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체육 ]/체육사학 +81

 

 

 

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12번째 선수들의 축구전쟁(2)


 앞서 소개한 국가대표팀과 더비팀들을 포함해 세계에 모든 서포터들은 오랜 종교 갈등, 지역감정, 경쟁관계나 어이없는 오심(誤審), 믿었던 자기 팀의 패배 그리고 과거에 당한 패배나 수치에 대한 보복 등 형형색색의 이유로 점잖은 신사의 모습을 버리고 흉악해 진다. 축구는 태생부터 전쟁에서 기원했고, 1백 년이 넘는 역사에 수 만 명이 경기에 동원되기 때문에 다른 종목과는 달리 대형의 안전사고와 대규모 충돌 요인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기장의 안과 밖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참사에서 한두 명이 아니라, 수 백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서포터들을 ‘훌리건(Hooligan)’이라 부르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사례를 보면 오히려 ‘광란(狂亂)의 폭도(暴徒)’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여기서 소개할 사례는 지면 관계상 안전사고(선수를 태운 항공기의 추락사고, 부실 공사로 스탠드가 무너져 발생한 인명사고 등)는 생략하고, 경기 도중에 또는  일어난 서포터들의 충돌이나 난동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참사들만 시대 순으로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 언급하는 더비는 앞서 소개한 내용을 참조하기 바란다.

 

출처 : 2010.06.22일자 경향신문

 

➐ 아크라 참사(Accra sports stadium disaster)
  축구 참사에 아프리카라 해서 예외일 수 없다. 2001년 5월 9일, 가나의 수도 아크라의 아크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가나 축구리그의 1, 2위 팀인 ‘아크라 하츠 오브 오크(Accra Hearts of Oak Sporting Club)’와 ‘쿠마시 아산테 코토코(Kumasi Asante Kotoko)’와의 경기가 있었다. 이날 사고는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원정팀 아산테가 1-2로 뒤지자 실망한 아산테 팬들이 병과 의자를 경기장으로 집어던지면서 시작됐다. 경기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관중들이 난동이 점점 심각해 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경찰은 조기 진정을 위해 최루탄이라는 극약 처방을 택하게 된다. 경찰은 즉각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고, 스탠드에 있던 관중들은 최루가스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다 넘어지고, 넘어진 위로 깔리면서 사고는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경기장은 경찰들의 최루가스로 앞이 보이지 않는데다 부상당한 고통의 신음소리와 압사당한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날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만 무려 127명이나 되었다. 사고가 나자 아크라 시내는 병원과 경기장을 오가며 사상자를 실어 나르는 구급차들로 1시간 이상 마비되다시피 했으며 병원 복도까지 피를 흘리는 부상자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상자 가족들로 인해 전쟁터 그 자체였다. 다른 사례와는 달리 맞수 서포터 간의 난동으로 벌어진 참사가 아니라, 원천봉쇄를 위해 투입된 경찰의 과잉 진압이 부른 의도하지 않은 참사로 2000년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고로 기록되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축구 참사는 아크라 참사가 일어나기 한 달 전, 남아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도 43명이 죽는 참사가 발생하는 등 확산되고 있어 새로운 진원지가 되고 있다.

 

<아크라경기장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희생된 관중들>

http://www.mightfmonline.com/2013/05/today-marks-12th-anniversary-of-may-9-stadium-disaster/
http://sankofaonline.com/12th-anniversary-of-may-9-disaster-marked-today/

 

 

➑ 시칠리아 참사(Sicilian derby riots)
 

 거친 집단축구 칼치오(Calcio)의 나라 이탈리아도 축구장 난동의 역사는 매우 깊다. 이탈리아 축구장 난동은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사진에서 보듯이 거의 폭동에 가깝고, 별도의 설명 없이 사진만 보면 테러나 시가전을 방불케 한다. 대규모 참사와는 약간 다른 이탈리아 축구의 인명사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이탈리아 축구 참사 일지(시간순)

구분

경기팀

내용

19644

살레르니타나-포렌자(세리에C)

관중 폭동 진압 도중 경찰 발포로 관중 1명 사망

197910

라치오-AS로마(로마더비)

화염에 의한 화재로 라치오 팬 1명 불에 타 사망

19849

AC밀란-세레모네세

AC밀란 팬 1명이 칼에 찔려 사망

198910

인테밀란-아스콜리

인테밀란 측에서 던진 돌에 아스콜리팬 1명 사망

1995

제노아-AC밀란

제노아 팬 1명이 칼에 찔려 사망

20039

나폴리-아텔리노

나폴리 팬이 경기장 난간에서 떨어져 사망

20071

아마추어클럽

난동을 저지하는 구단 매니저 머리를 발로 차 사망

20072

필레르모-카타니아(시칠리아더비)

관중이 던진 폭발물에 난동을 진압하던 경찰관 사망

 

이탈리아의 참사는 비록 그 규모나 희생자의 숫자 면에서 앞서 소개한 페루, 잉글랜드, 가나 등 세계적인 참사들에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돌이나 칼, 총 심지어 폭발물까지 동원해 상대 응원단이나 경찰관까지 살해하는 악성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표에서 가장 마지막의 사고는 2007년 2월 2일, 세리에 A리그 경기로 시칠리아를 연고로 하는 팔레르모와 카타니아의 두 팀 사이에서 벌어졌다. 시칠리아 더비로도 유명한 두 라이벌의 충돌은 전반이 끝난 뒤, 휴식시간에 시작됐는데 후반 시작 휘슬이 울리고도 난동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경찰이 투입되었고, 경기는 일시 중단됐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경찰은 관중석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이 때 관중석 어디선가 폭발물이 경찰 차량에 터졌다. 이로 인해 바로 옆에 있던 경찰관(필리포 라시티)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동료 경찰관도 부상당했으며 축구 팬  수백 명이 다쳐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다. 다시 재개된 경기는 원정팀 팔레르모가 2대1로 승리하며 마쳤지만, 난동은 경기 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경기장 인근 지역은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다. 이날 저녁 이탈리아 축구연맹은 긴급회의를 통해 이후 계획된 세리에 리그를 비롯한 모든 경기를 취소시키며 모든 이탈리아 축구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장(시칠리아 안겔로 마시미노경기장)에서는 불과 1주일 전에도 4부리그 경기 도중 팀 매니저가 난동을 저지하려다 흥분한 관중의 목을 차여 숨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2006년 승부조직으로 큰 홍역을 치렀고, 이어서 난동에 이은 인명사고, 그것도 난동을 제지하려는 구단 직원과 경찰관까지 사망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결국 이탈리아 프로축구 지도부들은 가장 짧은 임기로 전원 교체되었다

 

<일체의 설명 없이 사진만 보면, 대규모 폭동이나 심지어 테러와 같은 시가전을 연상하게 하는 2007년 시칠리아 더비의 난동 장면이다. 이 날 벌어진 이 난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경찰관(필리포 라시티)의 장례식 장면>

 

http://www.smh.com.au/news/football/bresciano-caught-up-in-riot-tragedy/2007/02/03/1169919584235.html?s_cid=rss_smh
http://www.chinadaily.com.cn/sports/2007-02/06/content_802053.htm

➒ 포트사이드 참사(Port Said stadium clashes)
 유엔 가입 국가들보다도 많은 나라에서 즐겨 하는 축구에서 대형 참사는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위의 사진은 중동에 가깝지만 아시아 지역에 포함되어 비교적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이집트에서 2012년에 일어난 난동 장면이다. 그동안 주축이었던 유럽과 남미 중심의 대형 참사가 가나에 이어 이집트까지 아프리카로 옮겨간 느낌이다. 2012년 2월 1일, 이집트 북동부의 항구도시 포트사이드에서 열린 엘-마스리와 엘-아흘리의 프로리그 경기에서 양 팀 팬들이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원정팀 알-아흘리의 팬들은 수적 불리함을 커버하고, 기에서 눌리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독한 서포팅을 구상했는데, 그 중 하나가 상대 팀 엘-아흘리를 비하하는 다소  모욕적인 현수막을 내걸어 경기 전부터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경기 중에는 사소한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큰 충돌 없이 경기는 종료됐다. 그러나 경기 결과 홈팀 엘-마스리의 승리(3-1)를 두고 양 팀의 서포터 간에 입씨름 벌어졌고, 이는 삽시간에 집단 패싸움으로 번졌다. 이 사고로 무려 79명의 사망자와 1,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외신에서는 이례적으로 ‘참사(Disaster)’ 대신에 ‘충돌(Crashes)’이라는 용어로 기록되었다.

 

<2012년 집단 난투극으로 1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이집트 포트사이드 참사>


http://www.nationalturk.com/en/port-said-stadium-clashesegypt-court-confirms-21-port-said-death-sentences-middle-east-news-35181
http://www.standard.net/stories/2012/02/01/egypt-soccer-fans-rush-field-after-game-73-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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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 12번째 선수들의 축구전쟁(2)

 

 

 

글/ 윤동일

 

 

 앞서 소개한 국가대표팀과 더비팀들을 포함해 세계에 모든 서포터들은 오랜 종교 갈등, 지역감정, 경쟁관계나 어이없는 오심(誤審), 믿었던 자기 팀의 패배 그리고 과거에 당한 패배나 수치에 대한 보복 등 형형색색의 이유로 점잖은 신사의 모습을 버리고 흉악해 진다. 축구는 태생부터 전쟁에서 기원했고, 1백 년이 넘는 역사에 수 만 명이 경기에 동원되기 때문에 다른 종목과는 달리 대형의 안전사고와 대규모 충돌 요인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기장의 안과 밖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참사에서 한두 명이 아니라, 수 백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서포터들을 ‘훌리건(Hooligan)’이라 부르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사례를 보면 오히려 ‘광란(狂亂)의 폭도(暴徒)’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여기서 소개할 사례는 지면 관계상 안전사고(선수를 태운 항공기의 추락사고, 부실 공사로 스탠드가 무너져 발생한 인명사고 등)는 생략하고, 경기 도중에 또는  일어난 서포터들의 충돌이나 난동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참사들만 시대 순으로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 언급하는 더비는 앞서 소개한 내용을 참조하기 바란다.

 

 

 

➍ 헤이젤 참사(Heysel stadium disaster)
  앞서 스코틀랜드의 더비와 서포터를 소개했지만 역시 잉글랜드를 빼고선 논할 수 없다. 1985년 유러피언컵에서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리버풀 FC와 이탈리아의 명문 구단 유벤투스 FC가 결승전에 올랐고, 이 둘은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격돌했다. 경기는 도시 북서부에 위치한 스타이움에서 개최됐는데 이 경기장은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여 1930년에 세워진 벨기에의 자랑이자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처음에는 보두앵(Baudouin) 또는 주빌레(Jubilé) 경기장으로 불렀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위치한 지명을 따서 헤이젤경기장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역대 최악의 축구장 난동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참사는 우연히 결승전에서 맞붙게 된 양 팀 서포터의 단순한 충돌로 빚어진 것이 아니다. 좀 더 관점을 확장해 보면, 유럽대륙의 축구장을 장악하려는 잉글랜드의 ‘훌리건’과 이탈리아의 ‘울트라’간의 경쟁에 의한 주도권 쟁탈전으로 볼 수 있다. 1984년, 리버풀의 서포터 더콥의 일부 회원들이 유벤투스의 서포터 울트라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것이 참사의 시작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85년 5월 29일 두 팀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들처럼 숙명적으로 유러피언 결승전에서 만났고, 리버풀의 더콥은 1년 전 받은 수모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경기 시작 한 시간 전, 대회 주최측은 양 팀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응원석을 펜스로 구분했고 서로 나뉘어 입장한 가운데 경기장은 이미 양 팀 서포터들의 열정적인 응원으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먼저 유벤투스 팬들이 중립지대 건너편에 위치한 리버풀 관중들에게 무엇인가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으며 도발을 시작했다. 이에 격분한 리버풀 관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훌리건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쇠파이프와 몽둥이 등 흉기를 들고 중립지대의 펜스를 넘어 유벤투스의 관중석을 덮쳤다. 훌리건들이 난동은 1년 전 사태의 보수 대상인 울트라와 일반 관증들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기습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벤투스 측의 관중들은 경기장을 황급히 떠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많은 인원이 출구로 몰렸다. 결국 7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벽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고 관중들은 압사당하거나 스탠드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당했다. 경기장 이름을 붙인 이 참사(줄여서 Heysel disaster라고 함.)로 인해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나 부상을 당했으며 사건을 주동했던 훌리건 29명이 구속됐다.

 

이게 다가 아니다. 당시 난동을 방조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의 모든 축구팀들에게 향후 5년 동안 국제 대회에는 출전금지의 중징계가 내려졌다. 물론 훌리건의 온상지 리버풀 FC도 포함되었는데 리버풀에겐 특별히 2년이 가산되어 7년으로 통제되었다. 또한 건국 100주년을 상징하는 벨기에의 자부심 헤이젤경기장은 한동안은 육상경기만 열리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다. 아울러 응원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큰 경기장의 스탠드석이 모두 철수되고 좌석제로 변경됐고, 경기장에서의 음주 금지와 훌리건의 적극적인 진압도 명문화되었다. 아울러 다음에 소개할 참사와 함께 테일러 보고서와 1992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출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 말고도 리버풀 FC와 관련된 사건은 또 있다.

