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오화석(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세상에 한 영혼이라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지금이야 이러한 생각에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인종차별의 역사는 가깝게는 20년 전, 구 유고 보스니아 내전 당시로만 거슬러올라가도 그 참혹함을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

 

필자가 미 연방하원의회에서 인턴을 하던 때였다. 미의회 의사당의 거대한 돔아래 중앙 지하공간은 마치 돌로 지은 지하성당(crypt)과 흡사한 석조아치 양식으로 되어 있다.  상원의회와 하원의회를 가로지르는 이 지하공간을 지나다 보면, 길 한편에 한 외국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의 이름은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라고 했다. Raoul Wallenberg 은 스웨덴 사람인데, 미국 정치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에 외국인의 흉상이 이채롭기만 하다. 그 흉상을 도드라지게 소개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장 톰 랜토스 의원의 부인이다. 해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8명을 선발하여 미국 연방하원의회와 인턴 교환교류가 있는데, 톰 랜토스 의원의 부인은 항상 한국 출신 인턴들을 대동하고 연방의회 건물을 설명해주는 가이드 역할을 아무 조건없이 맡아주고 있다. 그녀 역시 톰 랜토스 의원의 보좌관으로 연방하원의회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기도 했다.

 

라울 발렌베리를 추모하는 미국 발행우표, 사진출처: www.umich.edu

 

 

톰 랜토스 의원과 그의 부인은 모두 유태계 미국인이다. 이들은 모두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홀로코스트 박해시절, 톰 랜토스라는 청년은 한 스웨덴 외교관에 의해 목숨을 건져 미국까지 건너와 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의회 외교의 수장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이 된다. (미국의 대외관계는 의회의 몫이다. 다만 미국 헌법상 국무부에 의회의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여전히 조약비준권은 상원의 고유한 권한으로 남아있는 것이 의회 외교권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 스웨덴 외교관이 바로 Raoul Wallenberg 이다. 이미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유태인 구명 기업인인 오스카 쉰들러(Oscar Schindler) 말고도 인종청소라는 폭압앞에 헌신적인 구명활동을 한 외국인이 또 한명 있었다.

 

Raoul Wallenberg 는 사실 평생을 호의호식할 수 있는 스웨덴 최고 기업집단과 관련이 있다.  스웨덴 최고의 갑부가문인 Wallenberg 가문의 일원이기도 했다. Wallenberg 가문은 은행으로 시작해 현재도 스웨덴 GDP 의 40% 를 생산한다. 한때는 세계 3대 이동통신회사였던 Eriksson 과 자동차그룹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애초부터 가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의도하에서 유태인 구명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온 가문의 기풍에서 발현된 자연스러운 사명감이라고 설명한다고 해서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2012년 라울 발렌베리 탄생 100주년 기념 스웨덴 발행우표, 출처: www.kofiannanfoundation.org

 

 

스포츠계에서도 독일계 유태인이면서 홀로코스트의 직격탄을 맞은 여자 펜싱선수가 있었다. 그녀는 Helene Mayer 로 1930년대 당시 세계 최고의 여류검객이었고, 세계 선수권자 였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게 되면서 그녀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국으로서의 성적을 중시하던 나치정부는 유태인인 그녀를 다시 불러들여 독일국적으로 뛰게 했다. 당시 펜싱종목중 foil 에만 여자금메달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올림픽 무대에서 헝가리 선수에게 지고, 은메달 획득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헝가리는 1차 세계대전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공화국에 속해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올림픽 이후, 1936년 독일과 합병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독일이라고 볼 수 있다.)

 

시상대에 오른 Helene Mayer 가 국기가 올라가는 장면에서 오른팔을 펴서 어깨위로 치켜드는 특유의 나치식 경례를 하는 장면에서 시선이 멈춘다. 정말로 존경하는 마음에서 ‘Heil’ 을 외쳤는지 의심이 든다. 마치 슬픈 표정아래 올리브나무 묘목으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가린 고 손기정 옹의 사진이 오버랩 되는 듯 하다. 독일정부는 1972년 뮌헨에서 다시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1968년 Helene Mayer 를 기리는 우표를 발행했다. 자국민이었지만,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박해했고, 그래서 본국을 떠나야만 했던 선수에 대한 사과의 표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68년 헬렌 마이어 기념 독일 발행 우표, 출처: http://en.wikipedia.org

 

 

