에 하나씩 꼭 기사를 보게됩니다.모든 법은 불법을 막기위한 해결책이라고 하지만 성폭행범들에게 한시간 강의를 해서 '성폭행을 줄일수 있을것이다'라는 생각은 크게 와닫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형시켜야한다. 종신형이다' 라고 하지만 현재 법으로는 이를 막을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사고방식,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법으로 막는 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것같습니다. 물론 조금이나마 도움은 되겠지만 말입니다. 이런것도 생각을 해봅니다. 한선수당 도핑횟수를 제한하는 겁니다. 아예 못하게 하지말고 횟수에 제한을 둔다든지 모든선수들에게 도핑을 허용한다든지 다른 방법을 모색해보는것이 좋겠지만 가장중요한것은 현재 사회에서 추구하는 실태에서 선수들에게 윤리의식 굘핍을 보안하여 도핑을 막을 방법을 찾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쉽게 없애는 방법중하나는 스포츠를 그냥 즐기고 스포츠경쟁사회를 없앤다면 사라질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 안중섭 2013.05.27 18:54 신고

    안녕하십니까 대학원 2학기차 안중섭입니다.
    이 글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에 있어 악의 축인 도핑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서 도핑과 같은 일탈행위가 단순히 개별 행위자의 동기에 의해 자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명의 선수 혹은 심판이 도핑과 같은 일탈행위를 저지르는 상황 그 뒤에는 아주 복잡한 사회체계(사회적 맥락)가 뒷바침되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단순히 윤리나 법과 같은 체제적인 부분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도핑에 관한 문제는 선수 개개인을 떠나 그 선수의 뒤에 있는 기업 혹은 사회 전체를 아울러 보는 눈을 통해 그에 대한 합당한 처벌 혹은 대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도핑을 자행한 선수의 잘못뿐만 아니라 그 선수가 왜 도핑이라는 악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김대원 2013.05.27 22:58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김대원입니다.
    경쟁스포츠가 각종 비리와 기만의 온상으로 지목받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승부조작과 도핑 같은 일탈 행위 때문이다.
    경쟁스포츠의 도핑은 쉽게 이해될 수 있거나 쉽게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도핑은 다양한 관점들과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도핑 같은 일탈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핑을 자행한 개별 행위자의 동기뿐만 아니라, 그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여러 사회체계들의 관계가 폭 넓게 분석되어야 한다.
    도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개인화전략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금지조처 이외에도 경쟁스포츠와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체계들의 기대구조, 상호침투, 교란 등에 대한 폭넓고 심도 있는 분석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체계들 상호간의 조정과 간섭 전략을 개발해내는 일이 필요하다.


    저 역시 도핑과 일탈행위의 원인과 책임은 개인과 사회 구조 두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윤리적 차원의 논의와 법적 차원의 논의의 무게를 좀 더 높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프로선수들은 2개월에 한번씩 무조건적으로 도핑검사나 약물검사를 주기적으로 받거나, 간접적 내용의 설문지로 성향테스트를 주기적으로 하는것, 법적으로는 벌금과 파직이 아닌 구치소로 형벌을 받는것으로 무게를 주는것입니다.

    그리고, 개인화전략을 기반으로 한다고 하셨는데, 전 개인이 왜 했는지는 궁금해하지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도핑과 승부조작을 한 이유의 최종목적은 최고의 자리를 원하거나 경제적인 문제 때문 일것입니다.
    선수, 심판, 감독 누구이든 이유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핑을 하거나 승부조작을 한 순간 뭐든 파직을 시켜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개인적인 사정은 개인의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포츠상에서 안된다는 걸 알면서 한다는 것은 다양한 사회체계의 성격과 스포츠맨십, 아마추어리즘 정신이 없으므로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경쟁스포츠와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체계들의 기대구조, 상호침투, 교란 등 현재까지 도핑과 관련된 사회체계들의 사건들을 알고 싶고, 체계들 상호간의 조정과 간섭 전략을 개발해내는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이병규 2013.05.28 18:14 신고

    도핑은 스포츠라는 작은 사회속에서 발생하는 가치, 규범등에 위반적인 행위입니다.
    스포츠에서의 도핑은 공정성이나 선수의 건강, 그리고 그것을 보는 타인들까지도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라는 작은 사회속에서 윤리와 법만으로 도핑을 막는다는것은 교실에 떠드는 학생에게 벌을 주는것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에게 벌을 준다면 잠시는 조용할지 모르지만 떠드는 행위를 계속 통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학생의 사고의 변화, 즉 스포츠라는 사회자체의 가치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거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스포츠를 가치중심의 문화로 이끌어 나가려면 사회적인 정책과 제도, 그리고 신념같은 부분이 앞서야 할 것이며, 개인의 의지와 가치관들은 많은 교육이 바탕이 되어야 도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최승구 2013.05.28 23:27 신고

    안녕하십니까 3학기생 최승구 입니다.
    개인적인 견해로서 저는 꼭 도핑이 나쁘다라고 생각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서로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는 상황으로서 나쁘다라고 본다면 여태 밝혀지지 않는 불법적인 부분들로 인해 얻은 이익들은 다 무효가 되고 인정하지않아야 되는게 아닌가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기억이 납니다.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도핑은 매우 비신사적인 행위지만, 이것 또한 알려지지 않는다면 개인과 사회에 크나큰 이익과 홍보 및 엄청난 흑자 창출을 이끌 것이라 봅니다.
    도핑방지, 윤리, 법안 등 부정적인 시선들로마 보는게 아니라 긍정적인 시선들로 바라본다면, 언젠가는 그 긍정적인 부분으로 인해 비신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가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라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 마수현 2013.05.29 00:24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마수현입니다.

    이번게 게재된 교수님의 글을 읽고 느낀 점은 어떤 현상을 관찰할 때 지엽적으로 보

    지 말고 그 현상 뒤에 숨겨진 배경속에서 본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승부조작과 도핑 같은 일탈행위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귀속시킨다

    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되는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화 전략이 계속 되는 한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경쟁

    스포츠의 뒤에 숨어 있는 배경을 분석하여 그에 맞는 전략을 개발해야 될 것입니다.

  • 정성원 2013.05.29 10:49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정성원입니다.
    "윤리와 법만으로 도핑 방지는 어렵다!"라는 본문의 글을 읽고 저 역시 도핑문제는 도핑을 한 개인의 선수에게 원인과 책임이 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니다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뒤에는 본문에서 본 축구심판의 승부조작 또는 자사의 이윤을 남기기 위한 기업, 스포츠를 계속적으로 재정지원을 해주는 지지자들을 통해서 승부조작과 도핑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법을 막기위해 존재하는 법적, 윤리적 차원의 논리를 조금 더 강력하게 대응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핑을 해서는 안된다고 더욱 본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선수들을 법적으로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도핑을 하게 되었는지 그 뒤의 배경을 정확하게 알고 대처를 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경쟁스포츠로 인해서 스포츠의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아마추어리즘과 같은 가치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스포츠에서 오로지 일등만 인정해주는 그런 사회적인 인식을 개선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더 긍정적인 마인드와 사고를 통해서 선수들이 눈치를 보지않고 편안하게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지금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이재민 2013.05.29 18:47 신고

    근대 올림픽 이후에서 볼 수 있듯이 스포츠는 스포츠맨쉽, 페어플레이등으로 인하여
    긍정적 효과를 통해 사회의 여러 영역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잊은채
    단순히 개인의 기록, 명예, 돈 등을 위해 도핑을 하게 됩니다. 물론 개인의 잘못과 사회체계적, 법등의 문제점도 있지만 선수들의 윤리의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핑을 통해 개인의 이익을 만들 순 있지만 차 후에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의 처벌 및 몰락뿐만아니라 스포츠계 전체에 많은 악 영향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물론 사회에서 경쟁스포츠를 하는 선수들은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좋은 성적을 내야만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한거도 있지만 선수들의 의식 부족이 가장 크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윤리와 법 강화 뿐만아니라 스포츠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체계 등다각적인 면에서 도핑을 줄 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 우동혁 2013.05.29 23:59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우동혁입니다.
    저는 승부조작과 도핑문제에 대한 뉴스를 항상 그 선수에 대한 원인, 책임, 처벌에 대한 보도만 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 선수에게만 고정관념으로 집중을 하였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알고있는 것은 이 선수의 스타성으로 선수만을 알고있고 이 선수의
    에이전트, 연관된 기업, 지원을 해주는 지지자들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래서 이 선수가 얼마나 처벌을 받고 있는지, 얼마나 반성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법적 처벌 규정이 너무 약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선수나, 연관된 지지자들 및 기업들에게 정말 껌값에 지나지 않는 벌금과 금방 처리할 수 있는 처벌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돈만 내면 끝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서로 연관된 사회구조체계들이 정말 긍정적 마인드와 경쟁스포츠에서 좋은 것들만 생겨나고 발전될 수 있는 먼가 강력한 처벌규정과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업, 지지자들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되고 그들의 손에 놀아나는 선수들이 아닌 경쟁스포츠에서 정정당당히 승복할 줄 아는 스포츠세계가 만들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 정현도 2013.05.30 00:11 신고

    안녕하세요? 저는 4학기생 정현도입니다.
    교수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위의 글 중에서 "개인의 행동은 행동이 이루어지는 체계의 기대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체계와 구조적으로 연동되어 있는 다른 사회체계의 기대구조에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말처럼 이러한 복잡한 관계속에서 문제의 본질, 배경과 이유 관계들이 폭 넓게 이해가 되어야 비로소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측면에서 도핑을 한 선수만을 처벌하고 넓은 사회적 맥락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해결하려 든다면 이같은 현상들이 지속될 것입니다.

    충분한 이해와 노력하에서 선수 자신 스스로의 올바른 윤리판단이 같이 선다면 도핑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사회적인 체계가 확립될 수 있도록 개인과 사회의 복잡한 관계를 먼저 이해하고 접근한다면 건강한 경쟁스포츠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 강민성 2013.05.30 00:51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강민성입니다.

    예전 스포츠는 현대인의 여가생활이라든지 페어플레이, 스포츠맨십 등 긍정적인 평가로 여러 분야 영역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사회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인 경쟁스포츠는 각종 비리, 승부조작, 도핑 같은 일탈 행위로 스포츠의 건강한 이미지가 퇴색되고 대중의 믿음도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무리 윤리 의식이 좋은 선수라 할지라도 도핑은 좋은 성적을 내야하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선수들에겐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기 전에는 도핑은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선수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글을 읽고 도핑 같은 일탈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핑을 자행한 개별 행위자의 동기부여가 아니라 그와 연결되어있는 여러 사회체계들의 관계가 폭 넓게 분석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경쟁스포츠로 인해 선수들은 일등을 할 수 밖에 없는 심적 부담감이 더할 것입니다.
    더 이상 승부조작과 도핑 같은 일탈행위를 한 개인선수의 잘못으로만 보지 말고, 경쟁 스포츠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는 코칭스태프, 스포츠 관련자, 기업 등이 어떻게 관련 되었는지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이나 처벌을 해야 승부조작이나 도핑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개인에 잘못으로만 치부하게 되면 그 악순환은 계속반복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백상우 2013.05.30 10:51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백상우 입니다.
    경쟁스포츠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발전함에 따라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대중매체 및 사회적 시선에 의해 경쟁이라는 스포츠요소를 갖춘 경쟁스포츠의 본질과 목적이 점차 위배되었고 현대의 스포츠는 건강함, 공정함, 스포츠맨십과 같은 긍정적 이미지와 결합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도핑과 승부조작 이라는 현대스포츠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범죄행위가 연결되어 있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도 도핑을 하는 선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위 글을 읽고 난 후에는 그 뒤로 배경이 되고 있는 사회적 시선과 끊임없이 자신을 재촉하여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 강제하는 성과사회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 같았습니다.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도핑 같은 일탈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이 도핑을 하겠다는 동기뿐만 아니라, 그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여러 사회체계들의 관계를 폭 넓게 분석을 하여 도핑의 원인과 방지 대책을 세워야 조금이나마 도핑이라는 스포츠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범죄행위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이형섭 2013.05.30 16:03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이형섭입니다. 경쟁스포츠가 발저함에따라 현대인들의 여가생활에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스포츠가 그 욕구를 충족시켜왔다. 스포츠의 기본바탕인 페어플레이 스포츠맨쉽과 같은 긍정적인 요인들이 스포츠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엇다. 그러면서 대중매채또한 스포츠에대한 관심이 증가하여서 더욱 스포츠가 인기있어졌다. 하지만 경쟁스포츠에는 도핑과 승부조작이라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는것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도핑과 승부조작은 범죄를 일으키는 개인에게도 분명한 문제가 있지만 더 큰범위로는 그 선수나 감도들이 속해있는 집단의 이해관계를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다. 경쟁스포츠의 목표인 승리가 중요시되면서 이기기위한 방법으로 약물복용이나 승부조작들을 하게된 것이라고 볼수있다. 이것들을 개인이나 스포츠 집단의 도덕적문제로만 여겨서는 안되고 지금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과 또 그 승부를 지켜보는 우리의 자세에서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도핑과 승부조작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수 나 감독 개인의 도덕적 가치관확립도 중요하지만 승패만을 중요시 여기는 스포츠체계와 성과위주로 선수나 감독을 판단하는 관점을 함께 변화시켜야만 도핑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상협 2013.05.30 16:26 신고

    안녕 하십니까 1학시생 김상협 입니다.
    교수님 글 잘읽어습니다.
    승부조작과 도핑을 나쁘게 보고있는 사람중 한사람 입니다.
    하지만 저는 도핑 및 승부조작한 소속단체가 나쁘지만 그보다더 매체(방송&신문)가 더 나쁜것 같습니다.
    이런한 매체는 한사건이 나오면 좋은 내용은 작게 적고 나쁜쪽으로 더 부각 시켜서
    더 악질처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매체가 간섭하고 비판적으로 다가오면 이문제를 해결할수 없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좋은것보다 나쁜걸 먼저 습득 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예를들면 외국인 들인 처음 배우는 한국말이 욕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욕이 체음에는 재미있고 신기해서 먼저 배우지만 나중에는 이게 안좋은것인지 알고 이해하지만 그래도 습관 처람 사용을 합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을 했다가 나중에는 버른 처럼 행동을 하는데 이게 누가 하지말라고 하면 더하고싶다는(청개구리)성격이 큰게 작용을 하는것 같습니다.
    협회나 단체에서 교육을 하고있지만 매체가 조금 더 다른 시각으로 보고 좋은 쪽으로 도와주면 더크고 좋게 효과가 있을것 같습니다.

  • 양세정 2013.05.30 17:11 신고

    안녕하십니까?
    양세정입니다.
    교수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도핑은 개인의 윤리의식에 가장 큰 문제점을 두고 있지 않나 생각했는데 이 글을 읽고 개인의 윤리의식 뿐만 아니라 사회체계와의 관계, 작게는 개인의 사생활 문제까지 관여되어 있다는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보통 선수들의 도핑이 확인되고 문제로 떠오르면 사람들의 질타는 고스란히 선수들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속을 보면 오로지 선수 개인의 잘못된 판단뿐 아니라 그 선수가 속해있는 팀과 그 팀의 스폰서가 깊숙히 관여되어 있다는 겁니다. 도핑이라는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선수 개인의 양심이나 가치관만을 문제 삼는것이 아니라 그 뒤의 큰 배경들의 문제를 하나씩 끄집어 내어 해결하고 교육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 서정학 2013.05.30 17:34 신고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1학기생 서정학입니다.
    교수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저도 교수님의 의견처럼 도핑과 승부조작으로 인해서
    지금의 스포츠는 많은 이미지 실추와, 대중에서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대중에게 외면을 받게 되면, 기업에서의 스폰서쉽도 끊어지게 될것이고, 그렇게 되면 스포츠계의 어려움이 많아질것 같아서 걱정이 앞섭니다.
    그리고 IOC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핑이 줄지 않고 늘어나는것은, 교수님 말씀처럼 개인화 전력을 기반으로 해서 보다 폭 넓은 방법으로 다가가야할것 같습니다.
    먼저 경쟁스포츠로 인한 선수가 처해진 상황과,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체계들의 기대구조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려야할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적 흐름과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면, 도핑을 하는 선수는 없어지지 않을꺼 같습니다. 그리고 도핑 뿐 아니라 승부조작같은 경우는 선수혼자만의 문제라기 보다는 감독 혹은 팀 전제의 문제가 될수 있고, 함께 고민해야될 문제 인거 같습니다.

  • 허민지 2013.05.30 17:45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허민지입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이때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아볼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도핑이라는 부분을 접했을 때 당연히 불법적인 것이며, 선수의 과욕으로 발생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글을 읽고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보았을 때 그 선수는 왜 그런 욕심이 생겨나고 불법적이며 자신의 몸을 망치는 행위까지 해야 했을지 그 과정에는 물질만능주의와 승리만이 목표가 되는 메달의 색깔에만 취중되는 사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핑이라는 행위가 단순히 개인의 불법적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구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페어플레이, 스포츠맨쉽, 건강 등 스포츠를 접했을 때 떠오르는 대표적 이미지들이 사회의 기대구조로 인해 부정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부분이 안타깝습니다.
    이 문제를 법이라는 도구로 단순히 개인에게 가해지는 처벌로 해결해 나갈 수 있기 보다는 성과주의사회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최규창 2013.05.30 17:49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최규창입니다.

    항상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모든 글의 내용들이 겉보기만이 아닌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도핑이 개인만의 이해관계가 아닌 여러 복잡한 관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 잠깐 부정적인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도핑을 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승리를 목표로한 것 이기에 지는 경기를 위해 도핑을 하는 선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쟁적인 사회 구조와 함께 승부조작을 부추기는 주변의 환경과 분위기가 먼저 완화 되면서 분위기를 바꿔나가는 것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도핑, 승부조작 등 선수 개인과 경기게 개입된 문제만이 아닌 사회적인 면에서 큰 틀안에서 다뤄야 할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조성우 2013.05.30 18:00 신고

    안녕하십니까 3학기생 조성우 입니다.

    항상 사람들은 도핑이라고 하면 나쁜것이다, 그 선수는 추방 당해야 된다고 생각들을 하고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 글을 읽고 난 후 그 선수만의 잘못이 아닌 성과주의라는 사회적 측면으로 인해 선수 스폰서나 매스컴 등 에서 무언의 압박이 개입이 됐는지를 먼저 찾고 그 해결방안을 마련을 해야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이런 악순환 들이 반복될것이고 도핑 이란 약물복용을 계속 할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할것입니다.

  • 박병준 2013.06.01 01:07 신고

    안녕하십니까. 체육교육전공 1학기생 박병준입니다.

    이번 주제의 글을 읽고 나서 도핑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먼저 스포츠에서 선수들은 왜 도핑을 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도핑은 운동선수들에게 마지막 수단이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인간은 끝 없는 노력을 해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은 그 한계 에서 도핑이라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 하고 약물복용 또는 투여하여 자신의 신체적 한계 능력을 뛰어 넘어 스포츠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수들은 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 스포츠가 지녀왔던 공정하고 건강한 이미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 경쟁스포츠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호의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을까 그이유는 바로 현재의 사회와 대중매체 두가지가 선수들을 도핑의 유혹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든지 1등만 인정받고 1등만이 스포츠 세계에서 살아 나갈 수 있습니다. 2등선수, 3등선수는 인정 받지못하는 것이 현실 입니다.
    이러한 사회와 대중매체들이 변화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전세계 스포츠 에서는 도핑이 사라 질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스포츠정신에서 도핑은 분명 잘못되고 올바르지않지만, 먼저 우리의 사회와 대중매체의 변화가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2011년 7월 한 법학도는 스포츠둥지에 투고한 글 「도핑과 lex sportiva(스포츠법률) 흑과 백」에서 “자정능력이 없는 스포츠의 불공정함은 외부의 메스가 필요하다”고 썼다. 이 법학도에 따르면 사람들은 스포츠가 필연의 영역(공적 영역)이 아니라 자유의 영역(사적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스포츠세계에서는 사적 자치를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적 자치란 경기장에서 일어난 일은 경기장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한다는 의미이며, 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 소위 스포츠법률(lex sportiva)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학도가 보기에 경기장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스포츠법률만으로는 경기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해결할 수 없다. 도핑 같은 불공정한 행위들이 스포츠의 일상이 된 이유도 스포츠법률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그는 스포츠법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스포츠의 사적 자치에 반대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을 조금 더 부연하자면 스포츠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일반법, 즉 민법이나 형법의 도입을 적극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스포츠의 문제 해결을 위한 일반법의 도입을 요청하는 법학도의 주장을 접하고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 과연 그가 주장하고 있듯이 경기장 밖의 논리를 경기장 안으로 도입한다면 과연 그와 같은 조처를 통해 경기장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을까? 즉 법이 간섭할 경우에 스포츠에 만연해있는 도핑 같은 일탈행위는 근절될 수 있을까? 둘째, 법이 스포츠에 간섭할 경우에 부수적으로 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까? 첫 번째 의문과 관련하여 저자는 법의 간섭으로도 스포츠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의문과 관련하여 저자는 오히려 법의 간섭을 통해 스포츠의 긍정적 이미지가 더욱 크게 훼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하겠다.


먼저 첫 번째 관점부터 살펴보자. 법의 간섭을 통해 스포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은 일상적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 사회 내에서 법적 처벌의 수위가 아무리 높아져도 범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법은 결코 불법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오히려 법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불법의 증가를 동반한다. 법은 불법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사회생활에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과대평가한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행위자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범죄발생율과 사회적 불평등 정도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경험적 연구결과들은 범죄의 원인이 개별 행위자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에도 있다는 점을 암시해주고 있다. 스포츠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핑 같은 일탈행위는 법적 제재 조치만으로 방지될 수 없다. 그와 같은 일탈행위의 원인은 행위자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범죄 유발을 암묵적으로 조장하는 경쟁스포츠와 그 주변체계들에게 더 큰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도핑 같은 일탈행위의 원인과 책임을 오직 행위자 개인에게만 귀속시킨다.