 

  

 <쇠파이프와 몽둥이 등 흉기를 들고 유벤투스 관중석으로 향하는 리버풀의 훌리건들과 당시 참혹했던 장면들>

 

http://metro.co.uk/2011/05/17/heysel-stadium-disaster-film-in-the-pipeline-13414/
http://www.dailymail.co.uk/sport/football/article-1282111/Liverpool-remember-Heysel-Disaster-minute-silence.html
http://futebolhistoria.blogspot.kr/2012_02_01_archive.html

 

 


➎ 힐스보로 참사(Hillsborough disaster)
  1989년 4월 15일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리스트 FC간의 FA컵 준결승전은 잉글랜드 셰필드에 위치한 힐스보로 스타디움에서 거행되었다. 킥 오프 시간(오후 3시)이 다가오자 관중들은 급증했는데, 특히 오후 2시30분∼40분 사이에 약 5,000명의 입장객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입장구의 회전문(turnstyle)은 병목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고의 징조였다. 평소에는 수용 한계에 이르면 경찰과 직원이 터널의 입구에 서서 진입을 막고 다른 문으로 유도했지만 이 날은 그러지 않고, 회전문 옆에 출구로 사용하던 보조문을 개방해 해소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회전문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린 사람들이 일제히 보조문으로 몰렸고, 이어서 어김없이 재앙은 찾아 왔다. 경기가 시작된 지 6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일부 팬들이 지나치게 붐비는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펜스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자, 경찰이 권고하여 심판은 경기를 잠시 중단시켰다. 이 때, 관중들은 펜스에 있는 작은 문을 억지로 열었고, 이를 통해 그 곳을 빠져나왔다. 팬들은 펜스에 매우 빽빽하게 몰려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압력으로 질식사하고 만다. 관중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찰과 직원, 구급 대원만으로는 사태를 처리할 수 없었다. 이 사고로 죽은 사람만 96명이었고, 766명의 팬들이 부상당했다.


 

고인들을 기리는 의식이 리버풀 FC의 홈구장 안필드의 빌 생클리 문에서 있었고, 1999년에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도 있었다. 리버풀 성당의 남쪽 도로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석이 있다. 구단에선 두 참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프로리그 출범 당시 만들었던 엠블럼의 양쪽에 횃불 두 개를 추가해 1993년부터 2012년까지 사용했다. 이 엠블렘과 관련해서는 다시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또 힐스보로 참사의 희생자들 중에는 1980년에 태어나 유소년팀을 거쳐 프로 팀에 이르기까지 전체 축구 인생을 리버풀과 맺고, 2013년 현재 소속 팀 리버풀과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세계적인 축구 스타 스티븐 제라드의 사촌형도 포함돼 있다. 헤이젤과 힐스보로 두 참사는 결국 법원으로 보내졌고, 재판을 담당했던 테일러의 ‘힐스보로 사태 연구 보고서’, 줄여서 ‘테일러 리포트’가 발표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축구의 전통을 파괴한다는 거센 항의 논란도 있었지만 1990년 발표된 이 보고서는 스포츠 이벤트의 사고 방지에 관한 제반 조지를 담고 있으며 특히, 모든 스타디움에는 보호 철망을 철거하고, 기존의 입석 형태가 아닌 좌석 형태의 좌석제를 의무화하며 주류 판매를 금지하며 안전을 위해 방벽의 설치 등을 다루고 있다. 이후 축구장은 좀 더 안전한 곳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비싼 입장료는 내야 하는 부담도 커지게 되었다.

 

               <당시 이층 스탠드로 피하는 관중들과 펜스에 몰려 입사 직전의 장면. 그리고 희생된 관중들>
http://www.liverpoolecho.co.uk/news/liverpool-news/hillsborough-police-kept-money-found-5826801
http://www.belfasttelegraph.co.uk/news/local-national/uk/shame-of-hillsborough-laid-bare-as-justice-nears-for-innocent-liverpool-fans-28791636.html

 

➏ 샤를레러 난동(Charleroi stadium riots)
유로 2000을 통해 잉글랜드 훌리건들은 다시 한 번 벨기에에서 그들의 ‘명성’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우선 잉글랜드는 지난 해 우승국 독일을 맞이해 34년 만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전반 독일의 공격을 잘 막아낸 잉글랜드는 후반 8분, 독일 진영의 오른쪽 코너 부근에서 얻은 프리킥을 베컴이 정확하게 반대로 올렸고, 상대 수비수를 따돌린 시어러가 헤딩으로 결승골을 넣어 34년 동안의 설움을 복수했다. 이 날 밤, 거리에는 잉글랜드의 훌리건 수백 명이 벨기에 수도 브뤼셀과 경기가 열렸던 샤를레러 시가를 휩쓸고 다녔다. 여기엔 주최측의 경기장 배정 실수도 한 몫을 담당했다.

유럽축구연맹은 축구에 열광하는 영국과 독일 간의 경기를 아주 작은 경기장만 갖고 있는 샤를레러에서 열도록 결정했는데 그나마도 경기 티켓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티켓은 ‘있는 사람들’이나 축구 클럽들의 ‘스폰서’들에게 할당되어 있어 경기를 보기 위해 모인 영국 서포터들에게는 기회조차 없었다. 이런 불만은 고스란히 경기를 관전하고 싶지만 티켓을 갖지 못한 영국 팬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샤를레러의 찰스2세 광장에는 대형 스크린이나 대형 TV가 단 한 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경기를 중계하는 스피커나 심지어 스코어보드조차도 없었다.

이제 그들이 갈 곳은 오로지 텔레비전이 설치된 술집 외에 대안이 없었다. 그리고는 거기서 의자를 차지하고 그곳에 ‘죽치는’ 수밖에 없었다. 경기를 보기 위해 그들은 벌건 대낮부터 술을 마셔야 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승리에 대한 기쁨과 분노가 폭발해 버렸다. 술에 취한 영국 팬들이 거리를 질주하자, 벨기에 경찰들은 최루가스와 물대포로 진압하려 했고, 경찰의 수가 늘수록 그들은 광폭해져만 갔다. 이 사고로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고, 부상자는 56명에 불과했지만 무려 8백50명이 넘는 잉글랜드 축구팬들이 벨기에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들을 포함해 기간 중 연행된 인원은 965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464명이 추방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데이비드 베컴(David Beckham)의 센터링을 받아 헤딩슛으로 결승골을 넣고 환호하는 잉글랜드의 알란 시어러(Alan Shearer)와 허탈하게 지켜보는 독일의 수문장 올리버 칸(Oliver Kahn). 샤를레러 광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잉글랜드 훌리건들과 벨기에 경찰이 물대포를 동원해 진압하는 장면>


http://www.dailymail.co.uk/sport/worldcup2010/article-1289645/England-v-Germany—Iconic-images-games-evocative-fixture.html
http://www.youtube.com/watch?v=SCni-iqAj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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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 12번째 선수들의 축구전쟁 ⑤

 

  앞서 소개한 국가대표와 더비팀들을 포함해 세계에 모든 서포터들은 오랜 민족분쟁, 종교갈등, 지역감정, 경쟁관계는 물론이고, 어이없는 오심(誤審)이나 믿었던 자기 팀의 패배로 인한 실망감 그리고 과거에 당한 패배나 수치심에 대한 복수 등 형형색색의 이유로 점잖은 신사의 모습을 버리고 악한 모습으로 변한다. 다른 종목과 달리 오랜 역사를 가진 축구는 태생부터 전쟁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고, 수 만 명이 경기에 동원되기 때문에 다른 종목과는 달리 대형의 안전사고와 대규모 충돌 요인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기장의 안과 밖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참사에서 한두 명이 아니라, 수 백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서포터들을 ‘훌리건(Hooligan)1)’이라 부르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사례를 보면 오히려 ‘광란(狂亂)의 폭도(暴徒)’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여기서 소개할 사례는 지면 관계상 안전사고(선수를 태운 항공기의 추락사고, 부실 공사로 스탠드가 무너져 발생한 인명사고 등)는 생략하고, 경기 도중에 또는  일어난 서포터들의 충돌이나 난동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참사들만 시대 순으로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 언급하는 더비는 앞서 소개한 내용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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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훌리건(Hooligan)은 ‘런던의 불량배’에서 유래해 ‘축구 경기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지세한 내용은 다음에 소개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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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2010.06.22일자 경향신문

 

➊ 리마 축구 폭동(Lima football riot)
  이 참사는 역대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던 최악의 난동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본선 진출을 위한 지역예선에서 페루는 아르헨티나와 만났다. 페루 리마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이 경기는 원정팀 아르헨티나가 선취골을 넣으면서 무난하게 승리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경기 종료 2분을 남겨 두고, 페루 대표팀에서 극적인 골을 성공시키면서 꺼져가는 불씨를 살렸다. 그러나 이 동점골은 주심이 노골(no goal)을 선언하면서 무효가 되었다. 이를 본 페루 관중들은 흥분했고, 일부 격분한 관중들은 그대로 그라운드로 밀려 내려갔고, 경기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뒤늦게 투입된 경찰도 이들을 진정시키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관중들은 경기장을 부수며 난동을 피웠고, 급기야는 담장까지 무너뜨리며 경기장 밖으로 몰려 나가 리마 시의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폭도가 되어 버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에선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해 진압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328명의 사상자(부상자에 대한 통계는 정확하지 않음,)가 발생했는데 이 숫자만 보더라도 세계에서 축구로 인해 발생한 사건·사고 가운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참사임을 알 수 있다. 이 참사는 지역의 이름을 붙여 리마 참사로 부르나, 경기장의 난동에서 시작해 시가지 폭동으로 번졌기 때문에 ‘폭동(riots)’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장에 난입하고, 스탠드에서 난동을 부리는 페루 관중들
http://www.sportskeeda.com/2012/12/15/top-5-derby-matches-marred-by-crowd-trouble/
http://www.totalprosports.com/2011/07/11/9-tragic-sports-fan-deaths/

 

 

➋ 푸에르타 도세 참사(Puerta 12)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고로 하는 최고의 라이벌 보카 후니오르스와 리베르 플라테의 ‘엘 수페르클라시코’ 더비는 1백년 이상 된 유명한 라이벌전이다. 1968년6월 23일 엘 모누멘탈 경기장에서 열린 리그 경기는 득점 없이 무승부로 끝났다. 여느 때와는 달리 아무 일 없이 끝나는 듯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일이 벌어졌다. 경기가 끝난 후, 2층 스탠드에 서 응원하던 보카의 한 팬이 불붙은 종이를 아래 스탠드로 던졌고, 화재로 번지면서 이를 피하려던 관중들이 출구로 한꺼번에 몰렸다. 그런데 이 출구는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어서 관중들은 단 한 명도 빠져 나가지 못하고, 나가려는 사람들로 닫힌 출구는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다. 결국 12번 게이트는 압시당한 74명의 사상자와 150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지옥으로 변했다. 그런데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평균 20세 미만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어서 주변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경찰은 3년 동안 사고 조사를 벌였지만 원인과 책임자를 규명할 수 없었고, 그해 시즌이 끝날 때까지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에 등록된 모든 팀들(68개 팀)의 모금을 통해 희생자 가족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할 수 있었다. 이 사고는 관중들이 몰려 압사당한 출구(12번 게이트)의 이름을 사용해 ‘푸에르타 도세(Puerta 12)’ 참사로 부르며 다혈질인 국민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건·사고가 많은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고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참사가 일어났던 12번 출구. 당시 관중들의 난동과 참사를 재현한 사진

http://es.wikipedia.org/wiki/Tragedia_de_la_puerta_12
http://www.futebolportenho.com.br/2010/11/12/supersemana-%E2%80%93-a-tragedia-do-portao-12-crime-futebolistico-ou-politico/

 

➌ 아이브록스 참사(Ibrox disaster)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계 더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더비라면 단연 스코틀랜드의 올드펌 더비(Old Firm Derby)를 꼽는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오랜 친구란 더비 이름과는 달리 125년 동안 4백 여회의 치열한 매치를 펼쳤다. 태생부터 지역과 종교를 기반으로 한 두 팀의 숙명적인 더비가 그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는데 어찌 사건·사고가 없을까? 오죽하면 이 두 팀의 경기에는 다음과 같은 룰 아니 룰이 적용된다. 매 경기마다 그라운드에서는 선수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거칠게 상대를 몰아 부치고, 스탠드에서는 격분한 서포터들이 충돌한다. 그리하여 이 더비엔 선수들의 무자비한 반칙이 난무해 매 경기 당 5∼6회의 경고와 2명 이상의 선수가 퇴장되는 일은 늘 있는 일이다. 경고나 퇴장이 많은 일방은 상대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경기에서 크게 질 수밖에 없는데 상황이 이쯤 되면 진 쪽의 서포터가 가만있지 못한다. 통상은 심판의 편파 판정을 빌미로 그라운드 난입이 이루어지고 이를 저지하는 경찰이나 상대 서포터와 격렬한 몸싸움과 함께 양 팀의 난투극으로 발전하게 된다. 경기에 진 선수들과 서포터들은 와신상담 다음 경기를 기약하며 그 날이 오면 치밀한 계획 하에 지난 패배의 복수하게 된다. 이런 과정의 악순환은 양 팀에겐 적어도 1백년 된 습관이다. 스코틀랜드는 더비의 역사만큼이나 재앙도 긴 역사를 갖고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아이브록스(Ibrox) 경기장은 1902년과 1971년, 두 번의 대형 인명사고가 일어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1902년 4월 5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브리티시 챔피언십 경기에서 일어났다. 전날 내린 폭우 때문에 지반에 약해져 나무로 만든 스탠드(경기장의 서쪽)의 지지대가 무너져 내려 사고가 발생했다. 모두 25명의 사망자와 517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이 경기는 두 팀은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공식 경기로 인정받지 못했다.