많은 사람들이 박해에서 살아 남아, 훌륭한 족적을 남기면서 그 과정에서 인류애를 잃지 않았던 사람들을 생생하게 증언해주었고, 스포츠분야에서도 이러한 인물열전을 통해 스포츠가 정치에 의해 오염되었던 시기에서도 스포츠맨십을 잃지 않은 진정한 영웅들이 있다. 전쟁, 1936년의 독일, 1992년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198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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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성수 (스포츠둥지 기자)

 

 

 

        스포츠는 많은 국가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세계인들은 스포츠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메이저 스포츠대회는 세계 평화와 화합에 기여하고 있다. 이렇게 긍정적인 부분만 있었으면 좋겠지만, 스포츠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다는 것에 착안해 과거 독재자들은 스포츠를 자신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독재정치가 많이 사라지면서 노골적으로 스포츠를 독재에 이용하려는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연이은 세계대전으로 어지러웠던 시절엔 스포츠가 악용된 경우가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스포츠가 독재에 악용된 사례들을 알아보자.

 

 

 

 

 

무솔리니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불리는 무솔리니와 히틀러. 그들은 각각 파시즘과, 나치즘을 주창하며, 유럽 현대사의 악당으로 남아 있는 인물들이다. 1922년 10월 30일 무솔리니 내각이 출범하며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는 유럽에서 축구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축구를 활용해 대중 조작 및, 노동자들의 정치적 관심 분산을 유도했다. 무솔리니 정권은 축구 경기를 할때 반드시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도록 의무화했고, 국제 경기에서 승리하면 체제의 승리인 것처럼 선전했다. 그리고 볼로냐에 커다란 축구경기장을 건설했는데 이는 축구 발전보다는 파시스트들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건설했다는 색채가 강했다. 1934년엔 월드컵까지 개최해 전 세계적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알릴 기회를 얻었고,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대표팀을 강하게 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뛰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선수들에게 거액을 주고 이탈리아 대표까지 뛰게 했는데, 이는 아르헨티나의 강한 반발을 불러 오기도 했다.

 

또 대회가 열리기 전에 무솔리니는 선수들에게 우승을 할 경우, 엄청난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엄벌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에 자극받은 선수들은 승리하기 위해 매 경기 거친 플레이를 펼쳤고, 스페인과의 4강전에선 7명의 스페인 선수와 4명의 이탈리아 선수가 부상으로 실려나가는 끝에 재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승에 올라온 이탈리아가 만난 상대는 체코. 하지만 체코는 순순히 이탈리아에 우승컵을 내주려 하지 않았고, 후반 초반 선제골을 넣으며 무솔리니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당황한 이탈리아는 동점골을 넣기 위해 노력했지만, 골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경기가 약 8분여 남았을때 이탈리아 관중들은 잔인하게도 ‘죽어라’ 라고 외쳤다. 하지만 결국 이탈리아의 동점골이 터졌고, 연장전에서 역전골까지 성공시키며 힘겹게 2-1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탈리아는 2회 월드컵에서 우승한 국가로 역사에 기록됐지만, 체제 홍보를 위해 억지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에선 비판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히틀러
  독일 나치당의 총수이자, 악의 탄생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악명 높은 독재자인 히틀러 역시 스포츠를 활용했다. 그에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에겐 故 손기정 선생이 일제 식민지 시대의 울분을 달래는 마라톤 금메달을 안겨준 대회라고 기억되고 있지만, 히틀러는 전 세계인이 바라보는 올림픽을 이용해 나치를 선전했다. 그는 베를린 서쪽에 나치가 좋아하는 신고전주의 양식에 11만명이 수용가능한 매머드급 경기장을 지어 나치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했고, 베를린 거리엔 오륜기와 나치의 깃발이 가득했다. 개막식에선 11만 관중석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나치식 경례로 히틀러를 맞이했고, 금메달을 딴 독일 선수들 역시 시상대에서 나치식 경례를 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올림픽 기간 동안 유색인종 차별 완화 정책을 펼치며, 이미지 개선에도 신경 썼다.