 

 

다음으로 법적 간섭을 통한 스포츠 자체 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자칫 스포츠의 긍정적 이미지를 더욱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 법의 코드에 입각하여 스포츠를 관찰할 경우 불법적 스포츠의 지칭은 필연적이다. 합법의 증가는 불법의 증가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스포츠가 합법과 연결될 가능성과 함께 불법과 연결될 가능성도 함께 증가한다. 이것은 경쟁스포츠가 법적 커뮤니케이션의 사슬에 등장할 경우에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현대 경쟁스포츠는 공정, 건강, 스포츠맨십 같은 가치들과 결합되면서 긍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미지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핑이나 승부조작 같은 일탈행위로 인하여 경쟁스포츠는 기만, 죽음, 범죄 같은 가치들과 결합되었으며, 그 결과 애초에 갖고 있던 긍정적 이미지가 훼손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에 더하여 스포츠를 대상으로 한 법적 관찰이 일상화될 경우 스포츠의 부정적 이미지는 더욱 확산될 것이다. 사회의 기능체계로서 법은 오직 합법과 불법이라는 주도적 코드에 기초하여 스포츠를 관찰하며, 이 과정에서 스포츠와 불법적 이미지의 결합은 필연적이다. 법에 의해 불법적 스포츠가 커뮤니케이션되고, 이로부터 각종 기능체계들의 반향이 뒤따를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법에 의해 지칭된 불법적 스포츠는 대중매체에 의해 스캔들로 부각될 것이며, 다양한 종류의 기고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필연적인 결과는 “불법적 스포츠” 커뮤니케이션의 확산이다. 법적 간섭 보다 우선되어야할 것은 스포츠에서 일탈행위를 조장하는 스포츠 내적 및 외적 기대구조들의 완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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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동혁 2013.04.23 23:45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우동혁 입니다.
    저는 스포츠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스포츠 법률에서 전적으로 처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수들과 팬들에서의 폭력, 도핑 등 몇 가지에서는 외부의 법을 이용하여 강한 처벌을 내려야 되지만 스포츠 법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까지 외부의 법을 도입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하다가 아무런 죄가 없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순간 경찰을 보면 이상하게 뜨끔하게 됩니다. 이런 조금의 거리감이 있는 외부적 법률이 사소한 것에서도 사람의 마음에 때로는 크게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과도한 외부의 법률까지 이용을 하면 공정, 건강, 스포츠맨십, 팬들의 열광하는 이런 좋은 커뮤니케이션들도 피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정성원 2013.04.24 14:40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정성원입니다.
    저는 스포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이 스포츠 법률로써 처리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반 민법이나 형사법의 도입과 함께 해결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핑과 승부조작을 예로 들자면 스포츠 법률로서는 제재를 할 수는 있겟지만 완전히 사라질 수 있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법이나 형사법을 같이 도입하여 처벌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물론 개별 행위자에게 모든 것을 돌리지만 사회배경이나 사회구조에 있어서 그렇게 만든게 아닌가 한번은 되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스포츠 법률로서만 제재를 가한다면 더욱 도핑이나 승부조작과 같은 일탈행위들이 줄어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스포츠 법률로서 경기장 안에서의 모든행위들을 통제를 할 수 있다면 너무나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과도한 법률까지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포츠 법률과 일반 민법이나 형사법을 같이 도입하여 적절하게 사용하면 경쟁스포츠에서의 공정, 건강, 스포츠맨십 같은 긍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조민영 2013.04.24 15:05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조민영입니다.
    저 역시 일반법을 시행한다고 해서 도핑, 승부조작 같은 불공정한 행위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일반법을 시행함으로써 스포츠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확산되는 것도 불보듯 뻔한 일이지만, 모든 불공정한 행위들이 스포츠 법률에 의해서 해결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고 법의 심판없이 사적자치를 우선시해서 스포츠 외적 내적 완화를 기대하는것 역시 어려운 일인 듯 합니다.

  • 최규창 2013.04.24 20:58 신고

    교육대학원 1학기생 최규창입니다.
    스포츠에 불공정한 행위들을 스포츠 법률 안에서만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승리 지상주의로 인해 경쟁 구도가 심해짐에 따라 발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황금만능주의의 사회적 구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스포츠 법률 안에서 불공정한 행위들을 근절 시킬 수 있는 처벌이 이루어 지고, 처벌을 스포츠 법률 안에서 강화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위의 글에서 보듯이 '법은 결코 불법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오히려 법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불법의 증가를 동반한다.' 라고 말 한것 처럼 사회적으로 스포츠에 대한 법을 만든다면 그것이 근절 되지는 않고 불법의 증가를 뜻하기에 각 종목의 스포츠 법률 안에서 불공정한 행위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엘리트 선수나 공인으로 있는 스포츠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유년 시절부터의 불 공정한 행위에 대한 정서적 교육이 이루어 지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 조성우 2013.04.24 20:58 신고

    교육대학원 3학기생 조성우 입니다!
    스포츠라는 자체에서 승리지상주의적인 경쟁구도의 요소를 빼버린다면 과연 스포츠로서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는가 의심해봅니다.
    일탈행위를 조장하는 스포츠 내적 및 외적 기대구조의 완화도 중요하지만 기대 자체만 완화 해버린 스포츠로는 가치가 급격히 떨어 질 것이다.
    기대감을 낮춘다기 보다 메스컴을 통한 캠패인 및 불법적 스포츠를 막는 국민적인 운동을 조성해야한다.
    그리고 엘리트 선수들의 정신적인 교육을 체계적이고 심도있게 하는것이 불법적 스포츠의 발생을 감소시키는 긍정적인 측면이 되지 않알까 생각합니다.

  • 백상우 2013.04.24 21:22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백상우입니다.
    저는 스포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은 스포츠 법률로써 처리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경기중에 일어난 일은 경기룰에 따라 중재를 하는 심판이라는 존재도 있기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핑과 승부조작을 예로 들자면 이 문제들은 따지고 보면 경기중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경기전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경기전에 일어난 일들은 일반법률로써 따져야 될 문제인것 같습니다.경기중에 도핑이나 승부조작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스포츠 법률로써 제재를 할 수는 있겟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사전에 일반법률로엄격히 다스려야 사전에 예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 경기를 보면 시합중에 비신사적인 행위, 경기룰에 어긋나는행위,들은 경기룰에 따라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하지만 시합중 선수들간 살인을 저지른다던가 이러한 문제는 없기때문에 일반 민법이나 형법까지 스포츠경기에 도입되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포츠법률 에서 룰을 어길시 더많은 페널티를 부여해주고 경기뿐아니라 선수들을 사전에 교육함으로서 문제들을 사전에 예방을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 정현도 2013.04.24 22:34 신고

    안녕하십니까? 4학기생 정현도입니다.
    합법과 불법은 상관관계이며 돈이라는 목적이 스포츠 이미지를 높이거나 훼손시키는 큰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외부에서 발생되어 내부로 들어오기 때문에 스포츠의 합법, 불법이라는 코드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만약에 불법이 되는 도핑, 승부조작 등이 민법으로 처리가 될 경우 스포츠의 부정적 이미지 는 더 확산되어 제2의 법에 간섭을 받아 스포츠 내의 자생력, 기반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스포츠의 문제들이 스포츠의 법안에서 해결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부분에서는 민법의 강력한 부분을 부분도입하여 스포츠법으로서 처벌이 되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최소화시키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불법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구조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어린선수시절부터 안전한 학습 환경이 보장 되어 인성 및 윤리교육을 바탕으로 한 교육이 철저히 이루어져 스포츠 윤리관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고, 잘못된 승부 조작이나 도핑 등이 악습 되지 않도록 건강한 스포츠의 근간을 교육시켜야합니다.
    합법-불법의 주도적 코드에 기초하여, 불법적 스포츠의 필연적 근절을 위해 적절한 법의 심판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스포츠 내에서 선수들이 자신의 기량만으로 평가 받을 수 있는 합법적인 구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마수현 2013.04.25 00:04 신고

    1학기생 마수현입니다.

    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회든 또는 어떤 분야든 법이 등장하면 그 동안 행해져 왔던 것들은 더욱 더 음성적으로 변해 법의 망을 교묘하게 피해갈 것입니다.

    법률적 마인드(리걸마인드)사고에서는 법적 사고력만이 가장 우선시되고, 그 외의 요소들은 부차적인 것들로 중요시 되지 않습니다.

    법률적 마인드로 스포츠 분야를 바라보고 외부의 메스를 사용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더욱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마치 암세포처럼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마지막 수단인 법...이 전에 근본적으로 스포츠에서 일탈행위를 조장하는 스포츠 내적,외적 기대 구조들을 완화하면서 예방하는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준한 2013.04.25 00:31 신고

    2학기생 박준한입니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법대생이 쓴글을 반론하는 글을 썼다고 해주신말씀만으로 어떤내용일것인지 생각했었는데 거의 맞아떨어진것같습니다.
    법대생은 스포츠도 민법이나 형법으로 스포츠안의 법을 다스려야한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작은도덕과 큰도덕이 적용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안에는 룰이라는것이있습니다. 선수가 시합중규칙을 어긴다고해서 징역살이를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시합안의 룰이 아닌 큰도덕(예를들면 승부조작)일경우는 얘기가 달라집니다.프로농구팀의 모감독은 형법에 따라 징영2년이라는 구형을 선고받은바 있습니다.
    법대생은 오로지 생각을 스포츠를 자신의 관점에서만 해석을 했기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법이면 다 해결된다는 생각을 하는것같습니다. 그 생각이 잘못된것은 아니지만 운동을 하는 스포츠관계자들은 다르게 생각을 할수있다는것입니다.
    니콜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에 따르면 보는관점에 따라 생각하는것도 달라지기 때문에 법을 적용했을때 이런생각 저런생각들이 나올수있을것이고 법대생의 생각에 반론하는 교수님의 생각또한 이차등급관찰에 따라 관찰하는 관찰자중 한명의 생각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자본주의 사회의 어쩔수 없는 현상인것같고 정답은 있을수 없고 단지 스포츠하는 선수들이 경기규칙에 맞게 최선을 다해준다면 법은 규칙에 다가서지 못할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박병준 2013.04.25 00:31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박병준입니다.
    제 생각에는 스포츠경기 안에서 이루어 지는 법적인 부분과, 스포츠경기 밖에서 이루어지는 적인 법적인 점을 구분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경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수, 코치, 감독 들이 일으키는 돌발적인 행동은 경기중 경기규칙에 따라 심판이 그에 따르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옳고, 경기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도핑, 승부조작, 대학입시비리 등은 민법을 통해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구분을 지어 시행 한다면, 현재 우리나라 스포츠에서 발견되고 있는 도핑, 승부조작, 대학입시비리, 선수폭행 이러한 부분들은 하루 빨리 해결 할 수 있을 것 이고, 현재 우리가 스포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 이미지를 벗어 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 임종대 2013.04.25 11:04 신고

    1학기생 임종대 입니다.
    스포츠의 사적자치로서 스포츠는 경기가 일어난 경기장 내에서 해결된다고 하였습니다. 불공정한 행위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스포츠 법률만으로 해결을 하려한다는 점인데 스포츠는 각 스포츠마다 규칙이있고 룰이 있습니다. 축구경기에서 심한반칙에 범한 선수는 경고또는 퇴장을 적용하므로서 페널티를 주고 심한경우는 심판과 리그관계자들의 협의하에 벌금또는 몇경기 출장 정지라는 벌칙을 주게됩니다. 이런 반칙을 범한 선수에게 스포츠규칙이아니라 민법,형법을 적용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법과 형법을 적용하지만 그 적용범위를 정하고 경기장 내부의 문제는 선수들이 경기중에 일어나는 일들뿐이며 도핑과 승부조작등은 이미 경기가 진행되기 전에 발생한 외부에서 발생한 점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민법,형법이 적용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경기의 내부외부를 잘 따져보아 경기내의 경기 규칙의 위반인지 경기외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개입하여 이루어지는 불법행위 인지를 잘 따져보고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은 그행위가 정당한지 불법인지만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스포츠 법률과 잘 ㅅ생각해보고 판단하여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안중섭 2013.04.25 11:21 신고

    안녕하십니까 2학기생 안중섭입니다.
    위 글의 법학도가 주장한 내용에 따르면 스포츠에 있어 도핑 같은 불공정한 행위들이 만연하는 이유는 스포츠법률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며,스포츠법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스포츠의 사적 자치에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스포츠의 본래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그 의미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 생각합니다. 비록 현대 사회의 스포츠가 도를 넘는 경쟁 속에서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긴 하지만 스포츠는 경쟁과 유희성을 가진 신체운동 경기라는 의미를 토대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도핑과 같은 불공정한 행위들이 스포츠에서 만연하는 것은 위 글에서 언급했듯이 운동선수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경쟁을 부추기고 스포츠 도박과 같은 사회적 배경들이 그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민법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법의 기본 원리에 따라 선수 개개인에게 그 책임을 떠 넘기게 되고 이는 결국 스포츠의 공적 자치를 넓힌다고 한들 해결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스포츠에 민법을 도입하는 것, 즉 스포츠에 공적 자치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스포츠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켜 '불법적 스포츠'를 만연케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 곽푸름 2013.04.25 14:00 신고

    안녕하세요 1학기생 곽푸름 입니다.
    역시나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본문의 마지막내용, '법적 간섭 보다 우선되어야할 것은 스포츠에서 일탈행위를 조장하는 스포츠 내적 및 외적 기대구조들의 완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부분에서 답을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길은 참 여러가집니다.
    걸어서 한달이 걸려 도착을하느냐,자동차를 훔쳐서 하루만에 가느냐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만약 문제가 시간을 다투는일이라면
    후자의 방법도 고려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변에서 손가락질 받습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피해는 막을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위해서 지금당장의 피해를 무시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법적제재로 인한 스포츠 이미지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두려워해서 지금당장 피해를보는 선수들을 외면할수는 없다고생각합니다.

    내외적 구조의 변화를 유도함으로써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나 그 결과로 가기전까지의 공백을 메워줄 임시방편또한 무시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얻기위해선 작은부분의 희생을 감수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병규 2013.04.25 15:32 신고

    안녕하십니까? 대학원생 이병규 입니다.
    스포츠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규칙요소를 빼버린다면 그것은 놀이에 속한다는 사실을 배운적이 있습니다. 놀이에서 발전한 것은 맞지만 앞서 말했듯 스포츠에는 공정, 건강, 스포츠맨십 같은 가치들과 결합되면서 긍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는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모든 사회에서 집단을 이룰 때 소수 몇%는 악의 집단을 이룬다고 합니다. 스포츠와 법률이 동반하게 된다면 스포츠의 본질의 의미와는 거리가 더욱 멀어질 것이라 판단되며, 스포츠에 위반되는 행위들은 합법이냐 불법이냐에 관계하는것이 아니라 단지 스포츠에 도덕적 의미를 위반되느냐 안되느냐 이것이 문제의 틀로 기준을 잡아야하며 그에따른 문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쳐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앞으로의 스포츠에 또 다른 문제점들을 예방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 정문주 2013.04.25 16:26 신고

    안녕 하십니까? 대학원 1학기생 정문주 입니다.
    법적 간섭을 통한 스포츠 자체 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자칫 스포츠의 긍정적 이미지를 더욱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 법의 코드에 입각하여 스포츠를 관찰할 경우 불법적 스포츠의 지칭은 필연적이다. 합법의 증가는 불법의 증가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스포츠가 합법과 연결될 가능성과 함께 불법과 연결될 가능성도 함께 증가한다. 이것은 경쟁스포츠가 법적 커뮤니케이션의 사슬에 등장할 경우에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라는 이말에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사람을 자꾸 불볍적으로 만들어 가며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생각하고 그결과를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도핑또는 승부조작이 계속 일어 날것입니다. 법적으로 다막는 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여러 방법을 도입해서 스포츠 세계에서 불법적인 인들이 살아 졌으면 합니다.

  • 김상협 2013.04.25 16:39 신고

    안녕 하십니까 교수님 1학기생 김상협 입니다.
    저의 생각은 스포츠경기에 이루어지는 법적인 점은 구분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복싱경기중에 한선수가 사망을 하였을경우 때른 선수는 승리하고 법적 조치는 없다 하지만 민법 형법으로 가면 피해를 입히면 구속및 벌금 형에 처합니다.
    이처럼 경기에 맞는 규정과 규칙이 있기때문에 저는 구분이 명학하게 되여야 된다고 봅니다.

  • 윤재현 2013.04.25 18:03 신고

    안녕하십니까. 2학기생 윤재현 입니다.
    승부조작, 도핑 등의 불법행위가 스포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훼손시킨 점에 대해서는 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법학도의 몇 가지 사례를 예로 스포츠법률에 반대한다는 말에는 설득력이 부족한것 같습니다.
    스포츠를 대상으로 한 법적 관찰이 일상화될 경우 스포츠의 부정적 이미지와 더불어 불법적 스포츠 커뮤니케이션은 더욱 확산될 것이며, 제1 제2제의 승부조작 사건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정춘엽 2013.04.29 14:41 신고

    첫째, 법의 간섭이 스포츠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행위자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게하는 일은 좋지 않은 일인것 같습니다.
    둘째, 하지만 부정적인 면을 너무 감추는 일도 스포츠의 발전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면과 부정적인면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조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승구 2013.04.30 11:02 신고

    안녕하십니까 3학기생 최승구 입니다.
    법의 간섭을 통해 스포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스포츠 외적인 부분에서 간섭이 들어 온다면 스포츠 자체의 이미지 훼손 우려가 됩니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면을 감추려고만 하는 것도 문제는 있다고 봅니다.
    외적 요소가 들어오려면 내적요소와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 져야 하고,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이 커뮤니케이션이 되어도 스포츠의 어두운 면들은 깨끗히 사라지기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선수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선수와 지도자 개개인의 부단한 노력과 스포츠를 지키려는 문화적 마인드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 허민지 2013.05.25 16:51 신고

    안녕하십니까 1학기생 허민지입니다.

    스포츠가 스포츠법률 외의 법으로 간섭받게 된다면 그 법을 피하기 위한 또 다른 불법이 생겨날 것이고, 그것으로 인하여 부정적인면이 노출되면서 스포츠 외의 다른 시선들이 스포츠를 더욱 부정적 모습에서부터 관찰을 시작하게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그 전 글에서 접했던 도핑을 비롯한 모든 스포츠의 불법적인 모습이 개개인의 잘못만으로 판단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습니다.
    스포츠 법률이 아닌 다른 법으로 불법적행위를 한 선수를 관찰하게 된다면 우리사회가 점점 물질만능주의와 승리가 먼저인 사회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은 인식되어지지 못한채 선수 개인에게 단지 그 불법적행위에 대한 처벌만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된다면 불법적행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악순환이 계속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스포츠 관한 문제는 법의 간섭보다는 스포츠법률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1876년의 박스 스코어(wikipedia. H. Chadwick)

 

 

1904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80번째 생일을 맞은 한 언론인에게 50년 동안 야구계에 남긴 업적과 공헌을 되새기며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 그 주인공은 19세기 미국 “야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포츠 라이터 채딕(H. Chadwick)이었다. 스포츠의 중심에는 선수가 있었지만 스포츠 역사의 중심에는 저널리스트들이 있었다. 채딕의 업적은 야구 가이드 편찬, 야구 기록의 통계적 정리, 야구의 역사 정립 등이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야구 통계분야의 업적이었다. 야구장에서 “KKK”라는 피켓이나 현수막을 보게 되면 채딕을 떠올리게 된다. 그가 처음으로 스트럭 아웃을 K로 표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채딕은 1824년 잉글랜드 엑시터에서 출생했다. 12살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하여 브루클린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그는 아버지처럼 운명적으로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다가 스포츠 전문 기자가 되었다. 1844년부터 기고를 시작한 이래 『뉴욕타임스』를 비롯하여 많은 언론에 야구에 관한 글을 썼다. 1957년부터 『더 뉴욕클리퍼(The New York Clipper)』지(誌)에 야구 기자 및 통계전문가로 발탁되기도 했다. 펜 하나를 도구로 그가 야구 발전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아마추어 야구 통계학자 겸 야구 전문 라이터로서 글을 통해 야구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 알코올과 도박에 찌든 야구의 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최초의 야구 가이드  《비들 베이스볼 플레이어(The Beadle‘s Baseball Player)》를 편찬했다.

 

채딕이 야구 역사에서 빛나는 것은 야구 기록의 통계적 정리를 시도한 최초의 기자였기 때문이다. 1861년 『비들 가이드(Beadle guide)』에 유명한 선수의 아웃(outs), 런(runs), 홈런(home runs), 스트라이크아웃(strikeouts) 등에 관한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였다. 그것이 미국 최초의 야구 기록 데이터 베이스였다. 1867 워싱턴DC 야구클럽의 전국 투어에서 공식 기록 집계를 맡았고, 1874년 잉글랜드 투어에도 참가했으며, 1876년에는 야구의 박스 스코어(box score) 기록 방식을 고안하여 선보였다. 첫 박스 스코어는 9명의 선수를 나열하는 가로 9줄과 9이닝을 표시한 세로 9줄의 격자 표였다. 채딕은 표에 약어를 사용해 기록을 정리하던 어느 날 남들은 영문도 모를 K자를 사용했다. 그것은 스트라이크 표시였다. strike의 과거형인 ‘struck out’의 ‘struck’의 끝 철자 K를 사용했던 것이다. S를 쓰자니 희생타(sacrifice hit) S와 중복되었기 때문이다. 야구의 모든 박스 스코어 구조와 기초적인 포맷이 채딕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외 타율, 방어율 등에 관한 통계적 처리도 그가 처음 시도했다.

 

채딕은 야구 발전에 대한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생일 축하 메시지까지 받았고, 1938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그러나 1908년 사망하기 전까지 깊은 마음고생을 했다. 1860년 정확한 야구 기원설을 제시했으나 학계에서 무시당했고, 1903년 재차 야구는 영국의 라운더스(rounders)라는 놀이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주장했다가 미국 스포츠 국가주의자들로부터 냉대를 받으며 살았다. 1907년 더블데이 야구 창안설이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으나 이듬해 그는 죽음을 맞았다. 수많은 업적으로 훗날 미국 야구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으나 KKK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은 야구기원 논쟁에서는 KK를 당한 야구 타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야구 역사 속에는 KKK를 잡은 투수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Betts, John R.(1974). America's Sporting Heritage. Reading, MA : Addison-Wesley.
Chadwick, Henry(1901). Old Time Baseball, Outing, XXXVIII (Junly).
Grabowski, John F.(2001). Baseball. San Diego, California : Lucent Books Inc.
Melvin, Adelman(1986). A Sporting Time: New York City and the Rise of Modern Athletics, 1820-70. Urbana, Ⅲ :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Peverelly, Charles A.(1866). The Book of American Pastimes: Containing a History of the Principal. New York: Published by the A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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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2009년 영국의 ‘더 인디펜던트’지에 세계 최고의 남자 바람둥이 스포츠 스타 15명을 선정한 바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탁월한 기량과 출중한 남성적 외모였다. 최고의 바람둥이는 축구시합 중 하프타임을 이용한 섹스스캔들을 일으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 조지 베스트였다. 마돈나와 염문을 뿌렸던 농구스타 테니스 로드맨도 명단에 빠지지 않았다. 테니스 스타 비타스 게룰라이티스도…. 남자 스포츠 종목에서 스타들의 강한 남성성(manliness)은 여성들의 눈길을 끄는 강한 흡인력을 지니며, 그 흡인력은 해당 종목의 상품적 가치를 높여주기도 한다. 반대로 여자 스포츠 시장에서는 스타들의 여성성이 남성성과 같은 상업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최근 여자판 미식축구, 란제리 풋볼리그나 여자 농구계의 ‘비키니바스켓볼리그(Bikini Basketball League)’의 출범 계획은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아이디어일 것이다.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타임스(2012. 9. 28)


미국의 여자 프로 농구는 지난 시즌 흥행에 완전 실패했다. 참패의 쓴 잔을 마시던 협회는 고육지책으로 지난 9월 비키니농구협회(Bikini Basketball Association)를 창설했다. 각 지역에 연고를 둔 8개 팀은 마이애미 스파이스, LA아이스, 시카고 디자이어, 미네소타 미스트, 애틀랜타 피치스, 뉴욕 녹아웃츠, 할리우드 하티즈, 올랜도 레이디캣츠 등이다.