 

두 번째는 이로부터 70년이 지난 1971년 1월 2일에 열린 올드펌 더비에서 1차와 마찬가지로 관중들이 몰리면서 스탠드가 무너져 무려 66명의 사망자와 160여 명의 부상자를 낸 것이다. 당시 상황은 약 8만 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셀틱이 1 대 0으로 리드한 채로 경기 종료에 임박해 가고 있었다. 낙담한 레인저스의 서포터들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떠나 경기장을 빠져 나가고 있었는데 이 때 갑자기 경기장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후반 경기 종료 직전, 레인저스가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미 경기장을 빠져 나온 레인저스의 팬들은 이 감동적인 장면을 보기 위해 다시 경기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13번 통로(Stairway 13)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어린 아이를 목마 태운 아버지가 넘어지면서 계단을 가들 매운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넘어져 또 한 번의 재앙을 맞아야 했다. 이후 이 재앙은 법정으로 보내져 1년간 정밀 조사와 재판을 거쳐 1973년 스포츠 관중들의 안전에 관한 수칙인 ‘그린 가이드(Green Guide)’를 발표하고, 2년 뒤에는 법 제정(the Safety of Sports Grounds Act 1975)의 기초가 되었다. 이런 조치가 취해진 후, 올드펌 더비의 격렬한 난동은 점차 수그러들었고, 결정적으로 다음에 소개할 1990년 ‘테일러 리포트(Taylor Report) 2)’에 이은 제반 조치들이 나오면서 점차 그 회수나 수준이 많이 완화되어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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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제는‘THE HILLSBOROUGH STADIUM DISASTER’이며

 축구의 참사 원인을 분석해 개선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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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브록스 참사가 벌어진 장소(스탠드와 경기장에 이르는 13번 통로).

아이브록스 참사를 기리는 조각상 : 서포터들이 뽑은 가장 위대한 선수(John Greig)의 조각상에

두 참사의 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매년 이 조각상 앞에서 당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도식을 갖는다.

http://en.wikipedia.org/wiki/1902_Ibrox_disaster
http://www.dailyrecord.co.uk/news/scottish-news/ibrox-disaster-victims-remembered-41-1112705
http://www.thetimes.co.uk/tto/sport/football/article2860315.ece


 

1980년대의 올드펌 더비의 경기장 난동 장면 : 경기가 끝난 후에도 양 팀의 서포터들은

그라운드에 난입해 상대 선수들과 서포터들을 위협했고,

기마경찰까지 투입해 서포터들과 경찰의 대결이 펼쳐졌다.

물론 사상자의 발생은 숫자가 줄였을 뿐 여전했다.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Old%20Firm%20Derby&sm=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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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승환(해군사관학교 교수) 

                                 

최근 교육자료를 수집하다가 알게 된 잊혀진 체육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단순한 스포츠영웅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심어준 국민영웅인데, 독립운동의 대부분이 일본의 눈을 피해서 이뤄졌다는 특징이 있으나, 이 사람은 일본이 마련한 공식대회에서 국민들에게 독립의 열망을 불어넣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대중들이 그의 행적을 유행가로 만들어 불렀던 것을 보면, 손기정, 김일 만큼 유명했다고 사료되나,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있지 않고 일본에도 자료가 없는데 바로 우리나라 사이클선수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엄복동이라는 인물이다.

 

엄복동은 1892년 서울 중구 오장동의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일하다가 서울시내 일미상회라는 자전거 가게에 점원으로 취직하였다. 여기서 우연히 1913년 개최된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 출전, 우승하였고 이후 주요대회를 석권하였다. 당시의 자전거 가격은 조선인 경찰 봉급의 4배에 달할만큼 고가였고, 국민 대부분이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던 자전거 상회의 직원들이 선수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엄복동 또한 우연한 기회에 인생이 바뀐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시련이 있었으니, 엄복동의 우승퍼레이드가 이어지자 자존심이 구겨진 일본인들의 야비한 방해가 있었던 것이다. 1920년 창경궁에서 열린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엄복동 폭행사건’이 일어났다. 엄복동이 몇 바퀴를 남겨두고 독보적으로 앞서자 일본인 심판이 일몰을 이유로 경기를 중단시켰고, 이에 분노한 엄복동이 본부석으로 달려가 우승기를 꺾어버리자, 한국인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인 관중들이 분노한 나머지 경기장에 난입하여 엄복동을 구타하였던 것이다. 이때 엄복동은 안면을 포함한 전신에 큰 부상을 입었고, 은퇴할 수도 있는 큰 위기를 맞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엄복동은 3년이라는 긴 재활을 이겨내고 마침내 1923년 제 2회 전 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 출전하였다. 여기서 엄복동은 독보적인 페이스로 일본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고, 중국 대련에서 열린 자전거대회에서도 우승하며 활동무대를 동아시아로 확장하였다. 그는 1932년 40세가 될 까지 주요 대회를 석권하면서 ‘동양 자전거 대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엄복동의 시합이 있는 날이면 많은 군중들이 그의 시합을 구경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운집하였고, 그의 우승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몇 번의 우승 이후 엄복동이 시합에 출전한다는 소문만 들려도 수많은 관중이 모여들 정도로 우리민족의 영웅이 되어있었다. 탁월한 실력으로 일본선수들과의 대결에서 엄복동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때면 국민들은 희열감에 함성을 질렀고, 그가 일본의 방해로 질 때면 분노하기도 하였다. 1923년 5월 경성윤업 주최의 조선자전거경기대회에서 심판의 편파판정과 관중들의 치사한 행위로 인해 전조선자전거 대회에서 3위로 추락하자 대한제국 관중들은 분개하여 방석을 던지는 등 난동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던 것이다. 즉, 그가 이길 때의 함성은 단순히 통쾌한 승리의 함성이 아닌 일제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희망이 담긴 함성이었으며, 그의 자전거는 독립이라는 온 민족의 희망을 실은 자전거가 되었던 것이다.  


스포츠 영웅은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국민들은 영웅의 탄생에 환호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엄복동 또한 스포츠 영웅이 될 수 있었고,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로부터 국민들 사이에서는 ‘하늘에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 이라는 말이 생겼고, 당시에 유행하던 안익태 작곡의 ‘이팔청춘’에 맞추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작사한 노래를 거리를 활보하면서 부르고 다녔다. 엄복동은 나라 잃은 대한제국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독립의지를 드높인 독립투사이자, 진정한 국민영웅이었고, 그의 노래는 그의 승리로부터 독립에 대한 열망을 살려나갈 수 있었던 대한제국 국민들의 독립가(歌)로써 작용하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작은 땅과 적은 인구로도 OECD에서 인정하는 선진국으로 세계 어느 국가와도 견줄 수 있는 경쟁력을 가지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려운 시절마다 국민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준 엄복동, 손기정, 안창남, 최근의 박세리 등의 스포츠 영웅들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 영웅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손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으며, 이들과 관련된 자료들도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수많은 스포츠 영웅들의 일생과 업적을 기릴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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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 12번째 선수들의 축구전쟁④


축구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축구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들로 한정되지 않고, 경기를 관람하는 스탠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경기장 밖에서도 벌어진다. 축구를 논할 때 서포터들의 집단응원은 빼놓을 수 없는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승부는 경기 성적에 반영되지 않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결정적인 호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승패와 직결되기도 하며 극단으로 흐를 경우, 오히려 이긴 쪽에 더 불리한 조치가 따르기도 한다.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간접적으로나마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물론이고, 심판들에게도 심리적인 영향을 미쳐 승패를 좌우하는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들은 선수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지만 그라운드에서 뛸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을 그라운드에서 뛰지 않는 또 다른 선수라는 의미로 ‘12번째 선수’라 부른다. 

오늘날 국가대표팀을 포함해 클럽팀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지간한 아마추어 팀들도 응원단(서포터즈)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통상 이들에게도 한둘의 라이벌은 있고, 이 둘의 한 판 승부는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경기와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하다.


축구의 기원을 언급하면서 이미 축구가 전쟁에서 유래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축구의 서포터 역시 전쟁의 산물이라는 상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부터 세계적인 축구강국들의 서포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9. 미국

앞서 소개한 스코틀랜드의 ‘타탄 아미(The Tartan Army)’처럼 서포터 이름에 군대라는 이름을 쓰는 나라가 하나 더 있다. 미국 대표팀의 서포터인 ‘샘스 아미(Sam’s Army)‘가 그것이다. ‘샘(Sam)’은 새무얼(Samuel)의 애칭으로 한국의 철수나 영희처럼 아주 흔한 이름이기 때문에 미국 또는 미국인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인다. 여기에 좀 더 강렬한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군대(Army)’라는 단어를 합성해 만든 애칭이다. 상대적으로 축구의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 축구는 찬밥신세인 것이 사실이나 점점 축구의 저변이 확산되면서 축구인구도 늘고 있는 추세다. ‘엉클 샘(Uncle Sam)’ 역시 미국을 지칭하는 일상의 용어지만여기엔 여기엔 이미지가 있다. 17세기 미국 군대에 고기를 납품했던 사무엘 윌슨을 모델로 만든 이미지가 19세기 영국으로 건너가 한 만화가에 의해 풍자적(존 다니엘은 염소수염을 추가해 좀 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했다.)으로 변형된 것이 ‘엉클 샘’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창작 의도를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이미지는 결정적으로 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면서 청년들의 군 입대를 독려하기 위해 만든 모병(募兵) 포스터에 손가락으로 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근엄한 모습으로 등장시켜 더욱 유명해졌다. 그리고 샘스 아미의 이름과 엠블럼(축구공 위에 별과 줄이 그려진 모자가 씌워져 있다.)은 이 ‘엉클 샘’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이다. 샘스 아미의 서포팅은 회원들에 대한 통제 없이 온라인(www.sams-army.com)을 통해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그룹별로 하기 때문에 구심저이 없고, 다소 산만하여 우리처럼 조직적인 것은 볼 수 없지만 참가하는 개개인의 메이크업은 볼만하다. 특히, 내브래스카 주에서 주로 활동하는 ‘아메리칸 아웃로(American Outlaw) 6)’와 함께 ‘캡틴 아메리카’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미국의 영웅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거나 얼굴 또는 온몸에 성조기를 그리는 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약 1백 여 명의 회원들이 이태원의 한 카페에 모여 친목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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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메리칸 아웃로(American Outlaws)는 네브래스카의 링컨시의 지역 서포터로 얼굴에 미국 국기를 그리고 응원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국가 대표팀 경기에선 샘스 아미와 떨어져 앉기도 한다. 굳이 둘을 구분하자면 샘스 아미가 전국구라면 아메리칸 아웃로는 지역구를 대표하는 서포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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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기를 들고 응원하는 미국의 서포터 ‘샘스 아미(Sam’s Army)’와 1차 세계대전 당시 군 입대를 독려하는 포스터에 그려진 ‘엉클 샘(Uncle Sam)’의 근엄한 모습. 성조기를 얼굴과 몸에 그리고 국기를 몸에 감은 채 응원하는 모습



10. 일본

일본의 서포터는 한·중·일 3국 가운데 가장 먼저 결성되었다. 이탈리아의 울트라와 구분해 붙인 ‘울트라 니폰(Ultra Nippon)’은 1992년 히로시마에서 열린 아시아컵대회에서 일본이 우승한 후 본격적으로 결성되었다. 해외에서 열리는 월드컵 본선 경기에 가장 많은 서포터를 보낼 수 있는 나라로 세계 최강 브라질 다음에 꼽힌다. 어떤 원정 경기든 일본의 서포터가 수적으로 밀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삼국 중 역사도 깊고 숫자(해외원정에 많은 관중석을 차지할 수 있음을 의미함.)도 많지만 울트라 니폰은 붉은악마나 치우미에 비해 조직력이나 서포팅의 다양함도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우선 그들은 회원제가 아니다. 국가 대항전 때마다 자발적으로 모여서 응원하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어서 다소 결속력이 느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서포팅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 2002년 보여준 다양한 응원가(붉은악마처럼 응원가를 창작하지 않고, 이미 유행된 곡에 가사만 붙여 부르는 정도다.)도 점점 그 숫자가 줄고 있는 추세다. 일본에선 이런 추세라면, '박수 세 번'에 '니폰'을 외치는 서포팅만 남을 것이라는 쓴 소리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아래 사진은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울트라 니폰의 서포팅인데 과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군대의 상징인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일부에서는 사무라이기라고도 부른다.)’ 를 몰래 숨겨 들여 와 서포팅 사이에 슬그머니 내걸기도 한다. 일본의 이런 행위는 이제 더욱 과감해져 선수들의 공식 유니폼7)으로도 제작해 올림픽에도 내보는 등 그 수위가 점점 높아만 가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 서포터의 편향된 성향은 많은 관중석을 점유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축구 팬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반감만 불러 일으켜 세계인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어째든 일본은 축구 실력이나 서포팅 면에서나 중국과 함께 우리의 라이벌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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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12년 런던올림픽에선 체조 선수들에게 욱일승천(旭日昇天)기를 모티브로 한 유니폼을 입히는 등 우경화 상징들을 노골적으로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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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의 대형 유니폼을 내걸고 응원하는 일본의 서포터 울트라 니폰(Ultra Nippon).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응원석에 슬그머니 내걸린 욱일승천(旭日昇天)기.