 

올림픽 후에도 히틀러의 스포츠를 활용한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출발점이 되는 폴란드 침공을 벌여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자 나치는 축구 경기를 벌이기로 한다. 폴란드내에서 독일 대표팀이 폴란드 대표팀을 완벽하게 이겨 독일의 우월성을 확실히 각인시키겠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폴란드는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대등한 경기를 펼칠 정도로 강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치는 폴란드 대표팀에게 “패배한다면 상을 주겠지만, 이길 경우 모두 총살시키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한다. 하지만 폴란드 대표팀 선수들은 무너진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결국 3-2로 승리한다. 협박대로 나치는 선수들을 그 자리에서 총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훗날 2차대전 에서 패망한 독일이 과거를 반성하고 독일 수상이 폴란드 대통령 앞에서 무릎을 꿇기도 했지만, 최악의 독재자라 불리는 히틀러도 체제 선전을 위해 스포츠를 악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부
  월드컵은 1978년 또 다시 독재자의 악용으로 얼룩졌다. 1978년 월드컵을 개최한 아르헨티나는 군사독재정부가 집권 중이었고, 당연히 이 독재 정권은 월드컵을 이용했다. 아르헨티나는 1940년대 풍부한 천연자원과 농업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국이었지만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안 페론과, 그의 아내 에바 페론이 시행한 정책은 아르헨티나가 위기에 빠지는데 단초를 제공했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에바 페론은 사생아로 태어나 가난하고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낸 탓인지,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취지는 좋았지만, 지나친 복지정책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무너져 갔고, 결국 아르헨티나는 쿠데타와 독재가 지속되었다. 1976년. 쿠데타로 비델라 장군이 정권을 잡을 당시 아르헨티나는 폭력, 고문이 자행되었고,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을 무마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스포츠 행사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아르헨티나의 불안정한 상황탓에 다른 곳에서 월드컵을 개최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1978년 월드컵은 예정대로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다. 이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온갖 비리와 음모론이 판을 쳤다. 아르헨티나와 헝가리의 첫 대결에선 아르헨티나의 거친 플레이를 심판이 눈감아주고 석연찮은 판정으로 헝가리선수 두명이 퇴장당하는 끝에 아르헨티나가 승리한 것이다. 게다가 두 번째 경기인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경기에서도 심판의 애매한 판정으로 아르헨티나가 페널티킥을 얻자 아르헨티나의 심판 매수설이 돌았다.

 

2차리그 에서도(당시 월드컵은 1차 조별예선을 치르고 2차 조별리그를 통해 결승진출국을 가렸다.) 의혹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페루에 4골차 이상으로 이겨야 결승에 진출할 상황이었고, 아르헨티나는 페루에 6-0 대승을 거두며 결승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당시 페루 선수들의 플레이는 무언가 엉성했고, 경기 직전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 라커룸을 방문한 점,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페루에 곡물 지원과 부채 탕감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아르헨티나에 의혹의 시선이 쏠리기도 했다. 어쨌든 결승전에 진출한 아르헨티나가 만난 상대는 네덜란드. 자국의 우승을 바라보기 위해 관중석을 가득 메운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총과 폭죽으로 갖은 소음을 내며 광기 어린 모습을 보여줬고, 그간 쌓인 울분을 모두 쏟아내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결승전에서도 역시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거친 플레이로 일관했고, 주심은 이번에도 모른체했다. 결국 네덜란드를 3-1로 꺾은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갖은 의혹과 아르헨티나가 보여준 억지스러운 모습은 다른 출전국들의 거센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월드컵 첫 우승이라는 감격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억지 우승에 대한 대가(?)인지 아르헨티나는 또 다시 위기를 맞는다. 1982년 영국과 벌인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한 것이 원인이었다. 독재가 계속되고 있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일으킨 전쟁은 결국 아르헨티나를 수렁에 빠뜨렸고, 세계 대부분의 국가 역시 영국의 편을 들며 아르헨티나는 국제적인 고립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대중성은 독재자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덕에 스포츠는 본래의 목적보단 독재자의 정권 유지 수단 내지 선전물로 이용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스포츠의 순기능이 이런식으로 이용되어서는 곤란하겠다. 앞으로는 독재가들의 악용으로 얼룩진 스포츠가 더 이상은 생겨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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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비올낫투비 2015.05.26 00:48 신고