BBA의 ‘비키니농구리그’는 여자 선수들의 노출을 통해 남성 팬들의 이목을 끌어보자는 전략적 마케팅이다. 선수들은 비키니 대신 비치발리볼 선수들과 유사한 복장을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벌써 미국의  농구팬들은 “경기 직후 선수들은 현장에서 유니폼을 서로 바꾸어 입나요?”라는 댓글을 올리며 몸매 노출 소식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BBA는 기존 남자 농구의 경영방식에 여자농구의 여성성을 강조한 위미니지먼트(womanagement) 리더십을 선보인 것이다. BBA는 방송 중계권과 유니폼 협찬 요청이 쇄도하자 희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여론의 향배에 촉각을 세웠다. BBA 수장 맥아더는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할 뿐 선수는 외모보다 농구 실력으로 뽑는다고 말한다. 말을 돌려 ‘성(性)의 상품화’라는 비난을 피해보고자 함이다. BBA의 실험이 농구 창안자 네이스미스의 복숭아 바구니 실험처럼 성공으로 끝날지, 실패로 끝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소식을 하늘나라의 귤릭(L. H. Gulick, 1865–1918)이 들었다면 냉소를 지을 것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귤릭은 농구 창안을 주도했던 미국의 스포츠 혁명가였다. 하와이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허약했다. 1885년 오벌린 대학생이었던 그는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에 의존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을 굳히고, 대학 학업을 포기한 채 체육지도자 강습소로 향했다. 6개월 과정을 마친 그는 다시 뉴욕 의학교로 진학하여 학업을 마쳤지만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기로 작정했던 그는 스프링필드 YMCA에서 체육 강사의 길을 갔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복음전파를 위해 수단으로 각종 스포츠를 도입하고, YMCA 강당에 청소년들을 끌어 들였다. 그리고 동계 실내 스포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제자 네이스미스에게 새로운 스포츠의 창안을 지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농구였다.


1891년 농구는 남자 청소년들을 위해 고안된 스포츠였으며, 하느님과 청소년들의 소통을 위한 미션이었던 셈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귤릭이 농구 창안을 주도하고, 각종 스포츠 보급 운동을 펼친 것은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을 갖춘 독실한 크리스천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뜻은 윗변은 영(spirit), 좌우 빗변은 신체(body)와 정신(mind)을 상징하는 YMCA 역삼각형 휘장에 잘 나타나 있다. BBL의 출범은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귤릭과 네이스미스에게 거의 모독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참고문헌
최현주(2010). 미국 YMCA 스포츠 運動史 연구. 경상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Dorgan, Ethel(1934). Luther Halsey Gulick, 1865~1918. New York : Columbia Univ. Press.
Gerber, Ellen W.(1971). Innovators and Institutions in Physical Education. Philadelphia : Lea & Febiger.
Morse, Richard C.(1918). My Life with Young Men. New York: Association Press.
Peuce, Owen E.(1944). The Hundred-Year Book: A Synoptic Review of Association History. New York: Association Press.
The Watchman 2 (Nov. 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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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흔히들 스포츠는 사회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스포츠에 그 스포츠가 수행되고 있는 사회의 가치들이 반영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스포츠가 교육활동과 접목되어 활용될 수 있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가정이 큰 몫을 하였다. 한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들이 생겨나고, 이 가치들은 그 사회에서 수행되고 있는 스포츠에 반영된다. 그리고 스포츠에 참여하는 사회구성원들은 스포츠 사회화과정을 통해 이러한 가치들을 습득함으로써, 이 가치들은 다시 그것이 발원한 사회로 돌아간다. 이렇게 사회의 가치와 스포츠의 가치는 서로 순환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스포츠는 사회의 거울이다’라는 테제에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회로부터 스포츠로 유입되고, 스포츠로부터 다시 사회로 복귀하는 가치는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권장해도 될 만큼 좋은 가치일까? 먼저 첫 번째 물음부터 살펴보자.

 

스포츠에 내재된 대표적인 가치로 언급되는 것들은 대개 경쟁, 팀워크, 자신감, 자기규율, 건강 같은 가치들이다. 그러나 스포츠참여를 통해 습득되는 가장 확실한 가치는 경쟁뿐이다. 팀워크나 자신감, 자기규율, 건강 같은 가치들은 습득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참가 경험을 통해 오히려 이기적으로 된 이도 있고, 자신감을 잃어버린 이도 있다. 또한 더욱 폭력적이 되거나 건강을 상실한 이도 드물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이 가치들은 스포츠의 구성적 요소라기보다는 우연적 요소일 뿐이다. 반면에 오직 승리에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스포츠의 특징을 고려할 때 경쟁이라는 가치는 스포츠의 구성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는 승패를 가리기 위해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도저히 식별 불가능한 근소한 기량 차이까지도 밝혀내는 장비까지 개발하였다. 이렇게 스포츠에서 승리에 대한 관심은 절대적이며, 이로부터 스포츠에 참가하는 자는 누구나 예외 없이 경쟁심이 강화된다.

 

 

이제 두 번째 물음에 대해 알아보자. 경쟁은 좋은 가치일까? 스포츠비판가들은 스포츠에 구성적인 가치인 경쟁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경쟁은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경쟁은 누군가를 패배시키고자하는 열망이며, 심한 경우 타인을 해치고자하는 충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 가치관이 확고하게 정립되어있지 않은 청소년기에 이러한 가치를 내면화하는 일은 피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에 근거하여 학교교육에서 경쟁을 부추기는 스포츠를 금지해야한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미국 학교체육에서 시작된 소위 뉴-스포츠운동이라는 것이 이와 같은 경쟁 가치의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정말로 스포츠의 경쟁이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스포츠의 경쟁은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던』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묘사했던 무자비한 경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스포츠상황을 꼼꼼히 살펴보면 경쟁과 함께 또 다른 가치가 경쟁스포츠에 붙박여 있으며, 이 가치는 경쟁이 특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지휘하고 통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철학자 드류 하이랜더는 『스포츠의 철학』에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길거리 농구장에 여러 아이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다. 다른 팀과 경기를 해서 이긴 팀은 계속해서 경기장을 사용할 수 있지만 진 팀은 물러나야 한다. 인종차별주의자인 한 아이는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 중 다섯 명을 추려 팀을 꾸려야한다. 그런데 백인 아이만으로 한 팀을 꾸릴 경우 계속해서 경기장을 차지할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흑인 중에 기량이 뛰어난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당신은 실력이 다소 부족한 백인 아이들만으로 팀을 꾸릴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기량이 뛰어난 흑인 아이들도 함께 섞어서 팀을 꾸릴 것인가?

 

위 물음에 대한 답변은 명백하다. 백인 아이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기량이 뛰어난 흑인 아이도 함께 섞어서 팀을 꾸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경기를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예는 스포츠가 경쟁심을 부추기는 활동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공정이라는 매우 긍정적인 가치가 깔려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스포츠의 경쟁을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에게 적극 권장할만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철학자 존 롤즈도 사회 정의의 원리로서 ‘공정한 경기의 이념’을 제안한 바 있다. 우리는 스포츠를 하면서 경쟁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갖게 된 경쟁심은 공정성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경쟁심이라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가치는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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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대한체육회

 

 

모든 생명은 진화한다. 진화의 멈춤은 사라짐이다. 문화도 진화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는 문화는 쇠퇴하거나 사라지게 마련이다. 현존하는 스포츠도 문화적 진화를 거쳐 생명력을 유지한 것들이다. 중세 서민사회의 폭력이 난무했던 몹 풋볼(mob football)은 문화적 진화를 거쳐 럭비풋볼과 사커(soccer)로 남았다. 영국의 라운더스(rounders)는 크리켓과 야구로 남았다. 배구도 끊임없는 문화적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 최근 배구경기의 진화 속도를 보면 놀라울 정도로 공격성이 강화되고 있으며, 약 177년 동안 변해온 배구의 진화 과정을 상징하는 용어는 밤베리노(Bomberino)이다.


창안 당시 배구경기의 모습은 단순한 공놀이에 불과했다. 스포츠라기보다는 레크리에이션에 가까웠다. 테니스 네트를 치고 6-9명의 선수들이 공을 튀겨 네트를 넘기기만 하면 되는 놀이였다. 손으로 하는 배드민턴 유형이었고, 그래서 명칭도 민토네트(mintonette)였다. 배구 창안자 모건이 1895년 YMCA 학술회의에서 시연회를 개최할 당시의 발표 내용을 압축, 재구성해보면 초창기 배구의 모습을 쉽게 그려볼 수 있다.

 

여러분! 저가 오늘 소개할 뉴 게임(new game), 민토네트는 체육관이나 강당에서 하기에 딱 좋은 것입니다. 물론 실외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시합에 뛰는 인원은 제한하지 않아도 됩니다. 민토네트 경기의 방식은 네트를 높게 쳐두고 공이 지면에 떨어지기 전에 손으로 쳐서 넘기만 하면 되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테니스와 옛 핸드볼(손으로 벽에 공치기 놀이)의 특성을 혼합한 것이며, 공이 지면에 떨어질 때까지 플레이는 계속됩니다. 게임은 9이닝으로 하되 실점을 했을 경우 ‘서비스 아웃’으로 부르게 됩니다. 

 

모건이 창안한 뉴 게임의 모습은 매우 심플했다. 라켓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인도의 민턴(minton) 게임과 유사해서 민토네트라는 명칭을 붙였으나 시연회를 참관한 스프링필대학의 할스태드(D. R. Halstead) 목사가 공이 지면에 닿기 전에 치는 것은 용어상 발리(volley)에 해당됨으로 ‘발리 볼(volley ball)’이란 명칭이 어떠냐며 명칭 변경을 제안했다. 그 이후 명칭은 ‘volley ball’이 되었다가 1952년 volleyball이란 복합명사로 바뀌었으나 초창기 배구는 공격성이 약한 매우 단순한 놀이였다.


창안 당시 배구와 현재 배구의 가장 큰 차이는 공격성이다. 차안 당시 배구 규칙에는 네트 4피트 가까이로 접근이 제한되어 있었다. 스파이크나 블로킹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공은 오래 동안 공중에 머물렀다. 랠리가 길었던 것이다. 그러나 배구는 종주국이 아닌 외국에서 진화했다. 미군(美軍)이나 YMCA를 통해 해외로 전파된 배구는 점차 공격적인 스포츠로 변했으며, 진화의 근원지는 필리핀과 공구 공산권 국가였다.


미국 배구는 상대편 진영으로 공을 넘길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자기편 진영에서 52번이나 공을 튀긴 경우도 있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그런 배구를 3번 만에 쳐 넘기도록 규칙을 바꾸었고, 그 규칙은 1922년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1916년이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테니스 스매싱을 모방하여 오늘날 스파이크와 같은 밤바(bomba: 폭격) 혹은 킬(kill: 격추)이라는 흥미로운 플레이를 펼쳤다. 그리고 공격자를 밤베리노(Bomberino)라고 불렀다. 그 때부터 배구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닌 공격성을 띤 스포츠로 발전했고, 공격성이 강해지자 1930년대부터 체코와 소련에서 블로킹 기술이 개발되었으며, 1938년 전미배구협회가 블로킹 규칙을 받아들였다. 배구는 레크리에이션 게임에서 한층 더 공격성이 강한 스포츠로 발전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배구는 더욱 공격적이 되었다. 후위의 어택라인 침범을 불허하는 규정이 있지만 백어택을 하고, 첫 공은 상대에게 공격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에 서비스라고 부르지만 스파이크 서비스까지 등장한 것이다. 오늘날 배구계는 밤베리노의 시대이며, 밤베리노는 배구가 공격성이 강한 스포츠로 진화한 과정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역사 용어이다.

 

 

 

 

참고문헌
최현주(2010). 미국 YMCA 스포츠 運動史 연구. 경상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Dearing, Joel B.(2007). The Untold Story of Willian G. Morgan Inventor of Volleyball. Livermore, CA : wingSpan press.
Laveaga, Robert E.(1942). VOLLEY BALL. New York : A.S. Barnes & Company.
Brown, Elwood S. M.(1917). “Volley Ball in the Philippine Islands,” 1917-18 Official  Volley Ball Rules. New York : American Sports Publishing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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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윌리엄 G. 모건

 

 

        야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최고 인기 스포츠가 되었다. 높은 인기 탓에 시즌이 끝난 겨울철에도 스포츠 신문의 머리기사는 인기 야구선수들의 운동화 끈 매는 이야기나 스프링캠프 이야기로 장식되고 있다. 언론이 스포츠의 균형적인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보여주기는커녕 판매부수 경쟁에만 열을 올리다보니 배구나 농구 기사를 보려면 시즌 중에도 신문의 뒤쪽 페이지를 뒤적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직접 스포츠 참여 인구는 야구보다 배구가 많지 않을까? 배구는 축구와 함께 우리 역사에서 서민과 중산층에게 소중했던 외래 스포츠문화였다. 특히 가난했던 시절의 배구는 네트와 공하나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생활체육 종목이었다. 배구 창안자 모건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모건은 어떻게 배구라는 경제적이고, 간결한 뉴 게임(new game)을 창안할 수 있었을까?

 

배구 창안자 모건(W. G. Morgan, 1870-1942)은 뉴욕의 록포트에서 조선업(造船業)에 종사하는 아버지와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강건한 크리스천(Muscular Christian)이었던 모건은 어린 시절 엔지니어가 되는 게 꿈이었으나 다른 길을 택했다. 누구나 한번 쯤 뇌까려봤을 혼잣말, “가지 않는 길을 가리라.” 모건은 이런 독백을 실천하는 삶의 길을 선택했다. 마운트 허몬(Mount Hermon) 재학시절 미식축구 경기를 계기로 농구 창안자 네이스미스의 눈에 띄었다. 그의 권유를 받은 모건은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스포츠 선교의 길을 택하고, 귤릭(L. H. Gulick)이라는 위대한 체육지도자가 머물었던 스프링필드 YMCA로 향했다. 그리고 교육을 받던 그는  농구 창안 실험자 네이스미스를 도우며 전문 체육 강사로서의 역량을 길러갔다.


1894년 모건의 첫 발령지는 메인주(州)의 오번 YMCA이었다. 거기서 1년을 보내고, 이듬해 여름 매사추세츠의 홀리요크 YMCA로 자리를 옮겨 남자 성인반 체육지도를 맡게 된 모건은 방대한 스포츠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복음전파을 위한 스포츠 선교활동에 몸을 던졌다. 바로 그 때였다. 회원 수가 급증하자 모건은 다양한 프로그램의 구안 필요성을 느꼈다. 성인들에게 농구를 시켜본즉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농구는 18명의 선수들이 원숭이처럼 뒤엉키는 럭비 같은 모습이었다. 모건은 새롭고, 덜 격렬한 오락적 게임의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모건은 기도를 하고 뉴 게임 창안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배구와 유사한 어떤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뜻이 있는 자에게 길이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고 믿었다. 경쟁적 형태의 레크리에이션 게임을 구상해보던 그는 농구, 야구, 테니스, 핸드볼(맨손으로 벽에 공을 치던 19C 게임) 등의 요소를 검토하다가 테니스의 라켓, 공, 네트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러나 라켓과 작은 공은 제외하고 네트만 취했다. 라켓으로 하는 경기는 좁은 곳에서 여러 명이 즐길 수 없을 것으로 봤다. 그는 테니스 코트보다 작은 직사각형 코트에 6피트 6인치 높이의 포스트를 세웠다. 그리고 손으로 공을 치는 핸드볼의 요소를 가미한 실험을 시작했다. 코트는 농구보다 좁아 많이 뛰어다닐 필요가 없었고, 네트로 인해 농구처럼 격렬한 신체적 접촉을 피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는 공이었다. 농구공을 사용해보니 크고 무거워서 손과 팔이 아팠고, 공의 속도 또한 너무 느렸다. 문제 해결을 위해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탄력 있고 부드러운 공의 제작을 의뢰하게 되었다.


뉴 게임의 실험을 끝낸 모건은 1895년 스프링필드 칼리지에서 개최된 YMCA 지도자 총회에 보고서를 내고 시연회를 가졌다. 많은 목사들과 체육지도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도 학교에 체육이 정규 교과목으로 자리 잡지 않았던 시대였다. 모건은 신앙심으로 인해 남들이 잘 가지 않던 체육 강사의 길을 택했고, 그 결과로 그의 이름은 배구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끊임없이 진화한 현대 배구의 모습에는 모건의 소박한 아이디어가 녹아 있다. “간단한 장비로 하는 게임(볼과 네트),” “여러 명이 즐기는 게임(팀 스포츠),” “농구보다 덜 격렬한 게임(신체적 접촉 배제),” “실내에서 가능한 게임(실내 스포츠)” 등…….

 

 

 

참고문헌
Arlott, John(1975). The Oxford Companion to SPORTS & GAMES. London : Oxford Univ. Press.
Dearing, Joel B.(2007). The Untold Story of Willian G. Morgan Inventor of Volleyball. Livermore, CA : Winsgpan press.
Emery, Curtis Ray(1953). Modern Volleyball, New York : Magmilan Company.
Morgan, William G.(1917). "How Volley Ball Was Originated." 1917-18 Official Volleyball Rules. New York : American Sports Publishing Co.
Sherrow, Victoria(2002). Volleyball. San Diego, California : Lucent Book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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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식견이 부족한 무인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나라를 망칠 수 있듯이 문약(文弱)한 지도자가 권력을 장악하여 국가를 망칠 수도 있다. 국운(國運)이 있는 민족은 하늘로부터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큰 지도자들을 하사받게 된다. 그들은 숭문사상(崇文思想)을 갖추었으되 천무사상(賤武思想)을 갖지는 않은 자들이며, 정신문화를 중시하였으나 신체문화를 천시하지는 않는 자들이었다. 서구 제국(諸國)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도, 신체 문화가 앞서 발달된 것도 이러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선진 제국(諸國)들은 일찍이 체육진흥운동을 펼쳐 국가발전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대한민국의 체육진흥운동도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국민의 역동성을 이끌어냈고, 건강을 증진시켰으며, 자긍심도 높였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게 마련이다. 스포츠의 정치화는 그림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도 체육과 스포츠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대학 입시 위주의 편향된 교육으로 인해 천시되고 있는 체육의 위상을 재정립해야 하고, 국가의 잠재적 역량 강화를 위해 체육진흥운동은 더 강화되어야 하며, 시대에 걸맞은 체육진흥운동의 방향도 명료하게 설정함으로써 국민의 체육에 대한 의식을 올바르게 일깨워가야 한다.

 

 


체육진흥정책에서 첫째로 강조되어야 할 방향은 스포츠를 통한 역동적 국민성 추구(The Pursuit of Dynamic Nationality through Sports)”이다. 역동적인 국민성은 역동적인 신체문화를 통해서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스포츠를 통한 건강과 행복의 추구(The Pursuit of Health and Happiness through Sports)”이다. 21세기 국민체육진흥운동은 국민 복지를 위한 사회운동이 되어야 하며, 국민의 건강과 행복 추구 운동이어야 한다. 스포츠는 국민에게 건강도 선물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포츠에 몰입하며 얻는 행복감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셋째는 스포츠를 통한 인격 함양과 도덕성 제고 추구(The Pursuit of Character Edification and moral improvements through Sports)”이다. 체육진흥운동은 국민의 인격함양과 도덕성을 제고하는 사회운동이 되어야한다. 근대 영국 스포츠교육 운동이 신사의 인격함양 운동이었듯이 우리의 체육진흥운동에도 도덕적 가치 개념을 불어넣어야 한다.

넷째는 스포츠를 통한 건전하고 합리적인 여가 문화의 창달 추구(The Pursuit of Healthy and Appropriate Leisure Culture through Sports)이다.” 국민이 즐기는 오락과 스포츠가 국민성을 결정한다. 건전한 여가 문화가 확산된 나라는 미래가 밝고, 퇴폐적인 놀이 문화가 확산된 나라의 미래는 어둡기 때문이다.

다섯째, 전통 신체 문화의 계승과 창달 추구(The Pursuit of the Continuance and Promotion of Traditional Physical Culture through Sports)이다.” 국가는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 비록 외래 스포츠가 국민스포츠로 되어 있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씨름과 같은 전통 문화의 확산을 지원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여섯째, 민간체육단체의 육성과 활성화 추구(The Pursuit for the Cultivation and Revitalization of Social Sports Societies)이다. 아직 체육진흥을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민간체육단체를 육성해야 한다. 정부와 민간단체가 연합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체육진흥을 꾀해야 한다.