11.중국

중국의 서포터는 한·중·일 3국 가운데 가장 늦게 결성되었다. 지난 한일월드컵 개최를 불과 6개월을 앞둔 2001년 12월에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정몽준)과 붉은악마의 임원 3명을 초대한 가운데 전국에서 자생적으로 만든 크고 작은 14개의 서포터 조직을 하나로 모아 결성식을 마쳤다. 그들이 결성한 조직은 ‘치우미(球迷<구미>)’로 불리는데 ‘공에 미친 사람들’ 즉, ‘축구에 미친 사람들의 모임’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결성식에서 밝힌 포부 가운데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내년 대회에서 중국팀의 성적 8)을 어느 정도로 기대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응원한다면 16강도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며 선전(善戰)을 장담하는 한편,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숙박이나 교통 문제만 해결된다면 축구 팬 100만 명이 한국으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인터뷰(2001.12.28.일자 문화일보 사설에서 발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중국 서포터의 장점이자 힘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2013년 기준으로 13.6억 명의 중국 인구 가운데 치우미 회원은 무려 1억 명에 이른다. 이 정도면 201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인구(5.1천만 명)의 두 배나 되는 숫자다. 위의 인터뷰 내용은 전체 치우미 회원 중 1%만 보내겠다는 것이며 이도 한국에서 숙소와 교통편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자존심 상하지만 사실이다. 물론 전 인구의 70%가 서포터임을 자랑하는 터키도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 숫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1억 명 가운데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서포터의 숫자만 대략 7∼8천만 명 정도로 추산하니 중국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서포터'를 가진 나라임에 틀림없다. 이들의 서포팅은 숫자에 의존하는 인해(人海)전술을 구사하는 인민전쟁과 유사하며 이는 후발주자인 치우미의 가장 큰 무기이기도 하다. 붉은 색으로 가득한 스탠드에 대형 응원기와 국기도 내걸고 열광적인 응원과 특유의 함성 “짜이요(파이팅)”를 보내면 정말 위협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한국전에서 사용했던 꽹과리 9)도 동원하고, 황금색과 순백색의 용 인형까지 만들어 다양한 서포팅을 하고 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중국팀은 한국과 29번을 싸워 단 한 경기만 이겨 본 팀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언론으로부터 “공한증(恐韓症)에 시달린다.”는 표현까지 들어야 하는 국가 대표팀에게 치우미가 언젠가는 12번째 선수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비록 경기 성적은 미치지 못하지만 서포팅만큼은 붉은악마를 벤치마킹한 이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세계 정상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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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약 200개 가 조금 넘는 피파 회원국 가운데 중국팀의 랭킹은 대략 100위권에 있어 최다의 인적자원을 가진 현대축구의 발상지인 중국의 위상에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9) 사실 서포팅에 타악기 이상 가는 악기는 없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가장 적합한 악기는 북으로 사람의 심장소리와 닮아 선수나 서포터 또는 관중까지 사로잡을 수 있다. 북이 나와 동료의 마음을 하나로 잡아 준다면 꽹과리는 반대다. 이는 북에 비해 화려한 소리를 내어 축제나 잔치에 많이 동원되지만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어 이미 전쟁에선 우군이 아닌 적군의 심리를 분열시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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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유니폼을 입고, 붉은악마의 서포팅을 벤치마킹(출범 초창기)해 간혹 우리와 잘 구분되지 않는 중국의 서포터 치우미(球迷). 자국에서 벌어진 경기에선 대형 오성홍기를 내거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포터와 관중들이 함께 오성홍기를 인계하며 스탠드를 따라 돌리는 서포팅도 보여준다.



12. 대한민국 

'붉은 악마'는 1995년 PC통신(하이텔)을 기반으로 한 축구 동호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민국의 공식 서포터다. 붉은 악마란 이름은 1983년 멕시코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붉은 유니폼을 입고 4강에 오른 우리 팀을 외국 언론들이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부른 것을 다시 국내 언론사들이 ‘붉은 악마(red Devils)’로 표기했는데 이를 서포터의 애칭으로 사용한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붉은 악마(Red devils)’는 우리들에게는 물론 세계인들에게도 강동의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잠깐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조별 리그에서 3·4위전까지 치룬 7경기에 붉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이나 거리에서 응원한 인원은 대략 2,331만 명에 이르고, 한 경기당 평균 333만 명이나 응원에 참여한 것이다.(정태환<2002년>의 자료를 참조해 재작성한 것임.) 

이 숫자는 전체 국민의 절반이 기꺼이 붉은악마가 되었고, 매 경기마다 경상남도 도민 전체가 경기장을 찾고, 거리로 나선 셈이다. 이런 폭발적인 응원은 세계 그 어디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기록이다. 매번 본선 본선에 나가 단 1승도 하지 못하던 대표 팀의 선전에 전 세계가 놀랐고, 대형 국기나 치우천왕의 깃발을 앞세우고, 붉은 유니폼과 태극무늬로 통일한 붉은 악마들의 힘찬 응원가와 구호 그리고 세련된 서포팅에 세계는 전율했다. 태극전사들의 4강 신화는 붉은악마가 그 원천이었다. 이들의 서포팅 역시 당시의 대표팀처럼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 위에 거친 플레이로 무장한 잘 훈련된 전사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붉은 악마들은 경기 시작 한두 시간 전부터 응원을 시작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선 채로, 응원가를 부르고 박수와 함께 ‘대∼한민국’ 구호를 외치며 함성을 질렀다. 단 한 순간이라도 노래나, 구호, 함성이 끊기는 법은 없다. 붉은 악마는 대한민국을 하나로 만드는 구심점이 되어 대표팀의 승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비록 적이라도 페어플레이에 박수를 보내며 결과와 관계없이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무한의 신뢰와 격려를 보냈다. 당시 여러 외신에서 소개한 세계 축구 전문가들의 이야기는 종합해보면 다음의 두 가지였다. 그들은 먼저 이구동성으로 “한국 응원단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한국 축구의 4강 신화는 아마도 여기서(붉은악마와 거리응원) 나온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뭔가 큰일을 낼 것 같은 기대는 아쉽게도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졌지만 붉은악마와 거리응원의 저력은 우리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02년 월드컵의 붉은악마들의 서포팅. 숙적 일본과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내걸리는 대형 응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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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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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  12번째 선수들의 축구전쟁③


축구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축구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들로 한정되지 않고, 경기를 관람하는 스탠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경기장 밖에서도 벌어진다. 축구를 논할 때 서포터들의 집단응원은 빼놓을 수 없는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승부는 경기 성적에 반영되지 않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결정적인 호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승패와 직결되기도 하며 극단으로 흐를 경우, 오히려 이긴 쪽에 더 불리한 조치가 따르기도 한다.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간접적으로나마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물론이고, 심판들에게도 심리적인 영향을 미쳐 승패를 좌우하는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들은 선수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지만 그라운드에서 뛸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을 그라운드에서 뛰지 않는 또 다른 선수라는 의미로 ‘12번째 선수’라 부른다. 

오늘날 국가대표팀을 포함해 클럽팀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지간한 아마추어 팀들도 응원단(서포터즈)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통상 이들에게도 한둘의 라이벌은 있고, 이 둘의 한 판 승부는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경기와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하다.


축구의 기원을 언급하면서 이미 축구가 전쟁에서 유래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축구의 서포터 역시 전쟁의 산물이라는 상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부터 세계적인 축구강국들의 서포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➍ 독일

독일의 서포터는 ‘그라운드 후퍼스(Ground Hoopers)’로 불린다. 경기가 없을 때 그들의 모습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전차군단의 이미지 보다는 아기자기한 이미지와 매력이 돋보인다. 특히 경기 진행되는 기간 내내, 진이나 청색 재킷 위에 서포터로 참가한 대회의 상징이나 응원하는 팀의 엠블럼 배지 등을 매달아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자도 마찬가지이고, 배지가 많으면 하의까지도 배지로 도배하며 머플러 등과 함께 장식해 화려하면서도 독창적인 모습을 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후퍼스들은 다른 나라 보다 훨씬 이전부터 독일 대표팀과 함께 전 세계를 돌며 운명을 함께 해 왔다. 핵심 멤버들은 전 세계 200개가 넘는 경기장을 다녔다고 하니 그 열정은 알아 줘야 한다. 그래서 유로대회나 챔피언스리그처럼 유럽에서 경기가 열리면 각종 응원 도구로 무장한 채, 한 손에는 유레일 패스를 들고서 유럽 전역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은 이미 전 세계에 잘 알려진 이미지다. 그렇게 전 세계를 돌며 구한 배지들은 마치 세계를 정복하고 챙긴 전리품(souvenir)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그들의 외모는 대표팀의 경기가 없는 날에만 볼 수 있다.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관중석은 모두 흰색 유니폼을 입고 흑·적·황색의 삼색기를 흔들며 특유의 강함과 절도에 넘친 힘 있는 응원을 보여준다. 특히 서포터 전체가 선수들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서포팅은 호명되는 선수들의 사기를 백배 충전하고, 동시에 상대 팀으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사실 경기 전 선수를 소개하는 순서는 알렉산드로스나 나폴레옹 등 전쟁에 출정하는 전사들의 이름을 부르는 전쟁의 오랜 습관과도 유사하다.(스포츠와의 연관성은 찾을 수 없었지만 전쟁에선 이미 기원전의 출정 의식에서 행해졌다.) 


또하나 특징적인 것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내는 휘슬 소리는 동일 서포터만의 명품으로 유달리 커서 가끔 헷갈리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이런 조직적인 서포팅은 유소년 시절부터 ‘팬 프로젝트’라는 조직 속에서 건전하고 질서정연한 응원문화를 습득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고 있는데 응원도 조기 교육을 하는 나라는 아마 유일할 것이다.(물론 응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독일의 서포팅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보인 붉은악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독일 후퍼스들은 아래 마지막 사진처럼 2006년 독일월드컵을 기점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는 듯하다.

  

독일의 그라운드 후퍼스(Ground Hoopers)와 배지들로 가득한 복장 그리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독일의 국장인 독수리가 그려진 대형 응원기와 옷 색깔로 국기를 표현한 모습



➎ 이탈리아

잉글랜드가 별도의 응원 도구 없이 육성과 구호 그리고 박수만으로 응원한다면, 이탈리아는 반대로 화려하고도 열정적인 서포팅을 자랑한다. 서포터들의 화려한 분장은 기본이고, 대형 현수막, 조명탄, 연막탄, 깃발 등 다양한 보조기구들을 동원해 좀 더 자극적이고, 시각적인 서포팅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서포팅 방식과 유사하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탈리아 서포터는 ‘울트라(Ultra)’로 부르는데 여기엔 긴 스토리가 있다. 울트라는 밀라노를 연고로 하는 ‘AC 밀란’의 서포터를 중심으로 1968년에 조직되었다. 당시 AC밀란에는 ‘La Fossa dei Leoni'(이탈리아어로 ’세 마리 사자의 굴‘을 뜻함.)로 불리는 서포터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주로 좌파성향이 강한 젊은 노동자들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서포터도 비슷한 색깔과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AC밀란에는 극좌파 반(反)체제적 성향의 시위대를 별도로 갖고 있었고, 이 조직의 이름인 ‘울트라’를 서포터의 이름으로 채택한 것이다. 결국 울트라의 서포팅은 시위대의 모습과 닮아 있다. 통일된 복장(대표팀의 푸른 유니폼)을 착용하고, 북소리에 맞춰 구호를 외치며 응원기를 흔든다. 그리고 경기 중간에 중요한 순간에는 확성기나 마이크를 든 리더의 지휘로 연막이나 조명탄을 터뜨리고, 레이저 쇼와 같은 다양한 퍼포먼스를 선보여 극적인 효과를 증폭시킨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지나친 승부욕 때문에 쉬운 경기에서 지거나 조기에 탈락하는 경우 선수들에게는 대단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의 서포터 울트라(Ultra)들의 화려한 복장과 서포팅.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홈팀 독일과의 경기에 이겨 즐거워하는 로마의 시민들



➏ 스페인

'정열의 축구 왕국' 스페인의 서포터는 '피나스(penas)'라고 부른다. 스페인의 서포터는 국민성을 반영하듯이 열정적인 서포팅으로 유명한데 단체로 입장권을 예매하고 이동수단과 숙소를 준비하며 경기에서 보일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서포터로 유명하다. 


스페인에는 열광하는 서포터들이 즐겨 찾고, 모이는 집결지가 있는데 바로 ‘피나(pena)’로 불리는 바(bar)이다. 스페인 대부분의 도시에tj 쉽게 볼 수 있는 이 바는 펍(pub)과 유사한 보통의 주점인데 서포터들은 여기에 모여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며 새로운 퍼포먼스와 서포팅을 구상하기도 한다. 스페인 국민들에게 피나는 그냥 바가 아니라, 그야말로 ‘축구를 위한, 축구에 의한 축구인만의 바’인 셈이다. 따라서 스페인 서포터들에게 피나는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피나는 바의 이름에서 스페인 서포터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승격된 것이다. 국가대표팀의 경기나 엘 클라시코 등 주요 매치가 있는 날이면 전국의 피나에선 경기장을 찾지 못한 피나스들의 화려한 몸치장과 정열적인 응원 그리고 광적인 몸부림을 함께 볼 수 있다. 피나스들은 전통적으로 경기장에서 도화지와 머플러 등을 이용한 서포팅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스페인 서포터 피나스(Penas)의 응원 장면. 2012 유로 대회에서 우승한 스페인 국가대표의 카퍼레이드와 이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서포터들



➐ 네덜란드

잘 아는 바와 같이 네덜란드 축구팀의 공식 유니폼이나 응원단은 오렌지색이다. 전쟁 같은 축구 경기에서 오렌지색은 왠지 약할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여기에도 긴 역사와 이유가 숨어 있다. 