    체육학을 전공하는 학생입니다. 정말 좋은 자료같아 잘 읽고 자료참고해 가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라는 말이 있다. 외길 인생을 살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인생의 선택은 자유이다. “끝나기 전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야구 선수 요기 베라의 말처럼 인생은 다 살아봐야 아는 것이다. 시냇물이 굽이굽이 돌며 흐르듯 인생의 굽이마다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올 수 있고, 새로운 선택도 할 수도 있다. 씨름 스타 강호동은 연예계로 진출하여 일단은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앞으로 그러한 사례는 더 늘어날 것이다. 스포츠맨 정치인도 나와야 한다. 정치란 종합 예술과 같은 것이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태권도 스타의 정계진출 과정은 표절 시비로 파열음을 내고 있지만 외국의 경우 성공사례가 많으며 밥 마티아스(Bob Mathias, 1930–2006)의 변신은 스포츠맨이 정치가가 되고자하면 어떤 자세로 운동을 해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정치가가 된 스포츠 영웅 밥 마티아스

 

마티아스는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 육상에서 17세의 최연소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강한 유연성이 요구되는 체조 같은 특수 종목이라면 몰라도 육상 중에서도 가장 힘겹다는 10종 경기에서 청소년이 우승을 안았으니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 캘리포니아의 툴라(Tulare)에서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난 마티아스는 유년기부터 미식축구와 육상에 탁월한 자질을 보였다. 그는 단번에 10종 경기 미국 선수권자가 되어 올림픽 출전권을 얻었고, 만 18세가 되기 전인 1948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던 것이다.

 

금메달리스트로서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로 선정되었던 밥 마티아스의 진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학구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육상선수에서 미식축구선수, 배우, 정치가로 변신했다. 금메달리스트가 된 이후 연습 때문에 학업성적이 나빠지자 과감하게 운동을 쉬고 펜실베이니아 기숙학교 키키스쿨로 옮겨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스탠포드대학으로 진학했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육상과 미식축구 선수를 겸했다. 1951년 로즈볼에서 스탠포드 대학의 풀백을 맡았다. 그리고 1952년 핀란드 헬싱키 올림픽 10종경기에 출전하여 912점을 획득, 최초의 올림픽 10종경기 연속 제패 자가 되었다. 더 큰 올림픽 영웅이 된 그는 육상 은퇴를 선언하고 1952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을 재개했다.

 

1953년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한 그는 미식축구 드래프트에서 워싱턴 레드스킨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포기하고, 결혼을 한 그는 부부가 영화계로 나섰다. 1954년 영화 『밥 마티아스 스토리(The Bob Mathias Story)』에 출연했고, 해군 복무를 마친 이후 1960년까지 국무성 친선대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존 웨인(John Wayne)에게 고용되어 영화 『차이나 돌(China Doll)』에 출연했다. 인기를 얻은 그는 존 웨인과 함께 TV 시리즈에도 출연하며 또 다른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966년 마티아스는 다시 변신했다. 정계를 노크한 것이다. 하원의원에 출마한 그는 14년 동안 의원직을 유지했던 거물 정치가 하겐(Harlan Hagen)을 11% 포인트 앞서며 당선되었고, 어려움 없이 재선에도 성공했다. 정계에 진출한 그가 늘 승리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74년 그의 지역구가 변하면서 근소한 차로 크렙스(John Hans Krebs)에게 패했고, 1976 제너럴 포드 재선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로 끝나며 정치 인생을 접었다. 1976년엔 이혼을 겪기도 했다. 1988년 시골 프레스노 카운티로 돌아와서 살다가 목에 생긴 종양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했다. 그러나 한 스포츠 영웅은 그의 생을 통해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1998년 6월 6일 그의 고향 툴라에는 첫 금메달 획득 50주년 기념행사 "어크로스 필드 오브 골드(Across the Fields of Gold),"가 열렸고, 명사 300여명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스포츠 영웅, 밥 마티아스가 스포츠맨에서 배우, 정치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기초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충실히 받았고, 언제나 학구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것이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따려면 기초체력이 튼튼해야 하듯이 우리의 스포츠 영웅들이 훌륭한 학자, 국제적인 스포츠 행정가, 성공적인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초 교육을 충실히 받아야 한다. 그럴 기회를 놓쳤다면 항상 지식을 쌓고, 덕성을 계발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허상을 감추고 스포츠 영웅으로서의 인기만 앞세워 어설픈 도전을 했다가는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한다.”는 국민의 비아냥거림을 살 것이다. 설사 한번 쯤 성공하더라도 자신과 많은 체육인들에게 상처까지 남기게 될 것이다. 스포츠 영웅이 정치에 뜻을 두려면 마티아스의 일대기라도 읽고, 고해성사를 하고, 자신의 인격 닦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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