제각기 같은 하루를 살아도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 하루의 의미는 달라진다. 아무리 고급 승용차로 달려도 운전자가 방향을 잘 못 잡으면 달린 거리는 의미가 없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체육진흥운동이 계속되어 왔지만 방향 설정 여부에 따라 그 가치와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

스포츠를 통한 ①역동적인 국민성 함양, ②건강증진과 행복의 추구, ③인격 함양 및 도덕성 제고, ④건전․합리적인 여가 문화 창달, ⑤전통 신체 문화의 계승과 창달, ⑥ 민간체육단체의 육성과 활성화 등 체육진흥운동의 방향을 뚜렷이 설정하고 홍보할 때 국민의 체육관(體育觀)도 더욱 뚜렷해지고, 구체화되며, 체육진흥운동도 더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Bett. J R.(1974). America′s  Sporting Heritage, 1850-1950. Reading, Massachusetts : Addison-Wesley,
Ellis, M J.(1973) Why People Play. Englewood Cliffs, N.J. : Prentice - Hall,
Huizinga. John.(1949)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Element in Culture. London : Temple Smith.
Lucas. John A, & Smith, Ronald A.(1978). Saga of AMERICAN SPORT. Philadelphia : Lea & Fobiger.
Rainwater, C E.(1992). The Play Movement in United States. Chicago.
Thomas. Carolyn E.(1983). Sport in Philosophic Contex. Philadelphia : Lea & Febi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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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철망으로 된 농구 경기장 

 

 

 겨울이 되면 한국의 스포츠 애호가들은 프로 농구를 접하게 된다. YMCA를 통해 도입된 한국 농구는 1997년 프로리그 시대를 맞았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의 빅포어(Big Four) 스포츠 중 하나로 정착된 농구의 발전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약 120년에 이르는 농구의 진화 과정이 뇌리를 스치면서 ‘케이저(cager)’란 명사가 떠오르게 된다. 케이저란 농구 선수를 뜻하는 속어로 진화가 덜 된 초창기 미국 농구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농구는 미국 YMCA의 우연한 실험 결과물이었다. 1891년 스프링필드 YMCA이었다. 영적인 삶은 신체와 정신의 균형적인 발달에 의존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YMCA 체육진흥운동을 펼쳤던 귤릭(L. H. Gulick)은 제자 네이스미스(J. Naismith)에게 긴 설명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 내용을 압축하자면 “겨울철에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실내 게임 하나를 창안해보라.”였다. 다루기 힘든 청소년들에게 흥미로운 놀이가 좋은 처방제가 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추운 12월이었다. 침대에서 새로운 게임의 창안을 위해 계속 그림을 그려보던 네이스미스는 축구공을 들고 강당으로 나갔다. 골(goal)이 될 만한 물품을 찾던 그는 관리원 스테빈스(Stebbins)에게 8인치짜리 사각형 나무 상자 두 개를 요구했다. 그러나 상자는 없었다. 스테빈스는 상자 대신 복숭아 바구니(basket) 찾아다주었다. 네이스미스는 발코니 난간 테에 밑바닥보다 위쪽이 더 넓은 바구니를 못으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18명의 학생들이 축구공을 바구니에 던져 넣는 게임을 창안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했다. 초기 경기 규칙은 13개 조항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9인제 게임을 탄생시켰다.


명칭이 바스켓 볼(basketball)이 된 것은 복숭아 바구니 때문이었다. 당시 교육을 받고 있던 머핸(Frank Mahan)은 네이스미스에게 새로운 게임의 명칭으로 ‘네이스미스 볼(Naismith Ball)'을 제안했으나 네이스미스는 게임의 본질을 흐린다면 거절했다. 그러자 머핸은 바구니와 공으로 이루어진 게임이니 ‘Basket Ball'로 하자고 다시 제의했고, ‘새 게임’의 이름은 Basket Ball이 되었다. 그리고 1921년 이후부터 단어 Basketball로 통일되었고, 동양에서는 대바구니 농(籠)과 공 구(球)를 합성한 농구(籠球)로 번역하게 되었다.


초창기 농구의 모습은 무질서한 놀이의 모습이었다. 패스가 허용되지 않았던 농구 시합은 선수들끼리 뒤엉키기 일쑤였다. 1890년대 중반까지 드로우인 공격 규칙이 없었다. 공이 경기장 밖으로 튕겨나가면 공을 먼저 잡는 팀이 임자였다. 선수들은 공을 잡기 위해 달려가 끝없이 뒤엉켰다. 관중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한 기자가 “하찮은 녀석들이 원숭이처럼 경기를 하고 있으니 우리(cage) 안에 넣어주어야겠다”라는 경멸적인 기사를 썼다. 이 말에 영감을 얻은 최초의 프로팀의 감독이 있었다. 트렌턴 의 감독 파드레츠(F. Padderatz)였다. 그는 선수와 관중이 뒤엉키는 문제 해결을 위해 경기장에 12피트 높이의 울타리를 치는 아이디어를 냈고, 그 이후 농구경기는 철망으로 된 우리 안에서 진행되었다. 당대의 심판 릴리(M. A. Riley)는 “그 우리(cage)가 경기 진행 속도를 높여 관중이 더 즐겁게 볼 수 있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그 때부터 농구 선수들은 철망 속에서 경기를 했고, 스포츠기자들은 농구선수를 ‘케이저(cager)’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철망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선수 부상이었다. 선수들이 철망에 부딪혀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결국 철사는 로프로 대체되었다가 관중석이 생겨나면서 로프도 사라지게 되었으며, 우리 안의 농구선수를 칭하던 케이저란 명칭만 역사에 남게 되었다.


케이지 바스켓볼 시대를 거친 농구는 야구보다 60년 뒤에 탄생했지만 문화적 진화 속도와 세계화 속도는 야구보다 더 빨랐다. 스미스대학의 브렌슨(S. Berenson)이 여학생들을 위해 패스를 도입한 이래 럭비경기를 방불케 했던 농구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6~9명이던 인원도 1900년대부터 5명으로 줄어들게 되면서 농구는 보다 심플한 경기로 변모했다. 1915년까지 YMCA와 미국체육회(AAU)의 농구 규칙이 달랐으나 그해 연합농구위원회(JBC)가 가동되면서 통일된 규칙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1932년 FIBA가 탄생한데 이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등장했다. 오늘날의 농구의 모습은 농구의 끊임없는 문화적 진화의 결과물이며, 케이저는 농구의 진화과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역사 용어이다.

 

 

참고문헌
최현주·하남길(2008). 농구의 기원과 문화적 진화. 한국체육사학회지,  13(2), 17-40.
Arlott, John(1975). The Oxford Companion to SPORTS & GAMES. London : Oxford Univ. Press.
Bjarkman, Peter C.(2000). The Biographical History of Basketball. Chicago: Masters Press.
Grabowski, John F.(2001). Basketball. (Sandiego California : Lucent Books Inc..
Hollander, Zander & Alex Sachare(1989). The Official NBA Baketball Encyclopedia. New York: Villard Books.
Naismith, James(1996). Basketball. Lincon and London : University of Nerbraska Press.
Peterson, Robert W.(1990). Cages to Jump Shots.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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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한국의 겨울은 농구와 배구 시즌이다. 농구와 배구는 대한민국의 4대 관중 스포츠, 이를테면 빅포어(Gig Four) 스포츠이다. 미국의 빅포어는 미식축구,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이다. 미국에서 축구나 배구는 찬밥이다. 유럽의 상황은 미국과 또 다르다. 영국이나 영연방국가에서는 전통적으로 크리켓, 럭비, 축구 등이 프로 스포츠 시장의 우량 상품들이었다. 거기서 프로 야구나 농구, 아이스하키는 스포츠팬들의 화제 속에 끼지도 못한다. 축구의 인기야 세계적으로 비슷한 추세지만 미국, 일본, 한국에서는 축구가 야구의 인기에 밀린다. 프로 야구, 농구, 배구 등이 빅포어 스포츠 지위를 확보한 나라 또한 드물다. 아시아에서 한국, 일본, 대만 등만 유사 현상을 보인다. 야구, 농구, 배구가 대한민국 빅포어 스포츠가 된 것은 미국과 일본의 영향 탓이다. YMCA 선교사들이 아시아지역에 이런 스포츠문화를 이식한 탓이다. 그 중에서도 농구와 배구는 혈통까지 꼭 같다. 창안 기관은 YMCA이었으며, 창안 토대 사상과 이론은 ‘강건한 기독교주의(Muscular Christianity: 이하 MC)’와 ‘놀이 이론(Play Theory)’이었다.

  

  미국 스포츠 혁명가 루터 귤릭


농구·배구라는 문화적 상품의 토양 사상이었던 MC란 19세기 영국의 목사이자 작가였던 찰스 킹슬리가 탄생시킨 조어였다. 킹슬리를 비롯한 영국 기독교사회주의 운동가들은 팀 스포츠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희생정신과 단체정신(team spirit)을 함양시키고자 했다. MC의 핵심 개념은 남성성(manliness)이었으며, 남성성의 핵심은 팀 스피리트(team spirit)였다. 영국의 교장들은 강건한 기독교주의의 양성을 외치며 학생들에게 크리켓, 조정, 럭비 등과 같은 팀 스포츠를 장려했다.

 

1863년 탄생한 축구(soccer)도 ‘강건한 기독교주의 운동(Muscular Christianity Movement: 이하 MCM)’의 결과물이었다. 영국의 MC사상이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로 확산되자 신앙부흥운동에 실패한 미국 복음주의 운동가들은 MC 사상을 수용하고, 청소년들에게 각종 스포츠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단체인 YMCA의 스포츠 수용은 일요일의 스포츠 참여를 금지했던 '잉글리시 선데이(English Sunday) 전통을 깨는 종교사의 큰 변혁이었다. 반대파 목사들은 오락거리들을 제공하는 것이 YMCA의 존재 이유냐며 반발했다. 찬성파들도 스포츠가 청소년을 크리스천으로 만들기는커녕 YMCA를 세속화시는 것이 아닐지 우려했다.

 

그러나 미국 스프링필드 YMCA에 MCM의 현란한 지휘자 한 명이 등장했다. 미국 스포츠 혁명가 귤릭(Luther H. Gulick, 1865–1918)이었다. 그는 각종 야외활동을 보급하고, 새로운 스포츠 창안 활동을 주도했다. 그의 좋은 참모들도 사상을 공유하고, 뜻을 함께 했다. 농구 창안자 네이스미스(J. Naismith), 배구 창안자 모건(W. G. Morgan) 등이 대표적인 참모들이었다. 귤릭을 비롯한 이들은 모두 복음주의 기독교운동의 사도(使徒)이자 MCM의 사도들이었으며, 농구와 배구는 이 그룹에 의해 탄생했다. MC사상이 농구와 배구 탄생의 토대 사상이었던 것이다.

 


귤릭이 MCM의 선봉에 농구와 배구 창안을 주도하게 된 것은 ‘놀이 이론’에 관한 그의 철학 때문이었다. 당대 유명한 심리학자 스탠리 홀의 친구였던 귤릭은 신체적 레크리에이션 활동이 심성의 계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그는 어린이를 위한 모래사장, 청소년을 위한 운동장이 장차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할 수 있는 훈련장으로 보고, 놀이의 특성을 지닌 스포츠 활동을 적극 장려하며, 청소년의 공동체 의식 강화나 자기 통제력 함양은 스포츠나 야외활동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그는 말로만 효용성을 외치는 이론가가 아니었다. 열정적인 실천가였다.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의 선봉장이 된 귤릭은 1903년부터 지역 명사들의 후원을 받아 ‘공립학교경기리그(PSAL : Public School Athletic League)’를 창설하는 등 근대 미국 스포츠 혁명을 주도했다. 이 모든 흐름은 놀이의 교육적 가치를 신봉한 귤릭의 체육 철학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농구와 배구는 창안 기관, 창안 배경이 된 사상과 이론이 같은 형제 스포츠이다.

 

 

참고문헌
Gulick, Luther(1898). “Psychological Aspects of Muscular Exercise”, Popular Science Monthly, LIII, (October).
Gulick, Luther(1899). “Psychological, Pedagogical and Religious Aspects of Group Games,” Pedagogical Seminary, VI, (March).
Gulick, L. H.(1899). “The Psychology of Play", Association Outlook, VIII, (February).
Ladd, Tony & James A. Mathisen(1999). Muscular Christianity: Evangelical Protestants and the Development of American Sport. Grand Rapids : Baker Books.
Reeve, Albert B.(1910). “The World's Greatest Athletic Organization,” Outing, LVII, (Octo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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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근대 이후 대두되기 시작한 서구의 합리주의가 인간의 삶을 전면적으로 지배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욕구의 직접적 충족을 추구하는 감성의 기능은 끊임없이 축소되어 왔다. 특히 18세기 이후 서구 사회에 만연된 고전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삶에서 감성적이고, 쾌락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게 된다. 산업이 고도화된 사회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최근 들어 본능적 욕구를 자유롭게 발산하려는 시도들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형식으로부터의 탈피,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본능적 욕구의 노력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열된 소비경향에서, 바뀌고 있는 결혼풍속도에서, 성의 상품화 경향에서, 여가 지향적 삶의 양식 속에서 이러한 경향이 목격되고 있다. 사회 자체가 금욕, 절제, 생산을 미덕으로 여기던 고전적 자본주의체제에서 쾌락, 소비, 레저를 즐기는 후기 자본주의체제로 현저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태를 반영하듯 잘 일하기 위해 노는 것이 아니라 잘 놀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우리는 지성지수보다 감성지수를, 고통스러운 것보다는 쾌락적인 것을, 싫은 것보다는 좋은 것을, 안전한 생활보다는 모험을, 욕구를 참기보다는 분출하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화사회학자 슐체(Schulze)는 이러한 경향,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을 체험사회(Erlebnisgesellschaft)라고 표현하였다.

 


체험사회에서는 육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한다. 육체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지각기관이자 감각기관으로서 모든 체험의 필수적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험사회에서는 스포츠, 성, 건강 등과 같이 육체를 구성적 조건으로 하는 분야가 매우 중요시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체험사회에서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는데 그 이유는 일상생활에서 육체와 육체활동이 점차 의미를 잃어 가면서 다양한 육체활동으로 이루어진 스포츠는 특별한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슐체의 지적처럼 현대사회에서 체험은 점차 높은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스포츠 역시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현대스포츠에서 체험, 즐거움, 놀이, 모험 등이 점차 강조되고 있는 경향은 이러한 사회 전반적인 경향의 한 단면이다. 스카이다이빙, 패러글라이딩, 번지점프, 리프팅, 스킨스쿠버, 카빙스키, 스노보드, 암벽등반, 마라톤 등은 추구하는 가치가 지금(now), 여기(here)에서의 특별한 체험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안전한 미래보다는 바로 이 순간을 체험하고 즐기자는 것이 이러한 스포츠의 최고 목적이다. 체내에 축적된 모든 글리코겐을 소진시킴으로써 전혀 생소한 몸의 상태를 체험하게끔 해주는 마라톤을 비롯해서 추락의 공포와 속도감을 동시에 맛볼 수 있도록 해주는 번지점프, 위험스런 장애를 극복하며 성취감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리프팅, 공중을 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패러글라딩, 바다 속의 새로운 환경을 접할 수 있는 스킨스쿠버, 모험심을 자극하는 암벽등반 등이 이러한 스포츠의 몇 가지 예이다.

 

사회학자 리트너(V. Rittner)는 이런 종류의 스포츠를 체험스포츠라고 명명했다. 체험스포츠는 전통적인 스포츠와 비교할 때 동기와 수행방식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전통적인 스포츠가 욕구의 지연된 만족이라는 금욕주의적 태도를 통해 특징 지워질 수 있다면, 체험스포츠는 욕구의 즉각적인 만족이라는 쾌락주의적 태도를 통해 특징 지워질 수 있다. 리트너는 모험을 목적으로 하는 스포츠와 한계 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스포츠, 재미와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스포츠를 체험스포츠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에 따르면 체험스포츠에는 체험사회의 근본 원리 세 가지가 내재되어 있다. 그 세 가지 원리란 첫째, 경쟁, 성취 등과 같은 전통적 스포츠규범의 퇴조, 둘째, 스포츠참여자가 갖는 개별적 동기의 전문화 및 자명화, 셋째, 자기 체험을 강화하려는 경향, 즉 오랜 시간이 걸리는 스포츠사회화 또는 조직사회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스포츠의 효과를 직접적으로 향유하려는 경향 등이다. 한 마디로 체험스포츠에서 관건은 재미있는 체험을 쉽고, 직접적으로 맛보는 것이다. 전통적인 스키를 대체하고 있는 카빙 스키나 점차 면적이 넓어지고 있는 테니스 라켓, 또는 번지점프, 패러글라이딩, 급류타기 등과 같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스포츠는 이러한 경향을 잘 대변해 준다. 사람들은 더 이상 힘들고, 지루하며,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하는 스포츠사회화과정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보자수준에서도 쉽게 성공감과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볼 때 체험스포츠는 욕구의 억압보다는 직접적 충족을 통해 특징 지워질 수 있는 것이다.

 

 

체험스포츠는 늘 “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색다름”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삶에 활력소로 작용할 수 있고, 입시위주의 생활에 빠져 있는 청소년들에게 일상의 지루함으로부터 탈피하여 긴장감을 맛보게 해 줄 수 있으며, 그들에게 다양한 모험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으로도 가치 있는 활동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점차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체험스포츠는 스포츠정책의 차원에서 더욱 권장되고 보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체험스포츠가 가진 역기능적 측면 역시 만만치 않다. 체험이란 철저하게 현재 지향적 개념이기 때문에 체험에 몰입할 경우에 극기, 인내, 근검, 절약 등과 같은 미래 지향적 삶의 태도가 희석될 가능성이 높다.

 

틸레(J. Thiele)는 체험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현재 지향적 삶의 태도는 두 가지 대가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물질적 대가와 정신적 대가가 그것이다. 물질적 대가란 체험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정신적 대가란 체험 후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정신적 공황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끊임없이 체험만을 추구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늘 색다르고 강력한 체험을 찾아 나서며, 체험공백기에는 참기 어려운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체험이 청소년의 교육과 기성세대의 삶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반성의 과정을 거쳐 체험 주체의 삶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삶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체험은 무의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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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현애(이화여자대학교 및 동대학원 강사)

 

           “그동안의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더 이상 스포츠는 신성하지 않습니다.” 런던 올림픽 펜싱 신아람 선수의 멈춰버린 1초에 대하여 이 경기를 중계하던 최승돈 아나운서의 한마디였다. 신아람 선수,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분노를 함축할 수 있는 의미있는 멘트일 것이다.

 

 

프로 스포츠의 승부조작 파문, 유명 운동선수 출신 교수의 학위논문 표절 판명과 뒤이은 대필 의혹, 런던 올림픽에서의 오판과 오심, 2012년 한해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다. 순수한 정신, 고귀함과 정의가 살아있는 스포츠 정신이 이제는 그 존재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 또한 이를 지켜본 이들에게 이러한 일들은 세상에 대한 또 하나의 불신과 부당함으로 비춰졌고 나아가 ‘스포츠마저 부패했는가!’ 하는 조심스런 의심을 살 수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다분히 충격적인 일들이지만, 어지러운 현재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찝찝함은 남으나 이내 잊을 수 있는 사건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사건들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승부조작 파문에 연루된 한 선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논문을 표절한 선수는 교수직을 내 놓음과 동시에 국민 스포츠 스타로서의 면모가 추락했다. 심판의 오심에 희생된 선수는 끝내 눈물을 흘렸고, 스포츠에 대한 불신 속에 자신의 오랜 꿈이 기약 없는 ‘다음’으로 유보되었다. 개인에게는 물론 스포츠에도 적지 않은 타격이다.

 

 

인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스포츠는 현 시대의 많은 특징들을 드러낸다. 의지와 투혼, 규칙안의 평등이 스포츠의 순수한 면을 이야기 하지만, 그 반대편 또한 스포츠에 스며들어 있으며 스포츠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세상에 다시 비춰진다. 가까운 예로 런던 올림픽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기기위해서 정정당당한 승부를 피했고, 규칙 테두리 안에서 교묘하게 반칙을 일삼고, 자신의 승리를 위해 반칙의 정도가 상대선수의 선수 생활도 위협할 무자비한 공격을 일삼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확인했다. 강팀과 만나지 않으려 형편없는 플레이를 펼친 여자 배드민턴이 그랬고, 마찬가지로 런던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와 경기한 노르웨이 핸드볼 팀의 잔인한 반칙, 이후 모든 반칙을 잊고 승리에 도취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스포츠 정신을 찾을 수는 없었다. 법의 틈새를 노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부패와 부정을 일삼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스포츠에서도 자행되고 있음을 목격했다.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일 수 있으나 현대사회는 지나치게 어지러워졌고, 교활해졌다. 스포츠 또한 교활하고 뻔뻔스러워졌다. 이러한 스포츠 세계에서 살아가는 선수들의 선택은 아마도 더욱 정직하거나 더욱 영악해지는 것 뿐 일 것이다. 부패를 의심하게 되고, 실수일지 모를 판정으로 인한 다른 사람 인생의 희생, 그리고 바등거려도 명쾌할 수 없는 무기력함까지... 그 안에서 앞으로 스포츠는 정직함과 영악함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교과서적인 발상이겠으나 선택은 하나다. 더욱 정직해지는 일이다. 더욱 순수해야 할 것이고 더욱 감동적인 스포츠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애써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스포츠가 숭고한 인간문화로 남는 길일 것이다.

 

배금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결과중심주의가 현대사회의 중심 사상이 되었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업과 경제로 흐르고 있으며 그것만이 목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스포츠가 정의롭고 순수해야한다고 이야기 하는 이유, 또는 승패나 성과가 아닌 감성적인 측면이 살아있고 스포츠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항변하는 이유는 스포츠는 보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아직 정의롭고 공정하며 그래서 순수하다고 믿을 수 있게 해주는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타락해서 악취가 나도록 부패했다고 생각되는 세상에 방부제와 같은 존재가 바로 스포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길, 그리고 희망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도 아니고, 직선거리는 더욱 아니다. 목적지로 가기위해 신호를 준수해야 하고, 다른 차량에 막히기도 하며, 우회하고, 때로는 되돌아가야 한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IOC 위원장을 역임한 로드 킬라닌(Lord Killanin)은 “올림픽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부분을 개선해가면서 그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일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부패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부패한 면이 있다면, 이를 정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이는 파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재건축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우기 위해서는 이전에 채워져야 하듯이 정화라는 것은 더럽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미 더러워졌다고 의심된다면, 이젠 정화를 위해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화란 갖은 악이 들어있던 판도라 상자 안의 마지막 남은 희망과 같은 것이다.

 

마니 풀리떼(mani pulite), 깨끗한 손을 일컫는 과거 이탈리아 정치계의 부정과 부패척결을 위한 운동이 이제 전 세계의 스포츠에도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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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국민 여러분! 나는 대통령으로서 체육과 스포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체육과 스포츠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은 명료한 진리입니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는 국민성에 달려 있고, 역동적인 국민성 함양에 체육과 스포츠 문화가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정부는 21세기 버전의 새로운 체육진흥운동을 전개하고 체육교육과 국민생활체육의 강화를 위해 역동적인 국민성 함양 운동을 펼쳐 갈 것입니다.

 

 

 

어느 대통령의 연설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꾸며진 글이다. 그러나 꾸며진 이 연설문 속에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다. 1831년 영국 민속학자 스트럿트는 “특정 국가의 국민성을 정확히 평가하려면 그 국민의 생활 속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스포츠와 오락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 그의 저서 서문 첫줄에 나오는 이 말에는 스포츠가 국민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국민성은 국가 장래를 결정하는 잠재적 요인이며, 서구 선진국들은 체육진흥과 스포츠 활성화 정책을 통해 국민의 역동성을 일깨워왔다.