오렌지색이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상징색이 된 것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독립을 주도한 ‘오랑쥬-나소(Orange-Nassau)’ 지역의 영주였던 윌리엄(William I of Orange)은 오렌지색을 주로 사용하던 가문의 문장을 사용했고, 독립전쟁 후 1572년, 정식으로 국기에 오렌지색이 추가되면서 나라를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즉, 네덜란드인들에게 오렌지색은 마치 우리의 태극 문양처럼 민족의 독립을 의미하고 왕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매 월드컵의 다크호스(준우승만 세 번 했다.)인 네덜란드 오렌지군단의 서포터는 ‘오렌지 후터스(Orange Hooters)’라고 부른다. 


눈에 쉽게 띄는 색이라 관중석에서 보면 숫자에 민감해 많으면 시각적인 효과가 극대화되면서 위압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숫자가 적으면 존재감이 어필되지 못하는 불리함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전통의 색을 고수한다. 후터스는 튀는 색 말고도 독특한 서포팅으로 더 유명하다.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응원석에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고, 트럼펫이나 튜바 등 관악기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를 편성해 함께 응원한다. 특히, 경기가 시작되기 전이나 하프타임은 물론 경기가 끝난 후 경기장 밖에서까지 훌륭한 연주에 맞춰 힘찬 육성 응원을 선보인다. 그러나 간혹 축구 초보자들에게는 미국의 대형 레스토랑 체인점인 ‘후터스’와 이름이나 복장이 같아 혼돈을 주는 경우도 있다.


네덜란드 서포터‘오렌지 후터스(Orange Hooters)’의 응원 장면. 다른 서포터와는 달리 응원단에 북, 트럼펫, 튜바 등으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편성돼 있어‘연주하는 서포터’로도 유명하다.



➑ 브라질

브라질은 최다 월드컵 우승국으로 세계 최강이지만 응원에서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특히 국가대표 팀에 대한 열정은 세계 그 어떤 팀의 서포터들을 초월한다. 


브라질엔 4년 동안 뼈 빠지게 번 돈으로 대표팀과 함께 세계 각지로 응원을 다니는 ‘월드컵 순례자’들이 유난히 많다. 4년을 모았지만 부족한 예산 때문에 노숙도 불사하고, 아예 경기 입장권도 없이 무작정 날라 온 이들도 꽤나 많다. 한마디로 ‘축구에 죽고 사는 광팬’들이 브라질 서포터의 주축이니 그 자체로 세계 최강이다. 


또한 서포터의 화려한 외모 역시 세계 넘버원이다. 아래 사진에 보는 것처럼 화려한 색깔이 마치 카나리아 새를 닮았다 하여 ‘카나리아 군단’으로도 불린다. 브라질의 서포팅은 브리질의 축구 스타일을 많이 닮았다. 브라질의 서포팅을 보면, 유럽의 서포터들처럼 조직적이기 보다는 선수 개인의 기량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축구를 보는 듯하다. 브라질의 구호는 그저 ‘브라질!’, ‘브라질!’을 외치는 것이 전부고, 특별한 응원가는 없으며 스탠드에서 춤(삼바)을 추는 데 주력한다. 음악이 나오면 춤추기 바쁘고, 음악이 없으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브라질 대표팀의 가장 든든한 서포터는 브라질 팀을 좋아하는 세계의 축구 팬들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세계 최강의 브라질 축구를 보고 싶어 하는 팬들이 자기 나라의 대표팀과 적수만 아니면 브라질의 탈락을 절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팬들 가운데는 축구를 좋아하는 마니아 뿐 아니라, 대회의 흥행을 성공시켜야 하는 피파와 개최국의 국민을 포함해 세계적인 도박사들도 있고, 글로벌 스폰서들도 있으며 정치가, 예술가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세계의 극성 팬들의 염원 때문에라도 브라질은 매 월드컵 대회에서 4강에는 꼭 들어야 하는 것이다.

 

대형 국기를 펼쳐 선수들을 응원하는 브라질의 서포터 카나리아 군단과 새(카나리아)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응원 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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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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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 - 12번째 선수들의 축구전쟁 ②


축구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축구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들로 한정되지 않고, 경기를 관람하는 스탠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경기장 밖에서도 벌어진다. 축구를 논할 때 서포터들의 집단응원은 빼놓을 수 없는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승부는 경기 성적에 반영되지 않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결정적인 호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승패와 직결되기도 하며 극단으로 흐를 경우, 오히려 이긴 쪽에 더 불리한 조치가 따르기도 한다.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간접적으로나마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물론이고, 심판들에게도 심리적인 영향을 미쳐 승패를 좌우하는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들은 선수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지만 그라운드에서 뛸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을 그라운드에서 뛰지 않는 또 다른 선수라는 의미로 ‘12번째 선수’라 부른다. 

오늘날 국가대표팀을 포함해 클럽팀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지간한 아마추어 팀들도 응원단(서포터즈)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통상 이들에게도 한둘의 라이벌은 있고, 이 둘의 한 판 승부는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경기와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하다.


축구의 기원을 언급하면서 이미 축구가 전쟁에서 유래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축구의 서포터 역시 전쟁의 산물이라는 상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부터 세계적인 축구강국들의 서포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➊ 잉글랜드 

축구 종가 잉글랜드는 아주 매력적인 서포터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근대축구의 기틀을 잡고 처음 경기를 시작했을 당시 만해도 대부분의 관중들은 여유가 있는 고상한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경기장은 조용하고 품위 있는 사교장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축구 대중화와 함께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으로 확산되면서 전체 축구 인구가 늘어나자 경기에 뛰지 못하는 선수들과 애초부터 응원에만 관심 있던 계층들이 합세해 경기장은 관중들로 북적였고,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조직적인 응원이 시작됐다.

처음으로 응원가를 만들어 합창하면서 서포팅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 영국의 리버풀FC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이후로 관중들은 유니폼을 함께 입고, 스카프를 흔들거나 초대형 깃발로 응원석을 뒤덮는 응원을 보이기 시작했다.(민학수<2002>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임.)

당시 리버풀FC 3)의 서포터인 ‘더콥(The Kop)’은 같은 지역 출신의 세계적인 록 밴드 ‘비틀즈’의 노래들 중에서 선곡해 합창으로 들려줌으로써 선수들의 사기를 올리고 힘을 북돋아 주고자 했다. 물론 경기장에서 노래를 부른 일은 이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경기장 안에서 단체로 노래를 부른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콥은 ‘노래하는 서포터4)’라는 애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더콥의  잉글랜드는 별도의 응원 도구 없이 육성과 박수만으로 응원하는 전통이 생겼다. 그래서 1980년대부터 잉글랜드 전역에서 결성된 응원단 ‘풋볼 서포터스 페더레이션(Football Supporters’ Federation)’은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의 서포터에 비해 많은 치장을 하지 않으며 아무런 반주 없이 손장단에 맞춰 응원가를 합창하고, 힘찬 구호를 외치며 함성을 보내는 등 단조로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 종가의 명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응원을 보고 있으면 상대 팀과 선수들 그리고 응원단까지 압도해 버리는 카리스마와 힘이 느껴진다. 물론 상대 선수에게 보내는 야유도 당하는 입장에선 심각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에서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결승골5)은 서포터가 넣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이 응원가로 부르는 노래가 무려 1천곡이 넘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그들의 국가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God Save the Queen)’를 비롯해 비틀즈나 엘튼 존의 노래도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응원가는 잉글랜드 축구 선수들을 기리는 ‘월드 인 모션(World in Motion)’이나 한 때 영국 음반 차트 1위에 오른 ‘스리 라이언스 송(Three Lions’ song)’도 있다. 육성과 손이 전부인 그들의 서포팅에 중요한 것은 깃발이다. 아래 2006년 독일월드컵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잉글랜드의 관중석에는 다양한 국기가 내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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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리버풀FC는 최초의 조직적인 서포터, 축구장 난동과 두 번의 대형참사, 더비 등 잉글랜드 축구역사와 문화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4) 당시 러버풀FC의 서포터 더콥(the Kop)이 잘 부른 노래는 1963년에 발표된‘You'll never walk alone.’였는데 이유는 가사가 마치 더콥의 서포터 정신을 대변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더콥의 주제곡처럼 자주 애창되었다. 그리하여 안필드(Anfield)에 위치한 홈 경기장의 정문(상클리 게이트)에 그리고 1992년부터 클럽의 엠블럼에도 위의 문구를 새겨 넣었다.

5) 본선에서 만난 잉글랜드와의 첫 경기에서 파라과이는 전반 시작 3분 만에 중앙선을 조금 넘어선 지점에서 파울로 프리킥을 허용했다. 키커는 당시 주장이자 오른발 프리킥의 마술사 데이비드 베컴이었고, 그의 프리킥은 198cm의 장신 포드 피터 크라우치의 머리를 벗어났지만 뒤에서 달려들던 파라과이 주장(가마라가)의 머리에 맞고 골로 연결됐다. 결국 파라과이는 어이없는 실수를 만회하지 못하고 0-1로 패하고 말았다. 필자가 다시 봐도 베컴의 프리킥이 위협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스탠드의 대부분을 점유한 잉글랜드 서포터들의 함성과 야유 때문에 실점했다고 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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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국기를 내세워 열광적인 서포팅을 자랑하는

 ‘잉글랜드의 축구 서포터 연합(Football Supporters’ Federation)‘



➋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의 서포터는 독특하게도 서포터 이름에 잉글랜드와의 오랜 악연이 담겨져 있다. 서포터의 공식 명칭은 잉글랜드 군대를 무찔렀던 스코틀랜드의 자랑스러운 군대 ‘타탄아미(Tartan Army)’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지배를 치욕으로 생각하고, 잉글랜드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숙적 아일랜드와의 연합도 불사할 만큼 깊은 원한을 갖고 있다. 

서포터들의 복장은 대표팀의 컬러인 전통 체크무늬(tartan) 킬트(quilt)를 입고, 경기장에서 백파이프를 불며 성 안드레아(St. Andrea)의 십자가 깃발(스코틀랜드의 국기)을 흔들며 열성적인 응원을 펼친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소개한 셀틱FC와 영국 전체에서 가장 오래고, 거친 올드펌더비(Old Firm Derby)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주한 아일랜드인과의 심한 종교 갈등과 지역 경쟁 등 포함해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어 둘 사이의 경기는 매번 난동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철전지 원수인 이 두 팀이 어깨동무를 한 채 한 목소리로 응원하는 모습을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데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거나 그들의 숙적 잉글랜드 대표팀과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두 앙숙은 말 그대로 오랜 친구가 되기도 한다. 

물론 경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전의 경쟁 관계로 다시 돌아간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나라의 독립을 지켜낸 푸른 제복의 전사들이 응원하기 때문에 천하무적이 되기를 기원하는 것 같다. 참고로 필자가 아는 한, 세계 국가대표 팀의 서포터에 군대 이름을 붙인 사례는 스코틀랜드 말고도 한 팀이 더 있다. 이 사례는 뒤에서 자세히 소개하겠다.



전통의 체크무늬 킬트(quilt)를 입고 응원하는 스코틀랜드의 서포터 타탄아미(the Tartan Army)



➌ 아일랜드 

최근 아일랜드 대표팀은 2012년 유로대회에 이어 2013년 브라질월드컵 지역예선에서도 국민의 간절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물론, 죽음의 조에 편성된 탓도 있겠지만 1승도 하지 못하고 전패의 성적으로 무기력하게 탈락하고 만 것이다. 대표팀의 성적이 이런데 서포터가 힘이 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서포터(RISSC : the Republic of Ireland Soccer Supporters Club)들은 아무리 대표팀이 많은 스코어 차이로 지고 있을 때나 이미 탈락이 확정된 후 남은 경기를 치러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 자리를 뜨지 않고, 더 큰 목소리로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며 독특한 서포팅으로 선수들을 독려한다.

특히, 경기에 지고 있을 때 팬들이 선수들을 위로하기 위해 부르는 응원가는 아일랜드의 자존심을 상징한다. 이 노래는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의 설움을 달래고,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정신을 그리고 있으며 1840년대에 찾아온 대기근을 극복해가는 불굴의 의지 등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1870년대에 만든 이 곡(피터 세인트 존 작곡, 아덴라이의 평원<Fields of Athenry>)은 지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부터 아일랜드 팬들이 선수들에게 불러 주기 시작했는데 마치 우리의 ‘아리랑’과 유사한 곡으로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또한 아일랜드의 서포팅은 ‘포즈난(Poznań) 응원’으로 부르는 독특한 응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응원은 서포터들이 ‘경기장을 등지고 어깨동무를 한 채 펄쩍펄쩍 뛰면서 하는 응원’으로 폴란드의 포즈난을 연고로 하는 레흐포즈난(Lech Poznań) 팀의 서포터들이 가장 처음 시작한 것이 원조다. 

이후 셀틱FC의 서포터들이 따라 했고, 후일 국가대표 경기에서도 연출하면서 유럽과 세계에 전파되었다. 다소 의아한 것은 경기를 보지 않고 응원한다는 것은 팀의 승리를 확신하거나 예상되는 경우에나 가능한 얘기인데 본래 의도와 아일랜드 대표팀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서포터들은 경기 승부와 관계없이, 오히려 더 절망적인 상황이 전개될수록 포즈난 응원에 더 많은 힘을 준다. 그리하여 그라운드를 등진 채 어깨동무를 하고선 아덴라이 평원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대표팀과 선수들에게 무한의 신뢰와 사랑을 보내는 모습은 아일랜드 서포터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 최근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위업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내내 부진한 경기로 일관했던 우리 대표팀을 위해 붉은악마도 이 서포팅을 도입했는데 이를 계기로 ‘아시아의 아일랜드 서포터’에 비유되기도 한다.



녹색의 아일랜드 서포터(the Republic of Ireland Soccer Supporters Club / RISSC) 와 이들이 경기에 질 때면 어김없이 모두가 뒤로 돌아 어깨동무를 한 채로 뛰며 노래 부르는 ‘포즈난(Poznań) 응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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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 -12번째 선수들의 축구전쟁① 


축구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축구 전쟁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들로 한정되지 않고, 경기를 관람하는 스탠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경기장 밖에서도 벌어진다. 축구를 논할 때 서포터들의 집단응원은 빼놓을 수 없는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승부는 경기 성적에 반영되지 않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결정적인 호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승패와 직결되기도 하며 극단으로 흐를 경우, 오히려 이긴 쪽에 더 불리한 조치가 따르기도 한다.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간접적으로나마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물론이고, 심판들에게도 심리적인 영향을 미쳐 승패를 좌우하는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들은 선수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지만 그라운드에서 뛸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을 그라운드에서 뛰지 않는 또 다른 선수라는 의미로 ‘12번째 선수’라 부른다. 

오늘날 국가대표팀을 포함해 클럽팀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지간한 아마추어 팀들도 응원단(서포터즈)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통상 이들에게도 한둘의 라이벌은 있고, 이 둘의 한 판 승부는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경기와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하다.


축구의 역사 가운데 응원 문화는 비교적 초기부터 있어 왔으나 그 시작에 관하여는 유럽기원설 내지는 남미기원설 등 여러 주장이 있어 딱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조직적으로 응원하기 시작한 것은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잉글랜드가 아니라, 1950년 구 유고연방(현재의 크로아티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챔피언 결정전(하이두크 스플리트<Hajduk Split> vs FK 츠베르나 즈베즈다<Fudbalski Klub Crvena Zvezda>의 경기)에서 스플리트의 서포터인 토르치다(Torcida, 포르투갈어로 ‘전진’을 의미함.)들이 그저 관중석에 앉아 경기만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어나 횃불을 밝히고, 구호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경기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그 시초다. 유고의 한 경기장에서 시작된 새로운 관전 문화와 열혈 팬의 등장은 인근 국가를 거쳐 유럽 전역에 신선한 충격으로 전파되었고, 삽시간에 전 세계에 퍼져 오늘날의 다양한 각 국의 서포터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유럽(유고슬라비아)에 위치한 축구팀의 서포터가 포르투갈어 이름을 쓴다는 것이 왠지 수상하다. 특히, 둘 사이엔 연관이 되는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어서 그 일은 포기하려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한 책에서 실마리를 풀었다. 사실 같은 이름을 가진 서포터는 브라질에 더 많다. 토르치다는 ‘변경하다, 바꾸다, 빗나가게 하다.’는 의미의 포르투갈어 ‘torcer’에서 유래했는데 말 그대로 단순히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넘어 자기 팀에겐 열정적인 응원을, 상대에겐 거친 야유를 보내 양 팀의 경기력에 영향을 미쳐 유리한 방향으로 경기를 이끌고 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 우리가 서포터를 12번째 선수로 부르는 이유이자 배경이 된다. 책의 저자에 따르면 토르치다의 시초는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경기에 쓸 물건들을 사는 마을 주민들의 친목 모임이 생겨나면서 부터였는데 점차 조직화, 거대화, 정기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브라질 전역에 보편화되었다고 하고, 결정적으로 1950년 브라질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를 통해 유럽에 소개되어 급속히 전파된 것이라 한다.(이준석, 2011년) 정리하면 축구 서포팅의 역사는 브라질을 중심으로 한 남미에서 비롯해 유럽을 거쳐 세계로 전파되었고, 가장 현대적인 의미의 서포터는 구유고 연방이 발상지로 보면 틀림없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름 전쟁과 축구의 역사를 연구했고, 둘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을 주장하는 필자에게 다음에 소개할 그림과 사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각 각은 고대와 중세에 가장 인기 있었던 스포츠 경기의 한 장면들을 담았는데 축구로만 그 범위를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서포터의 기원은 앞서 언급한 그 정도가 아니라 상상하는 이상으로 오래되었고, 그 원천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영역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3세기에 그려진 중세 기사들의 토너먼트 장면으로 뒤에 보이는 귀부인들은 마상창시합에 빼놓을 수 없는 VIP 관중이자, 경기 후 우승지에 대한 시상자로 참석했는데 기사들의 결투를 가장 잘 관찰하고, 기사와 말의 거친 숨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최적의 관람석에 모셨다(사진출처 http://ko.wikipedia.org/ )

           

위의 그림들은 중세 기사들의 토너먼트 장면이다. 인류사 가운데 말이 등장한 것은 상당히 오래되었으나 서양 전쟁의 역사에서 말의 등장은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의 이야기로 동양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이다. 잠깐 과거의 전쟁양상을 대관(大觀)해 보면 고대에는 ‘중무장한 보병’(이를 호프라이트<Hoplite>라 함.)들에 의한 전투가 주였지만 중세에는 ‘말 탄 기사’들이 전장을 누볐다. 중세 봉건영주들에게는 보병에 비해 몇 십 배의 전투력을 가진 기사들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30kg이 넘는 전신 갑옷과 투구를 입어야 하는 기사와 그들의 다양한 전투 장비를 마련하고, 기사들을 태우고 전쟁터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말들을 준비하며 이를 관리하는 시종들에 이르기까지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은 너무나 막대1)하게 들었기 때문에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세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은 군사력의 사용 범위를 축소하는 이른바 ‘제한전쟁(Limited War)’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사들은 전투에서 비록 적이라도 가능한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생포해 포로로 삼고, 이후 협상에서 몸값을 받고 풀어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이런 전쟁양상과 관행으로부터 기사들의 스포츠인 ‘토너먼트(Tournament)’ 경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1) 기사들에게는 최소 세 마리의 말이 필요했는데 전쟁터까지 태워주는 말, 짐만 별도로 운반하는 말 그리고 전쟁터에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말이 별도로 필요했다. 기사들을 태우는 말은 최소 100kg이상의 기사를 태우고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건장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의 유럽에는 중세부터 기사들에게 말을 제공했던 도시들(안달루시아, 슈투트가르트 등)이 많았음은 물론, 이 도시들은 세계적인 명마들을 생산하는 상징들을 지명이나 문장에 활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세 유럽의 전 지역을 거의 미치게 할 정도로 인기 있었던 이 결투는 스포츠였지만 평시에 전시를 대비한 기사들의 훈련이기도 했다. 토너먼트에는 전신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두 기사가 말을 타고 긴 창(lance)으로 상대방을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가르는 일대일의 경기와 기사들이 집단으로 싸우되 말을 타고 하거나 땅에서 하는 경기로 구분해 진행되었다. 이를 상창시합 ‘쥬스팅(Jousting)’, ‘멜레(Melee)’ 그리고 ‘토니(Tourney)’라 불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경기들은 아무나 할 수 없고, 신분이 높은 기사들만이 참가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유하고, 평판이 있는 소수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알겠지만 중세 토너먼드를 소재로 한 역사화를 보면, 예외 없이 경기장 뒤편에 예외 없이 관중석에서 기사들의 결투를 지켜보며 손이나 손수건을 흔들고 심지어는 응원하는 기사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통상 스탠다드<standard> 보다는 작은 배너<banner>)을 흔들며 수다를 떠는 한 무리의 여자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귀족 또는 왕족의 부인들로 경기를 마치면 우승한 기사에게 화관(花冠)을 하사하는 시상자이며 기사들의 열렬한 팬이자 애인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중세 토너먼트에 출전한 기사들을 후원하거나 응원하는 귀족들과 귀부인 그리고 봉건영주들이 오늘날 서포터의 원조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서포터의 처음은 아니었다.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펼쳐진 검투경기(영화 글라디에이터의 한 장면)와 1872년 장 레옹 제롬이 그린 ‘내려진 엄지<Pollice Verso>’라는 그림으로 관중석에서 이들을 후원하고, 응원하는 관객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들은 생명을 걸고 전투에 참가한 전사들을 응원했던 오늘날 서포터들의 진정한 원조다.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schultz105/247 )

 

중세 기사들의 경기 보다 훨씬 이전부터 행해졌던 격렬한 스포츠 경기가 있었다. 위에 보는 바와 같이, 고대 로마에서 성행했던 검투사(gladiator, 글라디아토르) 2)들의 경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검투경기의 역사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나 그리스의 도시국가 에트루리아(Etruria)인들이 신에게 바치던 의식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고대 이탈리아(파에스툼) 무덤의 벽화와 역사가 리비우스의 서술을 근거로 볼 때, 최초의 시작은 기원전 4세기 정도로 추정되며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경기는 기원전 264년에 열린 추모경기였다. 기원전 2세기 원형투기장이 건설되면서 검투경기는 더욱 성행했다. 대부분 죽은 고인(故人)을 추모하기 위해 개최된 이 경기는 점차 추도 목적 보다는 단순 볼거리로 전락해 결국 위정자들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는 일환으로 선심성 이벤트처럼 애용되었다. 그래서 역대 로마 황제들은 로마 시민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선대의 황제들과 경쟁적으로 검투경기에 집착했다. 그리하여 기록에 의하면 1년 중 무려 100일 동안, 하루 5만에서 6만 명이 관람하는 경기를 축제처럼 개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병행해 황제들은 검투경기의 다양한 재미와 짜릿함을 극대화하는 종목을 개발했고, 최신 시설을 갖춘 경기장 건설에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네로에 이어 9대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재위기간 : 69∼79년)는 폭군정치를 일소(一掃)하기 위해 네로가 시민들에게 빼앗은 재물로 지은 ‘황금의 궁전’ 자리에 세운 ‘콜로세움(Colosseum)’도 정치적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계획된 조치였다. 또한 후대에 들어 40도가 넘는 여름에도 경기 관전을 위해 경기장에 그늘을 제공하고, 바람과 비를 막기 위해 ‘관람석(카베아<cavea>)’ 위에 ‘차양 막(벨라리움<velarium>)’을 설치하기도 했다. 뿐 만 아니라, 시 외곽에서 수도교를 이용해 물을 끌어 들여 배를 띄우고, 최대 2만 명이 참가하는 ‘모의해전(나우마키아<naumachia>)’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경기의 재미와 신비스러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하에 도르레를 설치해 투사와 맹수들이 경기장으로 직접 올라올 수 있는 오늘날의 ‘엘리베이터(히포지움<hypogeum>)’도 28개나 만들었다. 경기장 바닥은 희생자들의 피를 흡수하기 위해 모래를 깔았고, 이 모래는 매일 새 것으로 치환해 세심한 부분까지 최상의 상태르 유지하려 했다. 참고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기장은 물론이고, 영국에 있는 멋진 공연장(웸블리 아레나)의 이름에도 꼭 들어가는 ‘아레나(arena)’는 고대의 검투사들의 경기장에서 유래한 것이며 당시 경기장 바닥에 깔았던 모래를 일컫는 라틴어 ‘하레나(harena)’가 변형된 것이기도 하다.


2) 일반적으로 고대 로마의 검투사를 뜻하는‘글라디아토르(gladiator)’라는 이름은 제 2차 포에니 전쟁 중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이 히스파니아를 점령했을 때, 당시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검인 글라디우스(Gladius, 히스패닉 스워드라고도 함.)를 로마 군대의 검으로 채택한 것에서 유래했다. 다시 말해, 글라디아토르는 ‘글라디우스를 쓰는 사람’을 뜻한다. 60cm 남짓한 양날의 단검인 글라디우스는 로마 군단과 함께 제국 건설의 선봉에 섰고, 그 결과 전쟁의 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살상기록을 가진 무기로 평가된다.


검투경기가 있을 때면 로마의 시민들은 무료로 초대되어 최신식 시설과 편의를 제공받는 가운데 황제가 공짜로 나눠주는 빵과 포도주를 먹으며 피의 향연을 맘껏 즐겼다. 로마 최대의 이벤트를 준비한 황제들은 경기장에 자주 그 모습을 나타내며 자신이 ‘로마 최고의 정점’에 있음을 만인에게 널리 알리고, 국민들과 접촉하면서 직접 의사를 들고 소통하는 등 검투경기를 정치적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그러나 콜로세움 경기는 단순히 오락 기능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당시 스타 검투사들은 로마의 주적(主敵)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사용하고, 복장도 그들과 유사하게 입고 경기에 참가해 독특한 이미지를 연출했다. 물론 여기엔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이는 적국의 유명한 장수와의 결투를 통해 로마전쟁을 재현하고, 로마신화를 상기시켜 로마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시키려 했던 것이다. 대부분 전쟁의 포로나 노예, 범죄자 및 일부 자유민으로 구성된 검투사들은 결투에 나가 전적을 쌓으면서 인기를 얻었고, 시민들에 의해 칭송되었으며 이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따리서 이들은 경기에 임해 죽지 않기를 희망하는 여러 사람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울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평시에 전시를 대비했던 올림픽 제전에서도 도시국가를 대표해 출전한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했던 서포터들도 포함하는 것이 맞겠으나 상대적으로 다른 두 사례에 비해 규모도 작고, 조직적이지는 않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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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발전은 더비에서 비롯되었다.