19세기 독일의 체조운동, 튜른베베궁(Turnbewegung)은 게르만의 기질 강화를 위한 일종의 사회운동이었다. 영미 스포츠의 확산에 결정적 영향을 준 복음주의 기독교도들의 ‘강건한 기독교주의 운동(Muscular Christianity Movement)’은 ‘남성다운 기독교인(manliness Christian)’, 즉 청소년의 남성성(manliness) 강화 운동이었고, 남성성 강화를 위해 각종 팀 스포츠가 장려되었다. 서구의 국민 스포츠 교육 운동에는 적자생존이라는 사회진화론 인식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었으며, 영국인의 강인함, 투쟁적 근성, 단결심(team spirit)을 상징하는 럭비풋볼과 조정(rowing), 크리켓 등은 남성다운 스포츠의 대명사였다. 미국의 아이스하키나 농구, 미식축구 등은 미국문화국가주의(Americanism)와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스포츠로 발달되어왔다. 통합적으로 역동성의 상징이다.

 

체육과 스포츠 활동이 역동적인 국민성을 길러주는 중요한 교육이요, 문화라면 대통령도 체육과 스포츠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1906년 루즈벨트(T. Roosevelt)대통령의 모습은 미국 대통령의 폭넓은 체육 가치관을 보여주는 예이다. 초창기 대학 미식축구는 너무 거칠고 격렬했다. 경기 중 부상자는 물론 사망자까지 속출하자 미국 사회에 대학미식축구 존폐 논쟁이 격화되었다. 병약한 몸을 스포츠로써 연마해 가며 하버드 대학을 마쳤던 루즈벨트는 하버드․예일․프린스턴 등 대학총장을 초청한 ‘백악관축구회의’에서 “용기․인내․신체적 숙련을 위해 청년들에게 거친 스포츠도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루즈벨트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역동성을 길러줄 거친 스포츠도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지나친 숭문사상(崇文思想)의 팽배로 신체 문화를 천시하게 되면서 국민의 역동성은 약화되었다. 체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시점은 일제식민지 그림자가 드리운 이후였다. 1906년 최창열은 태극학보(太極學報)를 통해 세계의 문명화된 나라들은 교육에 체육을 도입하여 활발(活潑)한 기력(氣力)을 양육(養育)하였으나 우리는 100여년 이래로 교육의 큰 방침이 문예에 치우쳐 허약한 신체와 기력이 쇠진하여 국권상실의 위기상황에 놓였으니 우리 독립의 기초는 국민에게 체육을 권고함에 있다고 했다. 알긴 알아 다행이었으나 시점 상으로 도둑맞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대한민국에 역동성이 살아난 것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였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슬로건이 나왔고, 국민체조 보급, 체육주간 및 체육의 날 제정 등 다양한 체육진흥정책이 수립되고 추진되었으며, 이러한 체육진흥운동은 국민의 역동성을 일깨웠고, 그 역동성이 한국 근대화의 추진력이 되었다.

 

미래 세계도 역동적인 국민성을 갖춘 국가의 세계가 될 것이다. ‘체력은 국력’이란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체육진흥운동의 캐치프레이즈로서는 적절치 않다. 체력도 국력의 기반이지만 ‘역동적인 국민성이 국력의 더 큰 국력의 기반이며, 역동적인 국민성 함양을 위해 투지, 인내, 용기, 모험을 필요로 하는 거친 스포츠를 포함하는 다양한 국민생활체육 프로그램을 적극 장려하고, 체육진흥운동의 방향을 ”스포츠를 통한 역동적인 국민성 함양 추구(The Pursuit of Dynamic Nationality Cultivation through Sport)“로 잡아야 한다. 우리나라 대통령 후보들의 체육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 아마 대한민국 미래의 대통령이 루즈벨트처럼 뚜렷한 체육관(體育觀)을 지닌 인물이라면 대한민국의 역동성은 더 강화될 것이며, 우리 민족의 희망도 더 커질 것이다.

 

 

참고문헌
태극학보 1906. 12. 5
하남길(2007). 국민체육진흥운동의 방향 설정에 관한 시론. 한국체육학회지 46(1). 1-20.
李學來(1990). 韓國近代體育史硏究 서울 : 지식산업사. 39.
Lucas, John A. & Ronald A. Smith(1978). Saga Of American Sport, Philadelphia : Lea & Febiger.
Dunae, P. A.(1975). “British Juvenile Literature in Age of Empire : 1880~1914”, Ph. D. Thesis, Department of History, Victoria University of Manchester. 243.
Mechikoff, Rovert A. & Steven G. Estes.(2003), A History and Philosophy of Sport and Physical Education, New York : McGrow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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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5년만의 대통령 선거철이다. 후보 반열에 오른 인물들은 제각기 국정 운영능력과 도덕적 신뢰감을 돋보이게 할 묘안 찾기에 바쁘다. 후보 주변의 전문가 그룹은 보통 사람들의 표심을 자극하는 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낸다. 보통사람의 표가 더 많기 때문이다. 국민 또한 자신의 삶과 직결된 공약에 깊은 관심을 갖게 마련이며, 체육인이 체육정책 공약에 관심을 갖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부각된 체육정책이나 스포츠 복지정책 공약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후보군에 스포츠 애호가가 없는 탓일까? 참모진에 체육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자의 부재 탓일까?

 

선진국의 지도자들은 스포츠 애호가가 많았고, 일찍이 체육 진흥 정책과 스포츠 문화 창달 정책을 펼쳤다. 영국 국왕 헨리 8세와 제임스 1세는 탁월한 스포츠맨이었던 탓에 스포츠를 적극 권장했다. 특히 17세기의 국왕 제임스 1세는 《왕의 스포츠 교서》를 내리고, 국민의 건전한 스포츠 참여를 적극 권장했다. 왕실의 운동경기애호주의(athleticism) 전통은 19세기 ‘영국 스포츠 혁명’으로 이어졌고, 스포츠 교육을 통해 형성된 영국 젊은이들의 역동적인 기질은 대영제국 건설의 자양분이 되었다. 섬나라라며 늘 깔보았던 영국이 세계 최강이 된 배경에 스포츠가 있었다는 것을 간파한 프랑스 지도층은 영국 스포츠를 교육체계 속에 적극 수용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올림픽이 제창되고, FIFA가 탄생한 것도 역사적으로 같은 맥락이다. 20세기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들도 스포츠를 더욱 즐겼으며, 체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케네디대통령의 체육 가치관?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사냥과 승마 광이었다. 2대 애덤스는 세일링, 레슬링, 수영, 스케이팅 애호가였다. 제퍼슨(T. Jefferson)은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존 로크의 충고를 예로 들며 국민에게 체육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가장 뚜렷한 체육 가치관을 지닌 대통령은 케네디(J. F. Kennedy)였을 것이다. 그는 “연약한 미국인(Soft American)”이란 기고문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부처는 체육 진흥과 체력 증진이 미국의 기본적이고 일관된 정책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국가 건설에 있어서 정신적, 지적 자질에 건강과 신체적인 활력이 필수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진리라는 것은 어떤 다른 나라의 역사보다 미국의 역사가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역사에도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상징인 정조(正祖)와 같은 훌륭한 국왕이 있었으나 20세기 지식인들이 체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일제의 조선강점 직전이었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문일평은 체육은 국가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그러나 서양에서 이미 근대 올림픽이 개화했을 무렵 테니스를 접한 황제는 “저렇게 힘든 일을 손수하다니 참으로 딱하오, 하인에게나 시킬 일이지…’ 라며 혀를 찼다. 조선의 문약(文弱)한 전통이 계승되어졌던 대한민국이 1960년대부터나마 체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군부 정권이 탈정치화 수단으로 스포츠를 이용했다는 비난도 있다. 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체육과 스포츠의 진흥은 국가발전과 국민의 건강, 그리고 국민의 행복지수 제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며, 미래에도 체육과 스포츠의 순기능이 유지될 것이라는 점에서 대통령 후보도 체육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21세기 체육진흥정책과 스포츠 복지정책은 국민성 강화 운동이며, 국민 건강 증진 운동이자 국민의 행복 추구 운동이다. 대통령 후보는 우선적으로 국민의 고달픔이나 일자리 걱정을 해야겠지만 삶의 질과 직결된 국민의 건강과 행복 걱정도 해야 한다. 대통령 후보가 케네디 대통령처럼 체육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21세기형 체육진흥정책이나 스포츠 복지 정책을 공약으로 낸다면 많은 국민이 행복해할 것이다. 투표권을 가진 많은 국민이 스포츠맨이거나 스포츠 애호가들이고, 자신의 건강과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오동섭 외 2(2001). 체육세계사. 서울 : 형설출판사. 383.
이규태(1969). 개화백경. 서울 : 신태양사. 378-379.
태극학보 1906. 5. 12; 李學來(1990). 韓國近代體育史硏究. 서울 : 지식산업사. 39.
하남길(2007). 국민체육진흥운동의 방향 설정에 관한 시론. 한국체육학회지 46(1). 1-20. 
Adams, J.(1961). Diary and Autobiography of John Adams, L. H. Butterfield, (ed.) Vol. I.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1). 100.
Davis, Thomas R.(1970). "Sport and Exercise in the Lives of Selected Colonial Americans: Massachusetts and Virginia, 1700-1775," Unpublished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Maryland.
Sports Illustrated, 1962.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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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많은 학자들은 축구가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에게 그들의 본능 속에 내재한 공격본능과 사회생활을 통해 누적된 울분을 일소시켜주고, 그 결과 가슴속에 품었던 악의를 없애 주며, 결국에는 사람들이 매우 평온한 감정을 지닌 선한 존재로 돌아가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평온한 감정을 카타르시스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비극을 관람한 후에 갖게 되는 심리상태 또는 정서적 안정 상태를 카타르시스라고 불렀다. 과연 우리는 경기가 벌어지는 축구장이나 TV앞에 앉아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관람한 후에 도달한 안정적 심리상태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다른 사회 영역에서 공격욕구와 울분의 폭발 가능성이 많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축구는 분명 이런 카타르시스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축구를 관람하면서 평상시에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다. 목이 터져라 괴성을 지르고, 욕을 해대며, 온 몸을 들썩인다.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수도 있고 울분이나 공격본능이 해소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한 경험적 연구들은 이와는 다소 다른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한 마디로 축구의 카타르시스 기능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골드슈타인과 암스에 따르면 직접 경기를 뛴 선수들은 경기 후에 공격성이 많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경기를 관람한 사람들은 오히려 공격성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축구경기를 관람하기 전과 후에 공격성관련 설문지를 작성하도록 요청하였다. 설문지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기를 관람한 후에 더 공격적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응원팀이 승리했건 패배했건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축구의 카타르시스 기능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광적인 축구팬들의 행패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현상이다. 영국의 훌리건이나 독일의 슐라하텐부믈러는 경기 중에 또는 경기종료 후에 매우 빈번하게 폭력사태를 일으킨다. 남미의 국가들에서도 축구경기는 곧 잘 관중들을 폭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 급기야는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제9회 멕시코월드컵(1970년) 지역예선전에서 격돌하였다. 양 쪽 관중간의 싸움으로 수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양국은 일주일 동안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온두라스는 그 나라에서 일하고 있던 10만 명 이상의 엘살바도르인들을 추방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엘살바도르 군대가 온두라스를 침공했다. 양국 간의 전쟁은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고 4천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불상사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1964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페루와 아르헨티나 팀이 격돌했다. 경기 종료 직전 주심이 골을 무효로 선언하자 페루의 관중들은 격분했고 곧 바로 오렌지, 맥주깡통, 각종 잡동사니들이 경기장으로 날아들었다. 소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경찰이 쏜 가스총에 놀란 관중들이 출입구로 몰렸고 소란의 와중에 3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관중들의 폭동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 아니라 심판판정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이렇듯 축구는 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공격욕구를 부추기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카타르시스 이론을 더 이상 신뢰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축구 시합이 울분의 치료 작용과 울분의 증폭 작용을 거의 똑같은 비율로 가져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축구의 의미를 조금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때 카타르시스 이론은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앞서 소개한 골드슈타인과 암스의 연구는 축구를 단순히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만으로 제한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축구경기가 종료된 후 밤늦도록 가두행진을 벌이거나 호프집에 둘러앉아 경기결과를 놓고 열변을 토하는 뒤풀이행사까지 축구의 범주에 포함시켰다면 연구결과는 분명 다르게 나왔을 것이다.

 

188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영국의 대학들은 규율과 자기통제를 강조했다. 주로 중산층 출신이었던 대학생들은 중고생처럼 취급받았다. 엄한 규율이 지배하는 대학생활에 대한 보상으로서 대학당국은 학생들에게 주말을 이용해 축구경기를 허락하였다. 우리나라의 연고전과 비슷한 이러한 행사를 통해 대학생들은 주중에 억압받아왔던 감정을 합법적이고도 해롭지 않은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대학의 일상을 지배했던 엄한 규율, 이 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축구경기가 열리는 주말을 전후해서 폭발적으로 해소하였던 것이다.

 

 

 

 

학생들은 축구경기가 열리기 전날부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억압된 감정을 달랬다. 이들은 경기가 열리는 일요일에 경기장에 모여 마음껏 소리 지르며 위스키를 마셨고, 경기가 끝나면 파티를 열었다. 이 기간은 일상과 비교할 때 정서적 타임-아웃, 즉 일상이라는 경기가 잠시 동안 정지되는 시간이었다. 이렇듯 당시의 축구경기는 그것이 동반하는 전야축제와 뒤풀이까지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현대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경기가 끝난 후에 흥분한 팬들이 일으키는 소요사태와 가두행진도 축구의 범주에 포함시켰다는 뜻이다. 이렇게 축구를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면 카타르시스 이론은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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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스포츠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을 꼽으라면 단연코 축구가 첫째일 것이다. 축구의 인기는 FIFA월드컵경기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월드컵경기는 오직 축구 한 종목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 인기는 모든 스포츠를 총 망라하고 있는 올림픽경기를 능가한다. 월드컵경기와 같은 국가 대항전이 아니더라도 유럽,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 활성화되어 있는 프로축구리그 역시 그 인기 면에서 다른 프로스포츠종목들을 능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축구가 그토록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축구는 아주 단순하고 원시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우리가 지닌 원초적인 욕망을 가장 잘 채워주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바이러스에서부터 거대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삶은 싸움과 투쟁의 과정이다. 인간 역시 생물의 일종으로서 예외일 수 없다. 인류는 문명을 탄생시키기 이전부터 끊임없이 싸우면서 살아왔다. 생물의 싸움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격렬한 싸움이 같은 종간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왜 같은 종끼리 그렇게 격렬하게 싸울까? 동종간의 싸움은 동족 번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함께 있으면 싸우니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를 멀리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각 개체들은 그 종족이 살 수 있는 환경 전반으로 퍼지게 되며, 결국 식량 확보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다. 이외에도 동종간의 싸움은 번식에 있어서 강자에게 우선권이 돌아가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종족의 지속적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약자의 새끼보다는 강자의 새끼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진화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격적 성향은 수백만 년이 흐르는 동안 본능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이 성향은 인간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억눌리고 억압되어야만 했다. 공격적 욕구의 자유로운 충족은 문명화된 생활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억압되어야만 하는 본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폐기되지 않는 본능은 인위적인 배출구를 통해서라도 발산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억압된 공격욕구의 배출방식은 전쟁과 같은 인간 살육방식에서 사냥을 통한 동물 살육방식으로, 동물의 직접 살육방식에서 사냥개를 통한 간접 살육방식으로, 그리고 실제적 살육방식에서 축구, 농구, 사격, 양궁 같은 상징적 살육방식으로 계속해서 진화해왔다.


초기 문명사회에서 공격욕구 분출기제는 매우 폭력적이고 반문명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행위들은 한편으로 환영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비난을 면하기 위하여 이러한 행위들은 더욱 문명화되어질 필요가 있었다. 공격욕구 배출방식이 문명화되면서 이를 통해 얻어지는 쾌감의 강도가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근대 스포츠는 쾌락의 원천을 다양화하고, 쾌락의 시간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자구책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근대 스포츠의 특성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것이 여우사냥이다.


여우사냥은 사냥꾼이 단순히 여우를 잡아 죽이는 활동이 아니다. 여우사냥에서 살육의 주체는 사냥꾼에서 사냥개로 이전된다. 사냥 역시 인간 살육을 대치한다는 점에서 문명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문명화된 사회에서 동물의 직접 살육은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우 살육의 역할을 사냥개에게 양도한 사냥꾼은 쾌락의 원천을 추적과 관람 행위로 대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쾌락의 강도가 많이 약해졌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쾌락의 원천을 다양화하고, 긴장과 흥분의 순간을 연장시킬 필요가 있다. 여우사냥에서는 여우와 사냥개, 사냥개와 사냥개, 사냥꾼과 사냥꾼이 3중으로 경합을 벌이며, 여우추적을 고의적으로 어렵게 만듦으로써 클라이맥스가 지연되었다.

 

 

 

 

축구도 이 과정을 그대로 밟아가면서 발전해 왔다. 현대 축구의 전신인 민속경기는 무자비한 패싸움을 방불케 했다. 경기의 장소와 시간, 인원을 규정하는 최소한의 규칙마저도 없었던 이 경기에서 매번 부상자들이 속출하였다. 수십 명이 떼를 지어 몰려들어 서로 치고, 차며, 넘어뜨리는 과정에서 팔과 다리가 부러지는 것은 예사였으며, 그 와중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국가가 나서서 축구금지령를 내린 경우도 있다. 20세기 들어서 발로 상대방을 걷어차는 행위나 고의적으로 상대방을 잡는 행위 또는 발을 거는 행위가 금지되었으며, 오프사이드 규칙이 강화되었고, 경기 스타일도 공격중심에서 수비중심으로 바뀌었다. 경기의 폭력적이고 역동적인 요소들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백 패스한 공을 골키퍼가 잡지 못하게 하거나, 공이 아웃되었을 때 예비로 준비한 공을 신속하게 투입하도록 규칙을 개정함으로써 경기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했지만 거친 경기에서 기교 경기로의 변화는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다른 스포츠종목들에 비해 여전히 거칠고 원시적인 요소를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골프, 승마, 육상과 같은 개인기 중심 경기나 배구, 테니스, 탁구 같은 네트 경기에서는 격렬한 신체접촉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이에 비해 축구에서는 몸싸움이 기본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태클이 허용되기도 한다. 물론 뒤에서 하는 태클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그렇다면 야구나 농구, 하키, 럭비 등은 어떤가? 이 종목들 역시 억압된 욕구의 해방기제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효과의 측면에서 축구에는 미치지 못한다. 야구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조준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나 정적 동작과 휴지부가 너무 많아서 사냥집단이 목표물을 전력으로 추격할 때 갖게 되는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지 못한다. 농구는 빠르고 유려한 동작을 많이 수반하고 목표물을 잡는 최후의 순간에 조준이라는 요소도 구비하고 있으나, 신체적 위험이 너무나 적고 슛의 순간을 ‘최후의 일격’이라고 말하기에는 희소성이 약하다. 하키의 경우 공이 지나치게 작기 때문에 관중이 눈으로 플레이를 신속하게 쫓아가지 못하는 점이 장애요소이다. 럭비는 격렬함이 충분하고 신체적 위험을 수반하는 점에서는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으나 섬세한 동작이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순식간에 목표물에 도달하는 클라이맥스에의 이행이라는 점에서는 역시 약점이 있다.

 

축구의 원시성은 발의 사용에서 극대화된다. 발은 문명화된 손에 비해 여전히 원시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인류학자 르르와-구랑은 인류문명의 기원을 손의 사용에서 찾았다. 손을 많이 사용하는 과정에서 뇌가 발달했고, 뇌가 발달하면서 언어능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손은 분명 인간의 신체 중 가장 문명화된 영역 가운데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발은 그 쓰임이 대체로 걷기와 서기라는 원시적인 기능으로 제한되어 있다. 물론 무용이나 무술에서 발은 걷기와 서기라는 자연적 기능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기도 하지만 손에 비해 여전히 그 쓰임이 매우 제한적이며, 그 상징적 의미 또한 매우 열등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상대를 발끝으로 가리키거나 발로 건드리는 행위 또는 차는 행위는 여러 문화권에서 매우 불미스런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축구는 아직 원시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발을 주로 사용하는 경기라는 점에서 탈문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축구 이외의 대표적인 구기 종목들에서는 모두 손의 사용이 허용되지만 축구에서만큼은 손의 사용이 철저하게 금지된다. 골키퍼를 제외하고 누구든 손이 공에 닿으면 그 고의성 여부에 따라 곧바로 반칙이 선언된다. 문명의 상징인 손을 묶어두고 원시성의 상징인 발의 사용을 극대화하는 축구는 어느 모로 보나 가장 원시적 속성을 지닌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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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가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얻어가고 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건강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건강은 체력, 젊음, 힘, 아름다움 등과 함께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포츠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사회구성원들은 스포츠를 체력, 젊음,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건강까지도 보장해주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 스포츠를 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일까? 이러한 믿음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건강관이다.


이 문장은 근대 유럽인들이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나리스(Juvernal, ca. 58-140 n. Chr.)의 시에서 따온 “mens sana in corpore sano”라는 구절을 직역한 것이다. 근대 유럽인은 mens(mind; 정신, 마음)라는 단어 대신에 anima(soul; 영혼)라는 말을 써서 anima sana in corpore sano라고도 표기했는데 두 문장의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후자의 문장에서 각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ASICS라는 스포츠 브랜드가 만들어진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포츠와 건강의 긍정적 인과관계를 믿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곧 잘 인용하며, 이 말이 얼마나 신뢰할만한 것인지 선전한다.