⑨. 좀 더 특별했던 우리의 더비

우리나라 축구 역사에는 북한과 체제 경쟁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그리고 사기 증진을 위해 군에서 했던 독특한 축구 더비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965년 잉글랜드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한 수 위인 북한과의 경기를 피하기 위해 고의로 지역 예선에 불참해 세계축구협회에 벌금을 물기도 했었다. 1966년 월드컵 본선에 오른 북한이 강호 이탈리아를 꺾으면서 8강에 진출해 포르투갈과도 대등한 경기로 석패하자 당시 북한과 치열한 이념적 체제경쟁 중에 있던 대한민국 정부로써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특단의 대책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월드컵이 끝난 이듬해 곧바로 당시 중앙정보부장(김형욱)의 주도하에 ‘양지(陽地)축구단’을 창설했다. 이 이름은 중앙정보부(현재의 국가정보원)의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는 슬로건에서 따 온 것이다. 선수영입은 군에 입대했거나 군 입대를 앞둔 연령대의 축구선수들을 모아 국영기업체 중견 간부 수준의 봉급도 지급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등 105일간의 전지훈련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은 1.21사태로 불리는 ‘청와대 기습사건’을 필두로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그리고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 굵직한 도발행위로 촉발된 긴장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1969년에는 북한과 획기적인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축구에 대한 관심도 떨어졌다. 아울러 팀 창단에서부터 후원을 책임졌던 중앙정보부장의 실각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포로축구팀 양지’는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고, 1970년에 이르러 해체되고 말았다. 비록 북한 축구팀과의 맞대결은 없었지만 대한민국 축구사(史) 가운데 가장 현대적인 의미의 축구클럽이었던 양지축구단은 분명 한국 축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군에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침체된 군의 사기를 증진할 목적으로 육·해·공군과 해병대가 자체적으로 스포츠를 적극 장려해 스포츠는 물론 군의 활성화에 한 몫을 담당했었다. 군에서 만든 축구팀은 고유의 이름이 있었는데 육군은 웅비(雄飛), 해군은 해병대의 축구팀을 모태로 한 해룡(海龍), 공군은 성무(星武)라는 이름의 축구팀을 운영해 치열한 맞수 삼파전을 가졌고, 국군체육부대의 창설과 함께 웅비(雄飛)팀으로 통합되었다가 상무(尙武)팀으로 개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부나 군의 사례 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관학교에는 입학생 중에서 선발한 진짜 아마츄어 선수들로 구성된 축구팀과 그들의 정기 대항전이 있었다. 매년 9월 셋째 주에 열리는 연고전 또는 고연전에 버금가는 호국 간성(干城, 방패와 성이라는 뜻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군대나 인물을 이르는 말)들의 스포츠 제전인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매년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10월 2일부터 3일간 축구와 럭비를 주축으로 육상경기와 각종 상무행사(태권도 시범, 민속놀이, 모형비행기 날리기 등)들이 열렸다. 원래 국군의 생일은 군별로 달랐다. 그러나 1956년 국무회의에서 한국전쟁 당시 3사단 23연대가 강원도 양양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돌파해 북진(北進)한 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고 국방부 주관으로 대내외에 군의 위용을 과시하고, 국가 안전보장과 군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들을 포상하며 군인들의 사기진작과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시가행진, 군악연주회 등을 포함한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 3군사관학교체육대회는 역시 국군의 날 행사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는데 1954년에 첫 대회가 있었으니 그 역사가 꽤 깊은 편이었다.



3사단 23연대가 강원도 양양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장면과 이를 재현하는 행사 포스터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연고전이나 고연전과는 달리 순수 아마추어들이다.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에서 축구는 잘 하면 좋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특기생을 선발하지 않는다. 때문에 입학 조건에 학창시절 축구 경력은 중요하지 않았으며 장교가 될 수 있는 자질만이 중요했다. 그래서 입학 자격을 갖춘 생도들 가운데 축구에 소질이 있는 소수를 선발해 훈련시켰기 때문에 경기수준은 형편없이 낮았다. 조기교육은 근처에 가보지도 못했고, 오로지 동네축구와 학교에서 반 대항 축구가 전부였던 18∼20세의 늦깎이들을 모아 단기 속성으로 양산하다 보니 그 실력이래야 보잘 것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도 기술은 형편없이 모자란 대신 힘과 체력 그리고 정신력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는다. 부족한 경기력을 무형의 전력으로 보완해 간신히 고등학교 팀들과 대적할 수준(물론 평균 이상은 된다.)은 된다. 이런 이유로 축구더비는 경기 보다는 생도들의 젊음과 패기 그리고 절도 있는 응원전이나 매스게임이 훨씬 볼만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고작 두 경기(다른 사관학교 팀과의 경기 수)를 위해 일 년 동안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오히려 생존을 위한 인내의 시간이라 해야 좀 더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을 보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축구에 소질이 있지만 힘든 선수생도를 의도적으로 기피했던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여서 “선수생도에 선발되지만 않으면 오복 중 하나”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다. 일 년을 준비해 단 3일에 보이는 축제에 기껏 해봐야 구력 1∼3년 정도 된 선수들이 학업과 훈련을 병행하며 간신히 습득한 설익은 기술이 전부였기 때문에 오히려 경기 내내 일사불란하게 펼쳐지는 응원전이 더 볼 만한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공 다루는 솜씨가 서툴고, 그들의 기계적인 몸짓이 왠지 거부감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단순히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서툰 몸짓은 단순한 흥미와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뭔가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흥분’과 함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이제 역사 속의 일이 되어 버렸다. 오랜 전통과 제도를 없애기는 쉬워도 다시 부활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관생도가 되어 4년간 축구를 했던 한 사람으로 정말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 더 이상의 언급과 개인적인 생각과 주장을 추가하지는 않겠지만 아래 미국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저 이 책을 읽은 독자들만이라도 한번쯤 관심을 가져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면 그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3군사관학교체육대회 장면(선수입장, 축구, 육·해·공사 통합 매스게임)과 시상식 장면(1999년)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사관생도들의 경기는 있지만 ‘3군사관학교체육대회’와 같은 종합 제전은 없고, 종목별 경기는 매년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규모의 축제 형태로 개최한다. 그 대표적인 경기가 바로 미 육군사관학교(West Point)와 해군사관학교(Annapolis) 간의 축구경기인 “Army-Navy Football Game”가 그것이다. 1890년에 시작된 이 축제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매년 두 학교의 중앙에 위치한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다. 우리처럼 화려한 매스게임은 없지만 양측 사관생도들의 입장과 퍼레이드, 밴드연주, 고공낙하 시범, 공군 전투기와 육군항공(헬기) 편대의 축하비행 등 다양한 식전행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대통령이나 부통령이 귀빈들과 함께 자리하고, 주최 학교장의 안내를 받아 시축으로 경기를 시작한다. 경기 모습은 매년 공영방송에서 생방송으로 미국 전역에 중계해 모든 국민들이 함께 관람하고, 즐기며 응원하는 국가 축제다. 2011년에 열린 제112회 대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그들의 축제를 한 번이라도 본다면, 미국의 세계 초강대국 위상을 이끈 군을 널리 홍보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기꺼이 생명과 젊음을 바쳐 헌신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군에 대한 국가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그리고 무한 존경을 보내는 행사라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런 축제를 무려 114년 동안 지속해 왔음은 놀라움과 부러움 그 자체다. 아래 사진들은 2010년과 2011년의 대회 장면을 담은 것들이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그들의 제전은 중요하고,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30년 전, 지금은 없어진 성동원두1) (여기는 경평전·연고전·한일전 등 우리나라의 더비경기가 열렸던 축구 역사의 산실이다.)에서 미드필더로 뛰었던 필자에겐 너무나도 질투 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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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동원두(城東原頭)

말 그대로 ‘서울 도성 동쪽의 넓은 벌판’이라는 의미로 서울시 중구 을지로 7가 일대에 위치한 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의 별칭이다. 경평전이나 연보전 등 축구 더비매치를 비롯해 수많은 국내·국제 경기가 벌어졌던, 우리나라 현대 스포츠의 메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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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Army Black Knights                                                           Navy Midshipmen


ⓐ 2010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11회 대회의 개회식 장면과 사관학교의 상징 

ⓑ 2011년 제112회 대회의 시축을 위해 입장하는 오바마 대통령이 해사교장의 안내를 받으며 입장하는 장면 ⓒ 2011년 경기와 승리한 해사생도들의 세리모니  

   ※ 출처 : http://blog.daum.net/westpointkpc/73


이제 우리의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동서고금에 축구를 통해 부국강병을 도모(로마의 하르파스툼이나 중국의 츄슈는 모두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군인들을 훈련시켰던 정식 훈련종목이었다.)하고, 전쟁에 대비했던 상무(尙武)정신’ 만큼은 잊지 말아야 한다. 다행히 환갑이 훨씬 넘은 육·해·공군 사관학교 출신 할아버지 선수들이 모여 40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서울 종로구 소재의 지하의 허름한 전통 한식당에 모여 여전히 당시의 경기를 회상하며 3군사관학교 OB체육대회를 하고 있다. 물론 이 식당의 메뉴는 삼사체전은 물론 국가대표 팀의 경기와 세계 최강 팀의 경기도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건강 등의 사유로 선수들이 줄고 있어 여간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소개했던 ‘연고전 또는 고연전’, ‘경평전’ 그리고 ‘3군사관학교체육대회’까지 우리나라의 축구 더비는 우리 민족의 발자취 그 자체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가운데 연고전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이미 사라졌지만 최근 경평전을 다시 재개할 움직임이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경색된 남북관계 탓에 어려움도 있겠지만 서울시장이 평양시에 경평전 개최를 공식 제안하면 논의가 본격화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전의 이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축구는 정치, 외교, 전쟁 등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기 때문에 축구의 위력을 이용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본다. 만약 경평전이 재개되면 우리나라의 축구 더비 가운데 외롭게 남은 사관생도들의 제전도 가까운 미래에 부활돼 함께 푸른 잔디밭을 달리는 꿈도 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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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태승 2014.01.21 13:34 신고

    오랫만에 축구 얘기 잘 봤습니다.
    늘 그렇지만 스포츠 이야기에 대한 배경이 풍부하신 데에 놀랍습니다.
    앞으로도 쭉~ 연재 부탁드려요, 스포츠둥지님 그리고 윤동일님.
    감기 조심하시고요.
    그럼...

    • 잘 읽어주셨다니 스포츠둥지담당자의 입꼬리가 쭉쭉! 광대 승천! 입니다. 윤동일 박사님께도 메시지 전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발전은 더비에서 비롯되었다 (3)


3. 우리나라의 만족정신을 담은 축구 라이벌전


우리도 세계적인 더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근대적인 축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1882년의 일이다.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했던 영국의 해군군함 ‘플라잉 피시’호(號)의 승무원들이 배의 갑판에서 그리고 연안의 부두에서 공을 찬 것이 대한민국 축구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본격적인 축구의 시작은 영국처럼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적인 학교가 건립되면서 ‘학교체육’의 일부로 뿌리를 내렸다. 


1900년대에 들어, 프랑스 교사인 마델에 의해 학교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후 ‘배재학당’(1902년)을 필두로 대부분의 학교에 정식으로 보급되었고, 우리나라의 근대 스포츠 형성에 있어 메카 역할을 했던 ‘황실기독청년회’(1904년, 현재의 YMCA 전신), 그리고 ‘대한체육구락부’(1905년) 등에 축구부가 생겼으며 황실기독청년회와 대한체육구락부 간에 열린 경기가 가장 최초의 공식 경기로 기록 되었다. 과거 중국에서 전파된 축국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의 근대 축구는 영국으로부터 전파된 이래 민족의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다른 나라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국기(國技)가 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자 축구는 무서운 속도로 대중 속에 스며들어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의 의지를 대변했다. 이 때 생긴 유명한 더비가 있다. 1927년 전조선축구대회 준결승에서 만난 사학의 명문인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학교)의 대항전은 양교 이름의 앞 자를 따서 연보전<延普戰> 또는 보연전<普延戰>이라 불렀고, 1929년부터 경성(서울)과 평양의 시(市) 대항 정기전이 ‘경평전(京平戰)’이란 이름으로 생기면서 축구 더비가 전 조선을 흥분시켰다.


연보전 또는 보연전(이하 연보전)은 학교의 자존심을 걸고, 최선을 다해 승부를 가늠하는 차원을 넘어 조국을 잃은 젊은 청년들의 울분을 달래고, 자유를 꿈꾸는 장소였고, 경평전은 온 국민을 하나로 뭉쳐 일제의 탄압에 강력 저항하자는 의지를 다지는 공공연한 집회가 되었다. 당시 대회를 주최하고 후원했던 조선일보사의 부사장은 개회사에서 "축구경기는 부지중에 민중적 차원으로 화합하자는 데에 그 취지가 있어... 그저 축구 한 경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량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기회로 승화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이 내용을 신문 사설(1929.10.8.일자 조선일보 사설)에 싣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경평전은 일제의 억압 하에 있는 민족의 대동단결과 항일(抗日)정신을 고취하는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양 팀은 창단 당시 썼던 ‘축구단’이란 이름도 버리고, 대신에 ‘군(軍)’을 붙여 ‘전경성군(全京城軍)’, ‘전평양군(全平壤軍)’으로 불렀는데 이는 비록 스포츠 경기였지만 일제와 싸우는 민족의 군대란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만으로도 일본에겐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터인데 여기에 설상가상의 사건이 터지면서 일본은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에서 열린 ‘제1회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와 ‘제8회 명치신궁경기대회’에서 경성축구단이 유수의 일본 팀들을 물리치며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것도 결승에서는 무려 다섯 골 차로 압승을 거두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인들은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견제와 통제를 점점 그 수위를 높이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축구는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두 가지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다.