그렇다면 “mens sana in corpore sano”가 어떻게 ‘스포츠를 하면 건강해진다!’가 되었을까? 앞서 말했듯이 이 라틴어 문장을 직역하면 “건강한(sano) 신체(corpore)에 건강한(sana) 정신이(mens) 깃든다(in)!”가 된다. 이 말을 의역하면 육체가 건강하면 정신도 건강하다가 되고, 그 의미를 재해석하면 육체를 강건하게 만드는 것은 건강을 위한 필수적 전제가 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육체를 강건하게 만드는 데에는 스포츠가 단연 최고이기 때문에 이 라틴어 문구로부터 최종적으로 ‘스포츠를 하면 건강해진다!’라는 명제를 연역해 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스포츠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건강해질 수 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필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최근 스포츠 활동 중에 심근경색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는 사람의 수가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동을 생활화하고 있는 전문적 스포츠인의 평균연령도 일반인의 평균연령에 비해 6-7년 낮다. 또한 스포츠선수들 중에는 각종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의학 및 생리학적 연구자들도 격렬한 스포츠는 건강에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활성산소의 발생가능성을 높여주고,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기 보다는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건강에 마이너스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스포츠가 반드시 건강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mens sana in corpore sano”라고 말한 유베나리스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의 문장이 근대 유럽인들에 의해 지난 수백 년 동안 오역되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 문장은 유베나리스가 지은 356어구로 이루어진 시의 10번째 구절에서 인용된 것이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Nil ergo optabunt homines? si consilium via,
permittes ipsis expendere numinibus quid
conveniat nobis rebusque sit utile nostris.
ut tamen et poscas aliquid voveasquid voveasque
… orandum est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
portem posce animum nortis terrorecarentem,

 

 

상당히 난해하며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앞의 내용을 제외하고 우리 논의와 관련이 있는 뒤의 내용 만 검토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건강관과 유베나리스의 본뜻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유베나리스가 지은 시의 원문을 보면 “…orandum est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라고 되어있는데 반해서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mens sana in corpore sano”라고만 되어 있다. 접속사 “그리고 나서(orandum est)”를 제외하고 "ut sit"가 빠져 있다. 라틴어 "ut sit"은 소망, 바람, 희망 등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소망과 바람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현실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현실에 없는 것이 거기에 속하는 경우가 더 많다.

 

 

유베나리스는 단순한 육체적 건강이 정신적 건강, 나아가 건강 전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단정하지 않고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게 하소서”라고 말함으로써 소망과 바람을 나타냈던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신체적 건강이 정신적 건강, 나아가 건강 그 자체를 보장한다는 생각은 유베나리스의 싯구를 잘못 인용한데서 생겨난 오해일 뿐이다. 그의 싯구를 성급하게 인용한 결과 건강을 이해하는 안목이 매우 좁아졌다.


스포츠와 건강의 관계가 합리적으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건강관이 바뀌어야 한다. 즉 기존의 일면적이고 편협한 건강관이 포괄적이고, 조화로운 건강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포괄적이고, 조화로운 건강관이란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이다. 우리는 이 문장에서 “ut sit"과 “mens sana in corpore sano”를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했던 유베나리스의 혜안을 읽어낼 수 있다.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은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에서 변증법적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건강은 육체적인 건사만으로 또는 정신적인 노력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건사와 심리 및 사회적 안녕, 감성적 욕구의 충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건강에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요인들 간의 조화이다. 유베나리스의 문장에 나타난 “ut sit"는 바로 이와 같은 조화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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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박현애(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유명한 이솝우화 중 하나로 토끼와 거북이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빠른 동물의 대명사인 토끼와 느림의 대명사인 거북이가 달리기 경기를 하게 되고 자신의 실력만을 믿고 있던 토끼가 경기 도중 잠이 들고 꾸준히 경기에 임한 거북이가 승리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토끼와 거북이 이솝우화는 자신을 과신한 사람과 꾸준히 일에 응한 사람의 결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주지만, 우리에게 그들의 달리기 경주를 통해서 알게 해주는 또 다른 다양한 이야기를 낳게 한다.

스포츠 상황에서 본다면,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 경기할 일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스포츠에서의 경쟁은 우선, 공식적인 경기의 경우, 기량이 비슷하거나 혹은 비공식 경기에서는 신체적 발달상태가 유사한 경우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초등학생과 프로선수가 농구 경기를 하는 일도 없고, 진지한 스포츠 상황에 놓여지는 일은 만무하다. 또한 세간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거북이는 토끼가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깨우고 같이 경쟁해야 한다는 스포츠 윤리적 측면도 있으나 이러한 두 가지 전제를 차치하고 스포츠 상황에서의 토끼 같은 선수와 거북이 같은 선수에 대하여 스포츠가 주는 사회 본질 중 두 가지 측면에서 조망해 보고자 한다.


김동규
(2001)는 스포츠의 본질을 사회문화적 측면, 유물론적, 미학적 측면으로 접근하였다. 사회문화적 측면은 스포츠의 놀이의 본질에서 시작되어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제도화 되어 간다는 접근을 의미하며, 스포츠는 사회화를 통하여 문화로 발전을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유물론적 측면은 노동을 위한 연습의 필요에 따라 스포츠가 생성되었다는 시각이다. 마지막으로 미학적 접근은 스포츠를 행하고 난 후의 결과보다는 행위의 과정에서 느끼는 경험을 중시한다. 미적체험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기도 하며 이는 주관적 체험으로서 체험의 유무와 정도가 개인에 따라 다르므로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스포츠에 대한 가치를 논해야 함을 뜻한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첫 번째 접근은 사회문화적, 유물론적 접근으로 거북이의 승리가 가져다주는 경쟁과 투쟁의 요소이다.

많은 학자들에게 스포츠는 인류의 역사와 같이 경쟁과 투쟁의 모습으로 정의되어 왔다. 따라서 스포츠의 특징을 이야기 할 때, 신체활동을 통하여 내포된 경쟁에 우선적 가치를 둔다. 스포츠에서의 투쟁과 경쟁은 스포츠에 수많은 감동적 요소들을 만들어내고, 이는 다른 선수들에 귀감이 되거나 혹은 이와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커다란 마음에 동요를 가져온다. 이는 스포츠 활동이 가지는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스포츠가 제도화 되어 문화로 발전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스포츠 활동에 수반되는 은근과 끈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거북이와 같은 느릿해도 꾸준한 의지에 박수를 보내며
기량이 뛰어나지만 더 이상의 노력을 게을리 하는 토끼로 부터 자만감이 주는 위험성을 알게 된다
.

두 번째 접근으로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미학적 측면에서 다른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 경기의
중요도를 떠나서 선수 개인의 경험에 집중하며
,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개개인 마다 다를 것 이고 이에 자유로운 접근을 통해 스포츠가 가지는 올바른 가치에 대한 의미가 재조명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로버트 짐러(1991)는 파라독스 이솝우화라는 책을 통해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다음은 로버트 짐러의 파라독스 이솝우화 중 토끼와 거북이에 대한 내용이다.

토끼를 이긴 거북이에게 다른 동물들이 이야기 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토끼가 너 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건
너만 빼놓고 다 아는 사실이야
”-한번 다른 상대를 이겼다고 도취되지 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고 할 수 있다
.-

단 한번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로 승자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번은 거북이가 이길 수 있지만 그 외에 벌어질 수많은 경기에서 거북이는 토끼를 이길 수 없다. 스포츠에서의 기록은 이솝우화와 같이 일회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북이가 한번 얻은 영예로 전설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거북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슈가 되는 중요한 대회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끈기를 보여주며 우승했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러나 토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중요한 대회에서 성과가 좋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평가된 실력이 있으면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포츠 경쟁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이에 도전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 모든 선수들은 올림픽의 금메달을 따기 위해 운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요 대회가 갖는 의미는 인간의 숭고한 도전 외에도 지대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선수들이 무엇을 위해 운동하며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감내하는지에 대한 개인의 경험적 측면에서 심오한 고찰의 수반이 요구된다.

, 그렇다면 토끼와 거북이 중 누가 진정한 승자일까. 끈기의 모습을 보인 거북이와 절대적 실력을 갖춘 토끼 중 진정한 승자를 정하는 데에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이미 대부분의 선수가 토끼와 같은 절대적 능력을 갖춘 강자가 되기 위해 거북이처럼 인내하며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경기의 실적만을 매스컴을 통해 인지하면서 우리가 간과해 온 훌륭하지만 불운한 선수가 있지는 않은지, 스포츠의 문화적 측면이 주요 경기나 주요 실적에 편향되어 스포츠의 경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지 재고해 봐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스포츠에서의 경쟁과 그 안의 숨겨진 다채로운 의미를 이야기할 때, 거북이형 노력과 토끼형 재능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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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김정효
(서울대학교 강사)

 

야구만큼 재미있는 스포츠가 따로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발끈할지 모른다. 그래도 한국의 프로야구는 재미있다. 오죽 했으면 야구 경기를 한 편의 드라마나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겠는가. 야구 경기에는 확실히 승리와 패배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복기의 묘미가 있다.
 
무사만루의 찬스에서 득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9회말 투아웃에서 승부를 뒤집을 수도 있다.
이것이 야구의 재미를 증폭시키는 주요한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승부의 향방과 감동은 야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스포츠는 재미와 감동의 DNA를 갖는다. 그런데 왜 유독 프로야구에만 구름관중이 몰리는 것일까.


2011년 프로야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다. 600백만을 넘어서더니 어느새 1,000만의 목표치를 내걸고 있다. 머지않아 허세가 아님을 입증할 날이 올 것 같다. 이런 호시절에 프로야구의 인기 비결을 묻는 일은 새삼스러울지 모른다. 혹자는 WBC의 준우승과 베이징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을 거론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IT의 수준만큼 프로야구의 플레이 자체가 향상되었고, 이것이 재미를 배가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미디어의 분석은 상투적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지적은 아니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같은 잣대를 축구에 적용하면 2002년 월드컵의 4강 신화와 현재 프로축구 경기장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우생순의 여자 핸드볼은 또 어떤가. 프로야구의 재미와 감동을 말하기 위해서는 여타의 스포츠 종목과 다른 프로야구만의 특별한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다름의 구조를 설명하지 못할 경우 스포츠의 일반적 특징을 동어반복으로 열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야구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재미와 감동의 원인이 드러난다. 기호학이란 사회현상을 기호로 간주하고 그 의미작용을 밝히는 학문이다. 가령 강남은 한강 이남을 뜻하는 행정단위이지만 그 단어의 의미는 일의적이지 않다. 어떤 이는 '부자 동네''부동산'을 떠올릴 것이고, 또 다른 이는 '룸싸롱'을 연상할지 모른다. 이처럼 강남이라는 기호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기표(記票,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e)의 자의성 때문이다. 프로야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야구장을 찾고 TV 중계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단순히 신체의 움직임이라는 기표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전하는 기의를 해석하고 공유한다. 프로야구의 문화기호학이 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프로야구의 재미는 무엇보다 경기의 진행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시즌이 시작될 즈음 미디어의 프로야구에 대한 홍보는 새로운 시즌의 개막혹은 대장정의 시작으로 표현된다. 이때 개막(開幕)이라는 기표 속에는 흥행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뿐 아니라 대서사시의 막이 오른다는 두근거림이 내포되어 있다. 대서사시란 무엇인가? 군웅들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모험과 대결의 파노라마가 아닌가.

프로야구의 시즌 전체가 서사시적 성격을 갖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시리즈의 우승이라는 목표를 두고 펼치는 각 팀의 대결이 전쟁의 웅장한 서사를 은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삼국지나 여타의 무협지와 다른 긴장을 환기시킨다. 무협지가 중원정복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일회적이고 완결된 구조로 보여주는 것임에 반해 프로야구의 이야기는 1년을 주기로 반복되어진다. 여기에 지난 시즌의 영광과 좌절, 도전의 희망과 복수에 대한 염원, 그리고 패권(覇權)의 기호들이 뒤얽히면서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장정의 기표가 프로야구만큼 어울리는 스포츠는 달리 없다.


1년 주기의 페넌트레이스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그것이 일상적인 삶의 주기와 겹친다는 점에 있다.
프로야구는 개화의 봄에 시작해서 늦은 가을 끝난다. 이 기간 동안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이 시합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거르지 않는 게임의 진행은 이벤트성이 강한 축구와 대비되는 야구만의 특성이다. 축구는 게임의 성격 상 매일 진행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게임 결과에 대한 희비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든다. 요컨대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과 다음 주를 기약하는 것에는 많은 긴장과 흥분의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페넌트레이스는 경기의 결과를 일상 속 깊숙이 개입시킨다. 그것은 전날 벌어진 시합의 내용과 결과에 대한 갑론을박에서 샐러리맨들의 아침 대화가 시작되는 살가운 풍경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즌의 진행과 일상의 깊은 관계는 승수의 축적이라는 또 다른 기호를 통해 드러난다. 페넌트레이스의 중요한 전략이 여기에 숨어 있다. 1위부터 꼴찌까지의 순위와 게임차는 응원하는 팀에 대한 희망의 게이지이며, 이 수치의 등락과 더불어 팬은 일희일비하고 어느새 대장정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승리의 축적과 순위의 상승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기호가 바로 가을야구이다. ‘가을이라는 기표는 수확의 기의와 함께 서사시의 결말 부분까지 살아남고 싶다는 바람과 우승에 대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염원의 메시지가 투사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야구는 게임이 갖는 판타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스포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갖는 게임으로서의 판타지성은 컴퓨터 게임의 그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인간의 몸을 매개로 한다는 것과 가상이 아닌 현실의 판타지라는 점이 2차원의 평면 공간에서 펼쳐지는 놀이로서의 게임과 다르다. 그리고 이 판타지는 전쟁이라는 기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프로야구에는 다른 스포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전쟁의 기표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가령 단타를 소총으로, 홈런을 대포로 비유하거나 투수에 따라붙는 폭격기잠수함등의 기표들은 모든 포지션을 전투의 진지로 만든다. 그래서 감독은 쉽게 야전사령관으로 분()하게 되며, 그가 펼치는 작전과 선수의 기용을 통해 게임 전체를 전장(戰場)으로 탈바꿈시킨다. 전쟁의 판타지는 팬들로 하여금 더불어 싸운다는 일체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관중의 동원이라는 기표 속에는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을 응원하는 민초의 함성이 교묘히 깔려 있게 되는 것이다. 응원의 함성은 승전보를 바라는 민초들의 고함에 다름 아니며, 프로야구는 이런 숨어 있는 전쟁의 알레고리를 통해 관중을 경기장으로 불러 모은다.

프로야구는 가상이 아닌 3차원의 공간에서 남성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의 상상력을 구현한다. 허구적이지 않은 판타지의 미학. 이것이 프로야구가 갖는 게임의 이중성이며 이 역설적인 미학 때문에 팬은 매 경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판타지에 대한 열광은 현실의 팍팍함과 일상의 고단함이 더할수록 날로 증가할 것이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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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승건(서울대학교 강사)


우리 옛 속담에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있다!’라는 말이 있다. 즉, ‘외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운데 속마음 또한 슬기롭고 똑똑하다!’라는 한자성어 ‘수외혜중(秀外惠中)’의 의역에서 나온 속담이다.

‘보기 좋은 떡’이 왜 ‘맛도 있는 것’일까? 음식의 경우, 맛과 영양은 음식의 제1조건이다. 그러나 여기에 음식의 부차적인 조건인 시각적 효과까지 좋다면 그 음식은 군침이 생기고 식욕을 자극하여 더 맛있게 느껴져서 그럴 것이다!

이렇듯 음식에서 외적 형식은 음식의 본질인 맛과 영양에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다시 말해 보기 좋은 외적 형식으로서의 시각적 효과가 대상의 본질적 내용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말이다.

예술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은 형식과 내용의 이중주라고 한다. 즉 내용을 담는 그릇이 형식이요, 그 그릇으로서 형식에 의미가 담겨지는 게 내용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의미 있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물에서의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디자인분야에서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형식주의 모토가 있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작품의 형식은 내용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바로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디자인의 결과로서 조형작품은 기능을 최우선으로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형식주의는 곧 기능주의와 연결되어, 장식이 없는 순수한 미적 형식만을 고집하는 병폐를 낳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있었던 ‘예술은 예술 이외의 일체의 것과 무관하다!’는 관점아래,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운동으로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명하여 예술의 형식과 내용면에서 순수주의를 주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형식과 내용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술의 기능주의도 그리고 순수주의도 너무 한쪽의 극단으로 치달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스포츠에 대해서도 형식과 관련된 이러한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스포츠를 관전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각적 형식에 집중한다. 즉 경기장을 찾은 관중이나 텔레비전의 중계를 지켜보는 관람자 모두 눈앞에 펼쳐지는 스포츠맨의 몸놀림에 눈을 빼앗긴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스윙에서, 그리고 피겨여왕 김연아의 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우리는 형식적으로 완벽한 폼(form)에 매료당해 감탄하며 찬사를 보낸다.



                        타이거 우즈의 정확한 티샷은 그의 멋진 폼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경기수행을 위한 스포츠맨의 멋진 폼은 폼에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즈의 멋진 티샷은 그것 자체로 훌륭한 형식으로서의 폼을 보여주지만, 그 폼은 공을 멀리 그리고 정확한 위치에 안착시키려는 기술의 시각적 제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김연아의 점프 또한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기본점수 9.5)’의 첫 점프를 ‘트리플 러츠(기본점수 10.0)’로 바꿔 기본점수를 높이고, 트리플 플립을 이후 단독 점프로 구사하기 위한 기술의 형식적 폼이기 때문이다.

 

                              김연아의 완벽에 가까운 점프기술은 아름다운 폼과 감정 어린 
                              표현을 가능케 한다.

 

결국 스포츠에 있어서도 폼과 기술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앙상블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폼 없는 기술은 공허하고, 기술 없는 폼은 맹목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포츠에 있어서 아름다운 폼은 더 높이, 더 빨리, 그리고 더 정확한 기술의 미적 표현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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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씀처럼 좋은 폼이 훌륭한 기량을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부상 예방과 꾸준한 경기력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글 / 이승건 (서울대학교 강사)


인간의 육체, 즉 인체(human body)에 관한 인류의 관심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진 일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πάντων χρημάτων μέτρον ἐστὶν ἄνθρωπος)’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그들 삶 속 여기저기 즉 학문, 종교, 예술 등 문화전반에 스며들게 했다. 이와 같은 인간 척도론은 조형예술분야와 신체문화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추구되어, 전자의 경우 이상적 인체의 표현으로 그리고 후자의 경우 올림픽이라는 인체의 제전으로 나타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체에 대한 관심은 유별났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미네르바 여신의 은총으로 사계절의 온화한 기후를 얻어 일상생활에서도 인체를 드러내는 일이 잦았고, 그럼으로써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gymnos)’을 자연스럽게 목격하게 되어, 인간의 벗은 몸에서 이상적인 인체를 발견하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아름다운 인체를 가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몸의 여기저기를 압박하여 아름다운 형체를 방해하는 옷을 피했다는 점과 각종 운동 경기의 심판관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인체를 보고 자라난, 그리고 그 인체를 아름답게 소묘했던 젊은이들의 눈에 거스르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좋지 못한 인상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 신체적으로 완벽한 사람을 선출했었다.



                               비트루비우스에 따른 체자리아노의 ‘정방형의 인간’, 1521년



고대 그리스의 인체에 대한 탐미는 1세기경 카이사르 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에 의해서 구현되었다. 그는 원과 사각형에 의한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으로써 ‘이상적 인체’(the ideal human body)를 도해하기에 이른다. 그에 따르면, 잘 다듬어진 인간은 두 다리를 벌리고 두 팔을 벌려 정사각형을 만들고, 그 사각형의 꼭짓점을 서로 교차시키면 배꼽에서 만나며, 그 배꼽을 중심으로 사각형의 한 꼭짓점을 반지름으로 하여 원을 돌리면, 사각형에 외접하는 원이 만들어진다고 믿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원과 사각형의 인체(aner tetragonos)’는 ‘호모 콰드라투스(homo quadratus)’, 즉 ‘정방형의 인간’이라고 불리며 이상적 인체 표현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르네상스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비트루비우스의 것에 수정, 보완을 가하면서 그의 장방형의 인간은 비트루비우스의 것보다 더 유명해져 인체미를 논하는 자리라면 항상 언급되는 인체미의 전거로 인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체육활동을 통해 인체를 단련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올림피아 제전은 경기가 열리는 바로 그 지역인 엘리스에서만 10개월 가량 연습기간을 가질 정도로 그리스에서 펼쳐지는 각종 운동경기는 모든 그리스 청소년에게는 인체를 단련시키는 강력한 자극원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체를 단련시킨 그리스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축제에 아름다운 인체로써 참가하며 기량을 뽐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올림픽을 관전했던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들에 의해 고스란히 작품으로 남겨져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고대 5종 경기 중 하나인 창던지기 선수를 이상적인 비례로 표현한 조각품



                                                창을 든 사나이의 8등신 비례 체계


올림픽 경기, 특히 고대 5종 경기(달리기, 넓이뛰기, 원반던지기, 레슬링, 창던지기, 활쏘기)와 관련이 있는 조각상 중에는 기원전 450년경에 폴리클레이토스에 의해 제작된 <창을 든 사나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조각의 미학자 빈켈만의 지적대로 ‘미의 최고의 법칙’으로 손상이 없다. 그가 직접 저술한 『카논』(비례규범)에 따르면, 완벽한 인체조각상은 전체 신체에 있어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 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가 비례적으로 조화로워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정지해 있지 않는 움직이는 신체의 장면을 묘사한 조각상임에도 매우 자연스러우며 게다가 머리를 기준으로 하여 전체 신체가 8등분으로 나뉘는, 소위 8등신으로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배꼽을 중심으로 하반신과 상반신은 황금비율(0.618 : 0.382)로 나뉠 뿐만 아니라, 힘을 주고 있는 한쪽 다리와 힘을 빼고 있는 다른 쪽 다리의 힘의 균형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머리는 그 움직임을 자유스럽게 뒷받침할 수 있도록 살짝 기울여져 있고, 다리 또한 엉덩이와 함께 축을 이루며 힘을 분산하고 있기에 옆에서 볼 때 신체의 실루엣은 S자 곡선을 그리는 등 매우 유연한 자세 이른 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렇듯 창을 던지는 운동선수를 모델로 하여 제작한 고전기의 대표적인 이 조각상은 벌거벗은 아름다운 인체, 즉 움직이는 신체를 묘사한 누드의 전형으로서 완벽한 수적 질서와 이상적인 인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 조각상은 이후 시대의 미술가들이 인체를 묘사함에 있어서 두고두고 참고하는 모범으로서 ‘누드의 카논’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럼으로써 운동선수의 신체단련을 통한 건강한 인간의 신체성의 전형 또한 이 조각상을 통해서 후대에 전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이상적 인체의 카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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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안용규 (한국체육대학교 스포츠건강복지학부 교수)

아레테(aretē)와 테크네(technē)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논의되어온 철학의 주요 관심사였다. 일반
적으로 아레테(aretē)는 덕, 탁월성으로 번역을 하고, 테크네(technē)는 기술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어 아레테와 테크네는 일반적으로 번역되는 의미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아레테와 테크네의 개념은 호메로스,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탁월성, 덕, 기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레테와 테크네는
각각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협력적인 관계에 있는 개념이다.



                                              콘텐츠출처 : 오픈애즈(http://www.openas.com)
                                             사전 허가 없이 콘텐츠의 무단 사용을 금지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으로 신체의 아레테를 ‘건강’, ‘미’, ‘강함’, ‘크기’, ‘운동 경기에서의 능력’의
5가지로 명시하였다. 이 5가지의 신체의 아레테는 자연적인 신체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아레테를
의미하며, 또한 이 신체의 아레테는 테크네의 도움 없이는 현실화되기 어렵다.

 
현대 스포츠에서 신체의 아레테와 테크네를 가장 잘 발현시키는 선수는 대한민국의 김연아와 박태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김연아는 점프와 턴 기술을 보완하여 아사다 마오보다 더욱 완벽한 기술을 구사
하게 되어 오늘날 세계최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박태환은 타고난 폐활량을 바탕으로 최첨단
수중촬영기술로 스타트의 문제점과 스트록을 완벽히 보완하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영광을
가져왔다.

 
또한 현대 스포츠는 최첨단 과학의 도움 없이는 기록단축을 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리스
토텔레스가 언급한 신체의 아레테, 즉 ‘건강’, ‘미’, ‘강함’, ‘크기’, ‘운동 경기에서의 능력’에 최첨단
테크네의 접목이 오늘날 스포츠에서의 경기력향상이나 기록단축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키점프에서의 유니폼, 사이클에서의 헬멧, 수영에서의 전신수영복, 육상에서의 운동화는 점점 진화
및 발전되어 가고 있다. 그 이유는 스포츠가 기록을 단축시켜 전 세계인을 열광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신체의 아레테와 테크네는 오늘날 스포츠에서 전 세계인이
열광하게 하는 근본 진리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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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량희 (전남대학교 강사)

 

Ⅰ. 노인문제
의료 기술의 발달과 산업화에 의한 핵가족화로 사회구조가 바뀌면서 오늘날 전통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노인문제들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노인들의 ①경제(經濟), ②건강(健康), ③무위(無爲)·
무료(無聊), ④사회적(社會的) 소외(疎外) 문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국가나 사회단체에서
노인 문제를 풀어가려 노력하지만 그 해결은 근본적으로 아직 미흡한 상태다. 노인에 대한 규정은
생물학적, 기능적 그리고 사회학적 관점에 따라 규정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노년기연령
(老年期年齡)에 관한 제도적 규정은 한 나라의 정년연령 및 연금개시연령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든 삶이 그렇듯 노인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성공적 노화(老化)는
나이가 들더라도 신체적 정신적 장애와 위험이 적으며 자신들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 상태에 대해 만족하는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요가(YOGA) 수행의 현대적 의미
인도의 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서 발췌된 ‘지고자의 노래’라는 뜻을 지닌 바가바드기타 2장
48절에는 ‘언제나 요가(하나됨) 안에서 살고 그리하여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성공과 실패를
하나로 보는 평등한 마음으로써 행동하라’고 기술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마음을 일러
 요가라 하며 흩어진 정신을 통일한 자로서의 슬기로운 요가 수행자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지혜에 의해 안정되고 신 또는 아트만과 하나 될 때 요가를 성취하였다’고 설명한다.
즉 요가는 기쁨과 슬픔, 이익과 손해,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 등에 대해 초연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인생은 이중성의 속성으로 된 세상에서 영향 받아 고통을
느끼지만 요가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요가의 구성
요가는 정신, 신체 정화법들과 금계(禁戒)와 권계(勸戒) 자세(아사나) 그리고 호흡조절
(프라나야마), 제감(프라티아하라), 집중(다라나), 명상(디아나), 삼매(사마디)의 요소로 되어있다.

1) 윤리적 규정
금계와 권계는 자신과 자신 이외의 관계를 규정한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인간적 규정이다.

2) 신체적 규정
아사나(자세)와 호흡조절은 육체에 관한 규정이다. 신체의 개선에 있어 호흡조절은 필수 요소다.
아사나를 수행함으로써 평형감각을 기르고 강하면서도 유연한 육체를 만든다. 또한 내분비선의
기능을 조정하고 근육과 신경계통이 조화를 이루게 하여 혈액 순환과 소화 기능을 개선한다.
결과적으로는 건강한 육체를 통해 마음이 평온해지는 목적을 지닌 신체에 대한 규정이다. 아사나는
움직임이 없는 명상 상태에서도 신체 기능을 유지시키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그 효과는 매우 강하다.

3) 심리적․영적 규정
프라나야마(호흡조절)와 프라티아하라(제감)를 통해 육체에서 마음으로 옮겨가는 통로를 조절하여
정신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간다.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감각기관의 제어인 제감의 단계를 통해
집중에 이를 수 있으며 집중을 지속시킴으로써 선정의 상태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삼매 즉
초월적 경지에 이르는 것이 요가의 마지막 목표로써 심리적 영적 규정을 내포한다.

4) 사회 문화적 규정
인도인들은 마누법전 이래 고대로부터 그들의 삶의 가치를 아르타(artha), 까마(kama), 달마(dharma),
목샤(moksa)에서 구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들의 삶을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먼저, 아르타(artha)란
물건이나 대상 또는 질료를 뜻한다. 이것은 세속적인 부와 번영, 이익, 소유의 성취라는 뜻이며
이 가치로서 세속적인 삶에 필요한 부(富)와 명예 또는 권력을 성취하고 인간과의 관계를 맺어
제반(諸般)의 현상들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둘째, 까마(kama)란 좁은 의미로는 성적 욕망, 쾌락을
뜻하지만, 넓게는 음악, 연극, 미술 등 예술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즐거움을 의미하여 정신적,
육체적인 즐거움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며 삶을 보람 있게 살도록 한다. 셋째, 달마(dharma)는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의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하는 일종의 법과 같은 것이다. 마지막, 목샤(moksa)는 해탈이며 더 이상 세간의
 제약에 구속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다. 그것은 쾌락 중의 쾌락이고, 행복 중의 행복이며,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중의 최고의 가치다. 처음 세 가지가 세속적인 의무를 완성하는 가치라면
목샤는 세속적인 가치를 초월한 영적이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이 가치들을 구현하기
위해 마누법전에는 삶을 네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그 4개의 단계가 학생기(學生期), 가주기(家住期),
임서기(林捿期), 그리고 유행기(遊行期)다.

첫째, 학생기(學生期)는 태어나 대략 스물다섯 살까지로서 달마를 배우고 익히는 시기다. 이때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기 위해 육체적 감정적 에너지를 보존, 전환해야하며 그에 따라 생명력이
강해져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조절력이 건강해지고 안정된다.

둘째, 가주기(家住期)는 대략 25세부터 50세까지이며 아르타와 까마를 동시에 추구하는 시기다.
결혼과 활동적인 삶을 통해 명예나 부를 이루며 가족과 인간관계에서 즐거움들을 맛본다. 그리고
자녀 양육, 가족 보호, 직업에 대한 충실성, 스승들, 신과 조상, 자연과 사람들에 대한 온갖 의무를
충실하게 해야 하는 시기다.
 

셋째, 임서기(林捿期)는 50세 이후 대략 75세까지라 할 수 있으며 숲으로 들어가거나 집에 머물더라도
혼자 지내며 세속적인 걱정, 욕망을 버리는 연습을 한다. 또한 경전을 공부하고 수련하여 마지막
단계를 위한 준비를 한다.

마지막, 유행기(遊行期)는 온전히 수행하는 단계다. 75세 이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오로지 영적
수련에 집중하며 달마를 실현하여 해탈에 이르는 시기다. 부부가 같이 지낼 수 있지만 가능한 한
가족과 떨어져 오직 신과의 만남과 영적인 성장을 위해 바친다. 이렇게 가족을 떠나 영적 수련에
집중하는 생활을 산야스라 하며, 이런 사람을 산야신(Sanyasin)이라고 한다. 오랜 인생을 겪은
그들은 지혜로 가득 차있으며 젊은이들은 그들로부터 지혜를 구하기도 하여 산야신들은 교육자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즉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서 존경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교육자로서의 산야신은
학교나 단체에 있는 교육자와는 다르며 영적 스승과 같은 개념이다. 이같이 심신을 수련하여 지혜에
이르는 삶은 고스란히 요가 수행과 연결되어 있다.


Ⅲ. 요가수행을 통한 노인문제의 극복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경제적 여유, 신체 건강과 마음의 평화, 외로움과 두려움의 극복과
더 나아가 생사를 초월하는 지혜와 함께 존재의 행복일 것이다. 이는 요가를 실천하여 얻을 수 있는
신체적, 심리적 건강과 요가 명상을 통해 얻는 요소들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요가의 효과는 첫째, 신체의 기능을 강화할 뿐 아니라 마음을 조절해 준다. 요가는 상대적 관계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하며 그로부터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하도록 돕는
실천철학이다. 따라서 요가 수행은 자기 육체의 문제를 인식 할 뿐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를 파악하게
한다. 주의사항으로는 요가 아사나를 수행하기 전에 노인의 신체적인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
타인과의 경쟁을 하거나 처음부터 자세의 완성에 집착하면 노인의 신체 특성상 오히려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요가를 응용하는 순서는 심장에서 먼 곳부터 몸을 풀고 본격적으로 아사나를 행한다.
정화법으로 알려진 요가 기법들을 행해 몸을 구석구석 정화하고 아사나를 통해 척추를 강화하며
뇌에 혈액 순환을 촉진시킨다. 이 모든 행법은 반드시 규칙적인 명상과 함께 행함으로써 내부에
잠재하는 타고난 생명력을 발현하게 하고 지혜를 쌓아간다. 하타요가프라디피카 1장64절에는
젊은이, 성인, 노인이나 병들고 허약한 이들 누구나 요가 수행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완전한
성취에 이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둘째, 요가 명상으로 뇌의 노화를 멈추고 집중력을 얻어 지혜의 길을 찾는다. 뇌는 인간의 몸에서
육체적인 삶을 넘어 정신적이고 영적인 활동을 하는데 직접 관여하는 기관이다. 나이가 들수록 뇌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복잡함과 갈등 요소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 뇌의 노화는
더욱 가속화한다. 하지만 고요한 명상 상태에 든 사람들의 뇌파를 측정하면 대뇌피질의 흥분이
진정되고 고피질이나 간뇌의 기능이 활발하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명상이 대뇌에 걸려 있는
과도한 부하를 없애고, 평온하고 유연한 의식 상태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셋째, 삶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내관의 힘을 길러준다. 육체적인 시각을 넘어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삶의 초점을 맞춤으로서 현실에서 부족한 것들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가 생긴다.
따라서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는 행복지수가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다.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다. 그러나 자연 법칙에 따라 그 누구도 늙음과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요가는 이런 마음의 모순을 영성의 개념으로 해결하고 있다. 순수하고 참된 나의
본질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어떤 것이다. 죽음은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생명 활동의
일시적인 멈춤으로, 순수 상태의 정신은 육체가 노화하는 동안 열매를 맺고 더 높은 차원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요가는 이러한 심오한 우주 의지에 부합하고자 고안된 자기 훈련법이다.
이와 같이 요가 수행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 상태의 질을 개선하여 성공적
노화(老化)에 이를 수 있게 함을 알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진정한 행복은 소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서 온다고 말한다. 예수, 석가모니 와
같은 '인류의 스승'들도 '존재의 삶의 방식'을 강조했었다. 그러한 삶은 나 이외의 대상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는 요가 수행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오랜 세월을 지내며 수행력을 지닌 노인에게서
젊은이들은 지혜를 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노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설 수 있는 가치관과 행법이 현실의 사회에 필요하며 그러한 환경 안에서 노인의 문제는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해결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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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수 2010.06.24 00:24 신고

    이렇게해서 노인문제가 해결된다면 진짜 다행일텐데. 나이가 있어서 요가하는게 좀 힘들수도 있을것 같아요. 그래도 그 전에 미리 단계별로 한다면 좋은 방법같네요!


                                                                                     글 / 송형석 (계명대학교 체육대학 교수)


알맹이가 중요할까 껍데기가 중요할까? 당연히 알맹이가 중요하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느냐고 핀잔듣기 십상인 물음이다. 껍데기는 단순히 알맹이에 부수하여 그것을 돋보이고
꾸며주는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기 때문에 알맹이가 껍데기보다 중요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중시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금의 소비 경향을 일컬어 “상징적 소비”라고 표현한다.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때문이 아니라
상징가치나 기호가치 때문에 상품을 구매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성능 때문이 아니라 외관과
디자인 때문에 자동차, 냉장고, 청소기 같은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옷의 경우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의복의 본질적 기능, 즉 사용가치는 보온과 보호, 가림 기능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요즘은 색상이나 디자인 또는 상표 때문에 의복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명품”의 구매 심리에 이러한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오늘날 껍데기를 중시하는 경향은 모든 사회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경제 영역을 넘어서
정치, 나아가 개인의 일상 영역에까지 파죽지세의 기세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2006년 서울시장
후보에 올랐던 오세훈과 강금실의 대결에서 오세훈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의 훤칠한 외모와 멋진 몸매가 유권자들에게 막연한 기대를 심어주었고, 주저 없이 그에게
한 표를 던지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비밀이다. 당시 대중매체는 이를 두고
“감성정치”의 시대가 열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미지, 상징, 외관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껍데기는 일상생활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배우자 선택에서부터 신입사원 선발, 나아가 사회적 성공에 이르기까지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는 능력 있어 보이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는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보다는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이, 즉 알맹이가
견실한 사람보다는 껍데기가 번지르르 한 사람이 선호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껍데기를 가꾸는 일은 일생생활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 2006년 말 개봉되어 수 개월간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했던
 “미녀는 괴로워”가 그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가수이다. 가수에게 있어 알맹이는 목소리와
가창력이다. 반면에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양은 목소리와 가창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일종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양자를 모두 겸비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꼭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어야만 가수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자, 심수봉 등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은 대개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타고한 미성과
풍부한 가창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미녀는 괴로워”에서 진짜 가수는 찬밥
신세고, 붕어처럼 입만 뻐끔대는 립싱크가수가 인기를 독차지 한다. 진짜는 적절한 껍데기를 갖추지
못했기에 푸대접을 면치 못했고, 가짜는 껍데기가 좋아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결국 껍데기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은 주인공은 껍데기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성형과 스포츠로 자신을 완전히
재포장하여 신상품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껍데기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스포츠의 역할도 바뀌기 마련이다.
스포츠는 다양한 몸짓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활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한 몸짓의
활동으로 그치지 않고 몸짓을 통해 내면적인 그 무엇을 고양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어 왔다.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협동심”, “인내심”, “극기의 정신” 등이 전통적으로 스포츠라는
일련이 몸짓을 통해 고양시키려고 했던 내면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스포츠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내면적인 것”에서 “외면적인 것”으로, 즉 알맹이에서 껍데기로 뚜렷하게 바뀌고 있다.
“날씬한 몸”, “근육질의 몸”, “에로틱한 몸”이 스포츠참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포장 제조기로서의 스포츠 역할은 비단 개인의 몸 가꾸기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지역 사회나
국가 같은 집단은 물론이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체재를
포장하여 결국에는 인정과 승인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재현 및 상징 기제의 역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은 단순한 월드컵 4강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은근히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4강의 의미로까지 확장되어 해석된다. 100m 세계기록갱신은 단순한 선수 개인의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체재가 추구하는 비가시적 인류 진보를 가시화시켜 주는
사건으로 재해석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스포츠는 개인과 집단, 나아가 전 인류에게 기존 자본주의
질서를 믿고,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는 환상적인 껍데기 역할을 담당해왔다.

탈주술화, 합리화, 세속화의 기치 아래 효율성과 효용성이 모든 가치의 척도 역할을 해왔던
근대화과정에서 이와 같이 신비주의화, 미학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근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이미 그러한 속성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이유는 그 상품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 현실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큰 맘 먹고 산 상품이 기대와는 다르게 전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의 구매는 일종의 모험일 수밖에 없다. 기대는 해석의
 방식이다. 그것은 가시적인 상품의 외관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판매자는
잠재적인 구매자에게 가능한 한 많은 기대를 제공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결국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할 필요가 있다. 구매자를 유혹하는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상품의 외관을
미학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 미학의 논리는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껍데기의 중요성이 역설되고 있다. 한편 껍데기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과대 포장이 등장하였고, 나아가 알맹이와는 상관없는 껍데기, 소위
“탈맥락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 껍데기 아닌 껍데기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껍데기는
더 이상 알맹이를 지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껍데기가 알맹이를 몰아내고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가사세계와 가시세계, 원본과 이미지, 진리와 허구, 진짜와 가짜의 전도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포이에르바하는 껍데기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경향과 관련하여 “확실히 기호화되는 물건보다
기호 자체가, 원본보다 복사본이, 현실보다 환상이, 본질보다 외관이 더욱 선호되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 오직 환상만이 신성한 것이고 진실은 세속적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진리가 감소되고
환상이 증가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신성성은 더욱 고양된다고 여겨지고 있고, 그 결과 최고도의
환상이 최고도의 신성성이 되고 있다.”고 썼다.

알맹이가 중시되었던 문화에서 스포츠철학자들은 스포츠가 인격 같은 알맹이를 가꾸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애써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제 껍데기가 중시되는 문화에서 우리는 스포츠가 껍데기를
만드는 데 탁월한 수단이라고 주장해야만 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 입장에서 이러한 경향을 싸잡아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이러한 현상을 적절한 언어로 설명함으로써 개인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역할에 만족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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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우리나라 체육교과서를 보면 각종 스포츠는 YMCA를 통해서 도입되었다는 기록을 자주 접하게
된다. "왜 스포츠의 역사에 기독교단체인 YMCA가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야구, 배구,
농구, 보디빌딩도, 라켓볼, 소프트볼 역사에도…. 이러한 역사는 미국 YMCA와 스포츠의 특별한
결속 관계를 암시한다.

YMCA가 스포츠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한 마디로 미국 YMCA 운동과 스포츠의 관계
때문이다. 미국 YMCA는 많은 스포츠를 창안했으며, 그러한 스포츠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로도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무엇 때문에 기독교단체인 YMCA가 그토록
스포츠와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일까?”하는 의문은 남게 된다.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설명은 간단하지 않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국 YMCA와 스포츠의 결속은 복음전략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미국 YMCA는 청소년들을
YMCA로 끌어들여 복음을 전파하고자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게 되었다. 미국 YMCA는 보디빌딩,
농구, 배구, 라켓볼 등을 창안했으며, 소프트볼을 재 조직화했다. 그리고 야구, 미식축구, 수영, 캠핑
등과 같은 스포츠클럽을 운영하였으며, 그러한 스포츠는 YMCA 운동(YMCA Movement)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의 스포츠 역사와 YMCA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보다 앞서 스포츠가 발달된 나라는 영국이었으며, YMCA가 탄생된 곳도 영국이었다. 영국의
윌리엄스(George Williams)는 런던의 거리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신앙심을 굳건히 하기위해
YMCA를 창립하였다. YMCA가 세계적인 단체로 성장하면서 YMCA운동의 프로그램이나 서비스
형태는 아주 다양했다. 여러 나라 및 공동체 조직에서 지역민들의 요구에 부합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그러나 초기 세계 YMCA본부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 YMCA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스포츠를 YMCA운동의 지렛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 YMCA가 ‘체육사업(physical work)’을 YMCA운동에 포함시킨 이래 19세기
말까지 미국 전역 YMCA에는 약 450여개의 체육관이 건립되었으며, 플레이그라운드운동, 산책 클럽
조직, 캠핑 운동, 체육지도자 양성, 야구․미식축구․수영보급 등과 같은 체육 사업이 펼쳐졌다. 보스턴
지회의 로버츠(R. J. Roberts)가 ‘보디빌딩’이라는 새로운 체력 증진 운동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나
미식축구광이었던 네이스미스(James B. Naismith) 목사가 스프링필드 YMCA에서 복숭아 바구니에
공을 던지는 실험을 거쳐 농구를 창안한 일, 매사추세츠의 홀리요크YMCA(Holyoke YMCA)의 모건이
민토네트라는 게임을 창안하여 배구(volleyball)로 발전시킨 일, 코네티컷(Conneticut) 주 그린위치YMCA(Greenwich YMCA)의 소벡(Joe Sobek)이 라켓볼을 창안 한 일, YMCA 행정 간사였던 호이싱턴(Homer Hoisington)이 ‘다이아몬드 볼(diamond ball)', ‘플레이그라운드 볼(playground ball)', 키텐볼
(kittenball: 말괄량이 야구), 쉬시볼(sissyball : 여자애들 야구) 등으로 불리던 놀이를 ‘소프트볼
(softball)'로 명칭을 통일하고 재 조직화 시킨 일 등은 모두가 미국 YMCA의 스포츠 사회 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일어났고, 미국 YMCA를 통해 창안되거나 활성화된 스포츠는 YMCA 조직망을 통해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야구, 농구, 배구가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
까닭도 이러한 역사와 직결되며, 스포츠 역사에 YMCA라는 단체가 많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째, 미국 YMCA와 스포츠의 결속은 강건한 기독교주의(Muscular Christianity)라는 접착제 때문이었다.
미국 복음주의 운동가들이 YMCA 체계 속에 스포츠를 수용하게 된 것은 영국의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계몽사조의 영향이었다. 찰스 킹즐리가 주창한 강건한 기독교주의란 신체적, 정신적 강인함의 추구를
뜻하는 것으로 핵심 사상은 단체정신(team spirit)과 남성다움(manliness)의 함양이었다. 미국은 신교
국가였고, 일요일의 스포츠 금지를 의미하는 잉글리시 선데이(English Sunday) 전통이 강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 YMCA는 19세기 영국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소위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이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스포츠 교육의 촉진제 역할을 했던 강건한 기독교주의 사상을 전격적으로 수용
하면서 스포츠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YMCA운동의 중심에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기까지는 많은 논란이 따랐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신체적 활동’보다 복음주의적 정신활동에 무게를 둔 YMCA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체활동
프로그램의 수용에 반대했다. 신교도적 신앙에 이끌려 YMCA에 몸담게 된 북미 YMCA 지도자들은
YMCA가 단순한 즐거움을 주기 위해 경쟁적인 스포츠를 장려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사조를 수용하고 각종 스포츠를 도입한 것은 매우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많은 하층계급 청소년들은 안식일에 놀이를 금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안식일 엄수주의에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으나 YMCA가 놀이․스포츠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확대시키자 교회와 YMCA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1900년을 전후로 강건한 기독교주의 사상을 신봉하게 된 YMCA는 미국 스포츠
운동(sports Movement)의 메카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YMCA는 정신(mind), 신체(body)에
 의해 지지되는 영(spirit)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YMCA 휘장을 고안했고, 스포츠 프로그램은 YMCA
운동의 주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연히 YMCA는 미국 스포츠의 요람이 되었으며, 세계
스포츠 역사 서적의 많은 지면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체육교과서에 등장하는 YMCA를
 보는 순간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용어가 떠오른다면 스포츠 역사를 깊이 이해하는 인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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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량희 (전남대학교 강사) 

신체 개념은 哲學史(철학사)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플라톤의 신체
개념은 정신과 물질로 나누어, 정신이 우월하므로 인간의 신체는 정신보다 열등하다고 파악
하였으며 서양의 형이상학적 철학의 발달과 함께 기독교 정신이 지배하던 중세에 이르기까지
몸을 천시하고 학대하는 풍조가 심해졌다. 그러한 형이상학적 관점이 중세를 거쳐 데카르트를
넘어오면서 정신과 신체는 더욱 이원화되고 몸에 대한 경시 풍조가 심해지는 가운데 근대 식민
정치와 산업 혁명이 만나 유래 없는 거대한 물질의 홍수를 경험하고 물질에 대한 집착이 커졌지만
상대적으로 물질의 가치 인식은 떨어져 갔다.

근대 서구에서는 풍부한 물질적 삶을 영위하면서 경험론이 등장하고 훗설의 현상학과 실존
주의가 결합한 실존적 현상학을 통해 인간의 신체를 기존과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즉
딜타이의 해석학, 니체의 철학 그리고 훗설의 현상학과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신체의 개념이 재정립되고 신체는 인식주체적 존재로 취급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심신일체
(心身一體)적 개념인 소매틱(Somatic) 개념의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현재에는 신체 개념을 더욱 영적이고 혼적인 주체의 입장에 서서 본질적 차원으로 접근하여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신체 개념의 정립은 지금까지 인식해온 신체 차원을 확장시키는
것이며, 그러한 확장된 개념을 통해 물질 가치에 집중되어 한정된 인식 안의 신체가 갖는 부정적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반성할 수 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유연하고 차원이 높은 신체 개념은 개인적
으로나 사회적으로 보다 폭 넓은 신체 교육의 바탕이 되어 미래를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모색해
나갈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다.

세계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우로보로스(Ouroboros) 신화는 生死, 주체와 객체, 질서와
혼돈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구분되는 개념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며 고대에는 몸에 대한
개념 또한 이와 같았을 것이다. 즉 몸은 인식의 객체인 동시에 주체이며 더 나아가 인식의 내용이
몸과 함께 하였다. 따라서 고대에 인식되었던 몸에 대한 개념은 우주와 연결되는 총화(總和)된
신체 개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B.C. 600~1200년으로 추정되는 고대 베다의 이해로부터 시작해서 B.C. 600년을 전후로 나타난
우파니샤드에 제시된 고대인도 철학의 몸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역사가 투쟁과 분열로 치달아
오면서 극단적 이분법의 개념으로 점철되며 정립되어 온 신체 개념을 극복하는 실마리를 제공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베다의 끝이라는 의미의 베단타 철학의 꽃으로서 우파니샤드는 후기
인도의 철학 사상에서 가장 영향력을 크게 끼쳤으며 아트만이라는 개별적 신성을 인정하는 범아
일여(梵我一如)사상을 내포하여 각각의 개체를 모두 절대적인 존재로 여긴다. 우파니샤드의 관심은
우주적 전 세계와 인간의 내면적 자아에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근저에
존재하는 아트만에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아트만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다. 따라서 이 사상을
우주적 현상과 인간의 관계로 표현한다면 자신의 실체가 곧 우주의 실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이뜨리아 우파니샤드 2장 2편에서 5편까지 나타난 인간의 몸 즉 신체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면
‘음식으로 이루어진 것(육신) 안에 숨으로 이루어진 아트만이 있으니 숨으로 이루어진 육신이
음식으로 이루어진 육신을 채우고 있도다. 또한 음식으로 이루어진 육신이 사람의 형상을 한 것처럼
이 숨으로 이루어진 육신도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사람의 형상을 한 마음으로
이루어진 아트만이 숨으로 이루어진 육신 안에 있으며 그 안에 지성으로 이루어진 육신과 더 안에
영혼의 속성인 환희로 이루어진 육신이 사람 형상을 하고 채우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따이뜨리야 우파니샤드는 다섯 가지 몸이 마치 양파껍질처럼 겹겹이 이루어져 있고
각각 그 몸들은 물질, 즉 양분으로 이루어진 몸(annamaya kosa)과 그 안에 숨으로 이루어진
몸(pranamaya  kosa), 그리고 그 안에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manomaya kosa), 더 안에 지성으로
이루어진 몸(vijnanamaya kosa),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에 희열 즉 영혼으로 이루어진 몸(annan
damaya kosa)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거친 에너지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세밀한 에너지로
이루어진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몸은 양분으로 이루어진 육체(肉體)만이 아니고 이 세계를
이루는 유일한 존재인 브라흐만 즉 아트만의 속성인 영혼의 성질인 희열 즉 환희가 우리 몸을
이루는 요소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렇게 고대의 본질적 신체 개념은 우주를 이루는 모든 섬세한 에너지가 집약된 신체다.


총체적인 신체(Whole-linked-body)

인간에게 있어 몸은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가장 직접적인 실체이며 몸에 이상이 왔을 때는
굳건하던 정신조차도 약해지는 것을 대부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몸은 막연히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한 중요성보다는 그 실체에 있어 훨씬 중요한 자리에
있음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몸이라는 것이 의외로 물질적인 요소보다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요소와 직접 관련되어 있음을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일어
났을 때 나타나는 신체 반응을 통해 대체로 경험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몸은 마음이나 정신적 상태와 직결된 것으로서 끓임 없이 변하고 달라진다. 그리고
우파니샤드에서 제시한 신체개념 또한 물질로 보였던 신체가 마음 뿐 아니라 호흡, 정신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신체는 단속적인 존재라기보다는 합리주의의 이성보다도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발달된 의학 기구들을 통해 몸 안에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들을
목격한다. 그리고 몸이 시간에 따라 질서 있게 작용하지만 가끔은 질서에 상관없이 작용하는 것을
목격한다. 생리학적으로 몸의 세포는 한 달 이전에 존재하던 세포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며
특수 기능을 하는 신경세포와 면역세포들은 스스로 겪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변해가기도 한다. 즉
어제의 몸이 오늘의 몸과 같지 않다.

그러나 각 개체가 사라질 때까지 그 특성을 나타내듯이 한 순간의 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고 있다. 타이트리야 우파니샤드를 비롯해 인도 철학 전반에 나타나는 신체는 각 신체들의 지엽적
특성 뿐 아니라 인간성 전체와 관련된 신체의 개념으로 그것들은 단편적으로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함께 공통으로 존재하며 삶 전체에 연결된 자양분을 섭취하고 살고 있다.

물질로 된 신체(안나마야코샤, Annamaya kosa)가 물질로 된 양분을 통해 성장하듯이 호흡으로 된
신체(프라나마야코샤, Pranamaya kosa)는 양질의 호흡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지각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신체(마노마야코샤, Manomaya kosa)는 지각하고 운동하며 마음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며 지성으로 이루어진 신체(비즈나마야코샤, Vijnanamaya kosa)는 지성적인 교류와 지성의
발전을 통해 그것이 존재하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주적 본질이며 신의 속성을 지닌
환희체(아난다마야코샤, Anandamaya kosa)도 자양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 속성 중에 종교적 성향이 있다. 루돌프 오토(Ludolf otto,  1869~1937)는 그의 저서 ‘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종교는 스스로 존재한다. 바로 우리 안에 경험 이전의 그 무엇으로!” 라고
하였으며 성스러움에 대해 후천적 경험이 구축해 놓은 구성물도 아니고, 경험 이전에 우리 안에
선험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특정한 속성일 따름이라고 피력한다.

인간의 역사가 이념이나 기본적인 욕구 충족에 대한 문제보다도 종교적인 문제에 의한 잔인한
투쟁이 그 크기로 보면 클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가진 환희체적 자양분이 보편성을 잃었을 때
인간의 영혼은 갈피를 잡을 길 없이 방황하며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
보아야 하며 이 시점에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신체의 평화를 위해 인간의 속성인 보편적인
영체(靈體)를 인정하는 알맞은 교육이 필요함을 느낀다.

따라서 인도 철학을 통해 나타난 신체의 개념들, 엄밀히 말하면 우주 전체의 에너지에 관련된
신체 개념을 통해 신체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신체를 새로운 용어로 명명해야
할 것이다. 즉 물질과 호흡과 마음을 통한 지각활동과 정신 그리고 영적인 모든 요소를 포함하는
총체적-신체(Whole-linked-body)로서 명명(命名)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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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평강 2010.03.12 00:50 신고

    우리가 알고 있는 soma의 개념보다도 더욱 포괄적인 '총체적인 신체(Whole-linked-body)'의 개념을 보고, 고대 인도인들의 통찰력에 경외를 표하게 됩니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존재론적 내용을 읽고 있노라니, 정말 감개무량 합니다 ^^ 감사합니다!!

  • 김창섭 2010.05.26 23:30 신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과학 교사이신데 체육칼람에 글을 올리셨군요.
    그래도 요가단체에 최고직인 회장으로 계시니 이러한 글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원래 베다나 우파니샤드나, 불교교,기독교나, 도교나 거의 큰종교들이 모시는
    그분들은 이러한 진리를 아셨던거지요.
    체육철학, 무도철학, 태권도철학, 한국철학 이러한 문제의 답은 하나로 결론이 나게 되 있지요
    즉 육체적인 나도 있지만
    영적인 나도 있다
    영적인 나에서도 몇겹이 더 있다고 요지입니다.
    성명쌍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 즉 우리의 본래근본자리 즉 신의 자리를 말하고, 명은 작용을 말합니다.
    이 둘이 함께 움직이지요.
    그런데 명을 닦지않으면 즉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신또한 편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명은 육체적 즉 개체적 자아를 말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본래 영원한 신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자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되며
    마음을 닦아 우리의 본래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무용이나, 태권도, 합기도, 태껸, 태극권 기타 모든 무술이 작용만을 말합니다.
    더한심한것은 역사를 말하지요.
    우리의 역사를 신으로 본다면 이해가겠지만, 우리나라니 너네 나라니
    우리것이니 너네 것이니 다투기만 합니다.
    아직도 그 의식수준이니 이해는 하지만
    이제
    체육들도 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명을 닦으면 어떻게 되는냐
    지혜가 생기고 생각에 걸림이 없으며, 적이 없으며, 상대가 나임을 압니다.
    그리고 다른 우주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왜 편하고 자유롭고 편화로와야 되느냐
    그렇게 되야먄 영적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참 논문이라는 것들을 보고 글들을 보면
    너무나 지식에 메여 있지않나 십습니다.
    지식은 그렇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지식이 많음으로 더 부자유하게 되지요
    왜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 뭔가의 결과를 얻어야 된다는데
    영적인 현상은 경험한 본인만 알수 있으니
    거기까지 가봐야 이해가 되는데 아무무 말을 해봐야 들어오지 않는 것이지요.
    철학 별거 아니지요.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너 자신을 알라 라고 말하는 건데
    모두가 내안에 있습니다.
    시선이 밖으로 향해서는ㅇ, 그리고 철학을 진리를 밖에서 구해서는 찾지를 못합니다.
    찰을려고 하는 그것, 주장하는 그것
    누가 주장하나요
    나 즉 개체적인 내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또 대화 하도록 하지요
    아이들이 부르네요

    아무튼 김량희 선생님 반가웠어요
    글 많이 올려주세요
    그리고 인연이 되면 또 뵙겠지요

  • 김창섭 2010.05.27 00:10 신고

    재우고 다시 왔네요.
    이제 이러한 논쟁이 아니고, 지식이 아니라
    내가 찾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을만큼 찾을려고하는 의지가 필요하지요.
    그럼 그 길이 가지못하느냐
    아니 다른 사람이 갔는데, 그리고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서 가지고 있는 그 본질이나
    내안에 있는 본질이나 똑갇아고 하는데 못갈것이 무엇이 있겠는가하는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교 도전해보자는 것이지요
    누군가 이 세상을 떠나기전 가져가는 것은 딱하나 마음하나 가져가는 것이다.
    어떤 마음을 말하는가
    나는 무엇도 할 수 있는 위대한 신의 마음을 가지면 더 좋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결국은 그 마음이 자기를 괴롭히는 그런 마음을 가질 것인가
    모 종교에서 말하는 왜 어린이 마음이 천국을 가겠는가
    어린이는 싸워도 금방 잊고 즐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 자체가 즐기는 자유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를 안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요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진리 깨달음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결국 자유를 얻습니다.
    자유로운 내마음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구해보세요
    두드리면 열립니다.
    유명석학이든 우리나라 최고의 철학박사 교수라치더라도
    그의 내면이나 글도 못배운 무식한 사람들이나
    내면의 자아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결국 평등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잘났다고 말할것도 없음을 아는 것이지요
    아는 사람들은
    꼭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만 위대하다고 하나? 요? ㅎㅎ
    아무튼
    지식은 자기의 고집입니다.
    자유를 얻은자는 자유를 내려놓습니다.
    자유를 붙잡고 있으면 구속되어서 부자유하거든요
    물이 고이면 썩듯이 말입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음이 없음을 압니다.
    깨달음을 찾아 인도 중국 티벳 아무리 가봐야
    어느 장소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닌
    내안을 살펴보면 나온다니까요... 제발 ㅎㅎㅎㅎ


                                                                                           글 / 김정효 (신도봉중학교 교사) 

김연아의 환상적인 ‘점프’에서 우리는 인간의 신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전율한다.
마지막 동작이 멈춘 후 클로즈업되는 그녀의 도발적인 표정은 마치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를
되묻는 듯 하지 않는가. 혹자는 시상식의 태극기를 바라보며 더불어 게양되는 대한민국의
위상에 가슴 뿌듯해 하기도 한다. 어느새 김연아는 꿈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온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전령사는 그녀뿐이 아니다. 박지성과 장미란, 태극기를
가슴에 달았던 베이징올림픽의 야구선수들도 모두 그녀에 버금가는 희망의 전령사들이었다.
이들을 흔히 우리는 ‘엘리트스포츠 선수’라 부른다. 그리고 미디어는 시청자들을 흥분시킨
그들의 공적을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들이 국민에게 안겨준 꿈과 희망의 질량을
계산하면 이러한 찬사는 수사학적 미사여구나 언론의 자극적 선동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길러낸 우리 사회의 스포츠인프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주저하거나
얼버무린다. 말하기는 한다. WBC의 준우승 이후 돔구장의 부재가 마치 우승을 놓친 결정적인
이유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는 했다. 왜 김연아의 우승에는 열광하면서 제2의 김연아를
만들어 낼 물적 토대와 정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걸까. 차라리 후진적 환경을 적당히
방치함으로써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승리의 시나리오를 즐기는데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혹자는 말한다. 우리나라의 스포츠정책이 너무 엘리트스포츠에
편중되어 있다고. 이제 체육정책의 방향은 엘리트스포츠라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 모두가 즐기는 생활체육, 혹은 사회체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그들의 따끔한 질책과 비판에는 충분히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엘리트스포츠가 생활
체육과는 전혀 다른 원리적 토대를 가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물론 국가에
의한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경우 엘리트스포츠는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스포츠문화로서 그 한계를 가진다.

박태환의 금메달이 잠시 국민을 흥분시키는 국가적 오락이거나 실체 없는 민족주의의 허상일
수 있다. 하지만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김연아와 박태환, 박지성 개인을 묻는 것이 아니다. 가령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양정모가 당시 체제 이데올로기의 선전에 커다란
몫을 한 것과는 별개로 그의 메달은 한국의 레슬링 문화의 중요한 성과이며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요컨대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유효기간을 갖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것이나 그 문화적 내용은 역사적이고 또한 현재적이다.

스포츠는 문화의 형태로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문화 외적인 것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만큼 파급력이 크다는 사실에서 비롯할 뿐이다. 자연인이 아닌 스포츠 선수로서의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을 위해 존재한다. 그녀의 신체능력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운동문화를 매개로
극한까지 펼쳐지며 이를 통해 피겨스케이팅은 보다 진일보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우사인
볼트의 개인적인 신체능력에 의해 100m의 기록이 갱신되듯이.

엘리트스포츠가 생활체육과 준별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엘리트스포츠가 이미 존재하는
운동문화, 즉 개별 스포츠 종목에 참여하는 개인의 뛰어난 신체능력을 통해 보다 발전된
운동문화로 전승되는 과정이라면, 생활체육은 한 개인의 신체능력이 특정 스포츠 종목을
행함으로써 보다 발전된 신체능력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마라톤이 생활체육에서는 심폐지구력과 체중감량 등의 개인적
신체능력의 향상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엘리트스포츠로 전환하면 마라톤 자체의 질적 변화
즉 새로운 기록 작성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스포츠와 생활체육은 각기 문화적
위상을 달리 한다. 엘리트스포츠가 해당 스포츠의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면 생활체육은
그 양적 변화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이런 까닭에 생활체육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엘리트
스포츠의 발전을 담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엘리트스포츠에서 필수적인 고도의 신체능력은
전문성과 체계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배드민턴 동호회의 양적 팽창과 ‘이용대’라는 걸출한
엘리트 선수의 배출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생활체육의 저 발전을 엘리트스포츠의 비대화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동시에
끌어 올리는 정책과 인식의 전환이다. 엘리트스포츠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생활체육의 질을
견인한다. 아니 견인하여야 한다. 은퇴 후의 김연아와 박태환이, 혹은 그들을 롤 모델로 삼았던
엘리트 선수 출신들이 어린이와 직장인을 대상으로 피겨스케이팅과 수영을 가르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엘리트스포츠는 생활체육의 적이 아니라 희망이 되어야 한다. 다만 그 피드백의 고리를
어떻게만들 것인가가 향후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엘리트스포츠에 더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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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

  • 나는나 2010.03.19 09:05 신고

    쉽고 간결한 내용 잘 읽었습니다
    엘리트제육이 생활체육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는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컨데, 박세리선수가 미국 LPGA에서 우승후 박세리키즈라 불리는 많은 어린선수들이 나타났고
    또한 국내에서 골프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지않나 생각됩니다

  • 그랫으면.. 2011.01.01 19:57 신고

    다같이 즐기는 체육이 하고싶어요.. 항상 몇명만 ....골라서...

        

                                                                                    글/윤여탁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 교수)

스포츠 경기문화에서 비윤리적 행위의 주체는 사람이다. 스포츠 경기문화라는 생활세계 내에서
심판, 선수, 지도자, 학부모, 관중 등에 의해서 비윤리적 상황들이 연출된다.
특히, 경기지도자는 비윤리적 행위의 중심에서 윤리적 딜레마를 겪게 되는 중심주체가 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인식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생활세계 내에서
무수히 많은 윤리적 판단의 기로 즉 윤리적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스포츠 경기지도자들은
승패의 키를 쥐고 있는 심판의 권력으로 인해. 윤리적 갈등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심판 판정의 공정성을 주제로 한 최근의 조사들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경기지도자들이 인식하는 심판 판정의 공정성의 문제는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 있고, 경기지도자들의 불만과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저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심판 권력으로 인한 경기지도자(태권도종목)의 윤리적 갈등은
5가지의 요소
로 귀결된다.

첫째, ‘심판 판정의 희생양’이 됨으로 윤리적 갈등을 겪는다.
심판 판정의 오심으로 희생양이 되는 선수의 땀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고 있으며, 그로인해 경기지도자의 길에 회의를 느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둘째,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인해 윤리적 갈등을 겪는다.
선수들이 시합에 나가서 ‘심판 판정의 희생양’이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경기지도자는
억울한 마음과 함께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선수가 오심을 당하게 됐다는 생각으로 갈등하며
선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심판 판정을 자신의 팀과 선수에게 유리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이런 경우 팀과 선수들에게 마음속으로
죄책감까지 느끼는 갈등을 겪게 된다고 하였다.

셋째, ‘판정에 대한 항의 그러나 허공을 치는 메아리, 되돌아오는 화살’의 상황을 갈등한다.
경기에서 오심을 당했을 때, 심판에 대한 항의가 무의미함을 경기지도자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아니 무의미함을 떠나 판정에 대한 항의는 역으로 버릇없는 지도자라고 낙인찍혀 되돌아오는
화살에 맞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넷째, ‘인사와 로비’의 윤리적 갈등을 겪는다.
심판의 주관적인 득점기준이 승패를 좌우하는 경기(태권도)에서 심판과의 관계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므로 심판과의 관계형성은 경기지도자의
또 다른 능력이 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경기지도자들은 심판에게 인사와 로비를 한
직․간접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팀이 인사와 로비를 안 하면 다른 팀에게
억울하게 질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때가 되면 인사와 로비를 해야 하는 갈등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는 수인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상황과 비슷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경기지도자, 학부모, 심판의 삼각관계 형성’의 윤리적 갈등을 겪는다.
스포츠 경기문화의 비윤리적인 문제는 학부모들에게 까지 영향을 주어 선수를 스카우트 할 때,
이제 학부모들이 먼저 경기지도자에게 심판들과 줄이 닿아 있는가? 라고 묻기도 한다고 했다.
이러한 학부모의 요구로 인해 경기지도자는 심판과의 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을 갈등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윤리(倫理, ethic)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이치(理致)” 또는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道理)”
곧 “삶의 길 또는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스포츠 경기문화 안에서 경기지도자와
심판, 선수,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이치와 도리가 지켜지지 않고,
윤리적 삶에 반하는 비윤리적 양태들이 발생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심판 권력으로 인한 경기지도자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3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심판의 윤리적 강령을 철저히 감시하고 실시해야 한다.
심판은 체육인 윤리강령의 ‘제10조 권한 남용과 금품 수수 등의 방지’에 명시되어 있듯이
자신이나 특정인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권리를 부당하게 이용하여서는 안 되며,
특히 업무 수행과 경기 심판 또는 각종 회의 활동 등에서 결정권자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일방을 편들거나 금품수수, 향응 및 각종 편의를 제공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며,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이다.

둘째, 새로운(객관적인) 심판제도의 실행이다.
의도되지 않은 오심이 경기의 일부라는 논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의도된 오심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객관적인 심판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태권도 종목의 경우 전자호구와 비디오 판독 등은 확대되고 계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제도인 것이다.

셋째, 경기지도자의 신분제도 변화이다.
현재 경기지도자의 임용과 해임은 단순히 성적을 통해 결정됨으로 현 제도 하에서는 경기지도자들이
심판권력의 지배를 받을 밖에 없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경기지도자들에게 안정적 신분을 보장하고 그들을 전문 스포츠교육자로 대우해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 심판 권력으로 인한 윤리적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국회에서 운동부 지도자의 처우에 관한 공청회 등 운동부 경기지도자의 처우에 관한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고 이슈화 되는 현상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며,
계속적으로 운동부 경기지도자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스포츠 윤리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및 양심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제도, 정책, 문화 등의 다양한 사회 윤리적 맥락을 통한 문제해결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스포츠 경기문화의 윤리성 회복을 위해 심판과 지도자가
모두 회복되고 상생할 수 있는 제도를 우리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스포츠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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