하나는 동적이고 폭발적인 축구의 저변 확대를 막기 위해 보다 정적인 야구를 널리 보급하고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이 조치로 순식간에 야구팀이 급증했는데 1940년까지 두 종목의 고교팀 숫자를 비교해 보면, 뒤늦게 들여 온 야구팀이 20개 학교에서 채택한 반면, 축구팀은 불과 12개교에 그치고 있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 정책의 치밀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당시 파급된 폭발적인 축구의 인기를 잠재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1934년에 들어서자 일본은 ‘축구 통제령(蹴球 統制令)’이라는 최고의 강수를 꺼냈다. 


중세 영국이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훈련(활쏘기)을 열심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축구에 빠져 이를 게을리 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축구 금지령을 내린 것은 이해되나 일반적으로 식민지 국민들이 나라를 찾는 일보다 노는 일(축구)에 빠진다는데 이를 막을 이유는 없기 때문에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의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그 무엇이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하여튼 축구금지령을 관철시키려는 일본은 조만식 선생을 주축으로 한 민족지도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법 제정은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우리의 경성-평양 간 축구더비는 더욱 활성화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던 1942년 미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코너에 몰린 일본은 축구를 포함해 ‘문화말살정책’을 관철시킴으로써 모든 축구경기가 금지되었다.


이 두 더비매치가 재개된 것은 해방된 이듬해(1946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였다. 이후 연보전 혹은 보연전은 연고전 또는 고연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으나 경평전은 38선으로 남북 통행이 금지되면서 더 이상 경기를 존속하지 못하다가 1990년과 2002년에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경기’라는 이름으로 이벤트성의 경기만 세 차례 치렀다. 






경평축구대항전 시작 전, 양 팀 선수들의 입장 장면(1933년, 사진출처 : 대한축구협회)



1929년에 시작된 경평전은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대회 개시 2년 동안 양 팀은 승패를 주고받으며 맞수로 팽팽한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3회 대회에서는 두 팀의 열기가 너무나 고조되면서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빈번하게 충돌했고, 급기야는 응원단까지 가세해 대규모 싸움으로 번지자 대회는 이내 중단되고 말았다. 3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대회는 봄과 가을에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정기전을 개최하기로 정하고 1933년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불거진 판정 시비로 1935년에 다시 막을 내리고, 대신 서울-평양-함흥을 주축으로 한 ‘도시대항축구대회’가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1942년 모든 축구가 금지된 이래로 대회가 해방을 맞이해 다시 재개되었지만 한국 축구 최초의 더비 매치로 손색없는 경평전의 운명은 아쉽게도 여기까지였다. 당시 경기는 3일간 3차전으로 진행했는데 2차전 도중 관중들의 충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결국 경찰이 공포탄을 쏴 경기를 해산시킴으로써 3차전은 열리지도 못한 채 경평전은 막을 내렸다. 축구가 금지된 기간 중 일본은 또 다른 꼼수를 냈는데, 우수한 우리 선수들로 약한 일본 팀을 보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축구협회는 일장기를 달기 보다는 오히려 선수단을 해체하는 쪽으로 결정해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고, 선수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만, 한국 축구의 산증인, 김용식 선수만이 손기정 선수와 함께 베를린 올림픽에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바 있다. 



(A)                            (B)                          (C)                       (D)         


서울에 연고한 팀 가운데 경성축구단 창설(1933) 이전부터 활동했던 조선축구단(1918년 창단)이 있었다. 1920년대 조선축구단은 경성축구단과 맞수로 활약했는데 이 둘의 대결 구도는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출신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보전의 대결로 이어졌다. 그 이유는 팀의 선수 구성에 있었다. 조선축구단은 보성전문 출신의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구성한 반면, 경성축구단은 연희전문 출신의 선수들이 주축이었다. 유니폼도 조선축구단은 적색(칼라가 없었던 시기라 흑색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과 백색의 세로 줄무늬를 이은 유니폼을 착용했고, 경성축구단은 진홍색 바탕에 승리의 상징인 흰색 V자를 새겨 넣었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 양교의 유니폼에 고스란히 남아 후배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해방이후 본격적인 라이벌로 더비를 벌였던 두 성인축구팀, 가장 왼쪽이 보성전문학교 출신 선수를 추축으로 구성된 조선축구단(A)이고, 두 번째가 연희전문학교 출신선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경성축구단(B)이다. 이들의 더비는 역사와 전통이 깊은 사학의 명문들의 정기전으로 이어졌고, 유니폼도 양교에서 그대로 계승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려대학교는 적‧백색의 줄무늬 유니폼(C)을 입고 있으며 연세대학교는 가슴에 'V'자를 학교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Y'자로로 바꿔 새겼지만 전체 디자인은 예나 다름이 없다. 흑백 사진과 칼라사진을 비교해 보면 80∼90년 전에 입었던 유니폼은 디자인이나 모양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흑백사진은 구분되지 않으나 심지어 색깔도 유사하고, 이 상징 색으로 양교의 이미지도 구분되며 응원단도 사진처럼 적(赤)과 청(淸)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사진(D)엔 왼쪽이 전통의 붉은 색을 입은 고려대학교이고, 오른 쪽은 푸른색을 갖춰 입은 연세대학교의 응원단이다.


그밖에도 많은 스토리가 있으나 중요한 사건 위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벌어진 한국전쟁은 축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54년 전후(戰後) 첫 출전인 스위스 월드컵은 그야말로 고난 그 자체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일제가 우리의 땅에 들어 올 수 없다”는 엄명(嚴命)에 따라, 일본과의 경기는 어웨이(Away) 경기만으로 치르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대회의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여행사 실수로 모두가 함께 출발하지 못하고 개회식 다음날 경기가 있는 주전선수들이 먼저 가고, 나머지선수들은 2일이 지난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마저도 영국인 부부가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면 첫 경기는 치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경기결과는 참담했지만 전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참가했던 것이었기에 스위스 국민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세계에 한국을 알리고 전쟁으로 지친 국민들의 희망이 되었다. 일제의 탄압과 전쟁을 거친 한국 축구는 전통적으로 기술 보다는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을 무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1956년과 1960년에 열린 제 1회·2회 아시안컵대회에서 2연패하며 짧은 시간에 아시아 맹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세계무대에서는 1983년 세계청소년대회에서 첫 4강을 달성했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대표팀이 4위를 차지했으며 여자는 20세 이하 선수들이 세계 3위를 달성하고, 17세 이하 선수들은 축구 역사상 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상의 자리에 섰다. 그리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선 숙적 일본을 이기며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아시안게임 우승(1960년) 세계청소년대회 4강(1983년) 월드컵 4강(2002년) U-17여자월드컵 우승(2010년)



이런 위업엔 앞서 언급한 연보전이나 경평전의 더비매치가 그 밑거름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100년 축구 역사 가운데 기술적 성장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했겠지만 정신력은 더욱 중요했음을 강조하고 싶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우리는 축구를 통해 일 년에 딱 한 번, 일제의 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끼고, 미래의 희망을 보았다. 이것이 일본과의 축구전쟁에 임하는 자세였으며 불리한 신체조건과 열악한 저변 그리고 모자란 경기력과 경험을 극복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리 과장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우리 축구의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져 온 국민을 한 마음, 한 뜻으로 묶어주는 사회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해도 지나침은 없다. 민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 한 축구는 한국사의 개회기에 태동하여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민족대통합을 이끌었고, 분단 이후에는 전후 폐허 속에서 국가를 재건(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함께 ‘박스컵대회’는 고도성장을 의미하는 아이콘이었다.)하는 상징으로 바쁜 국민들의 심신을 위로하는 한 축을 담당했으며 북한의 해상도발을 격퇴하며 월드컵 4강의 문턱을 넘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의 위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축구가 우리 민족에게는 단순한 운동경기의 의미를 뛰어 넘어 민족정서의 한 부분(이종영, 1997)이 되었으며 축구가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열광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적으로 강렬한 민족주의를 상징(원영신, 2002)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축구의 민족 상징성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 사진 출처: 한국축구 100년사(대한축구협회,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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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발전은 더비에서 비롯되었다 (3)- 총성 없는 전쟁, 축구 라이벌전


1. 총성 없는 전쟁, 축구 라이벌전(3)

오늘날 유명한 세계적인 더비(derby)의 시작은 19세기 중반 영국의 작은 도시 더비(Derby)에서 기독교 사순절 기간에 성베드로(St Peters) 팀과 올세인트(All Saints) 팀이 격렬한 축구경기를 벌인 데서 유래됐다. 앞서 언급한 7개의 더비를 차례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④잉글랜드의 레즈더비(Reds Derby)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팀으로 불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Manchester United Football Club, MUFC, 1878년 창단)와 리버풀 FC(Liverpool Football Club, 1892년 창단)의 라이벌전으로 두 팀 모두 붉은 유니폼을 입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항구도시로 번영을 누렸던 리버풀은 공업도시인 맨체스터의 상품이 시장에 나가는 길목이었다. 그런데 1894년 맨체스터 운하가 개통되면서 리버풀은 큰 타격을 입었고, 급기야는 항구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가뜩이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도시라서 사이가 나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두 지역 간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점차 리버풀의 경기력이 떨어지면서 맨체스터에 대한 감정은 나빠졌고, 이런 리버풀의 반응이해가 되지 않는 맨체스터의 적대감은 더욱 심화되어 더비 매치에서 분풀이 했다.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 간의 더비가 더 흥행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레즈 더비는 그 인기가 떨어지는 느낌이지만 다른 팀과는 달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때마다 평균 이상의 무혼을 발휘하는 리버풀 덕분에 여전히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의 처절한 싸움은 중세 왕위쟁탈 전쟁에 비유돼 ‘붉은 장미전쟁’으로도 불린다. 



⑤이탈리아의 밀란더비(Milan Derby)

 


밀라노를 연고지로 하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더비를 일컬어 ‘밀란 더비(Milan Derby)’라 하는데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의 꼭대기에 성모 마리아상이 생긴 후부터는 이 더비를 ‘마도니아 더비(Derby della Madonnia)’라고도 부른다. 밀란더비는 밀라노를 연고로 하는 AC 밀란(Associazione Calcio Milan, 1899년 창단)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Football Club Internazionale Milano, 1908년 창단, 줄여서 ‘인터밀란’이라함.)의 라이벌전을 말한다. 이들의 더비 역시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1899년에 창성된 밀란 풋볼-크리켓 클럽으로 불리는 스포츠 클럽이 시초였고 같은 해 제노아, 토리노 등 북부에만 집중되었던 당시 분위기를 일소하며 AC 밀란이 창단되었다. 창단 후 팀은 세 차례나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탁월한 성적을 냈고,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팀의 성격상 당시 밀라노 상류층 인사들과 이탈리아와 영국 출신의 선수들이 구단을 장악하면서 반감이 고조되었고, 급기야는 1908년에 들어서 스위스 등 타국 출신의 선수들을 주축으로 하는 팀이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데 이 팀이 선수 제한에 반발하여 국제적인 팀이라는 의미로 ‘인테르 나치오날레 밀라노’라 불리는 인터 밀란(밀란이란 지극히 영국 영어식 표현으로 거부감이 많았다.)이다. 이때부터 밀라노의 부유층을 중심으로 조직된 AC밀란과 노동자와 상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인테르 나치오날레 밀라노(이하 인터밀란)의 관계는 스페인의 엘 클라시코처럼 상반된 성격을 가진 두 팀 간의 더비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도 훌리건들의 활동이 만만치 않은데 앞서 소개한 다른 지역의 더비와는 달리 충돌이 그리 잦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재미있는 것은 각 팀의 엠블렘과 얽힌 양 팀 서포더즈들의 대형 응원기다. 두 팀의 홈 경기장은 산시로에 위치한 쥬세페 메아차 경기장인데 공동으로 나눠 쓰고 있고, 스타디움도 남북으로 구분해 남쪽에는 AC 밀란이 북쪽에는 인터밀란의 서포터가 사용하고 있다. 더비가 있는 날이면 관중석에는 어김없이 아래 대형 응원기들이 자리한다. ‘악마’를 의미하는 붉은 ‘디아블로(Diavolo)’와 ‘푸른색의 큰 뱀(풀뱀을 의미하는 ’il Biscione‘ 또는 큰 뱀을 의미하는 ’Serpente’가 그것이다. 그 옆에는 뱀이 붉은 악마의 목을 조르거나 반대로 뱀의 목을 조르는 다소 유치하고 원색적인 포스터를 그려 넣어 응원에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이 두 팀이 악마와 뱀을 팀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스탠드에 내 결린 붉은 악마가 그려진 AC밀란의 응원기와 푸른색의 큰 뱀을 그려 넣은 인터밀란의 응원기 그리고 각 팀의 캐릭터를 이용한 응원 포스터.



⑥ †아르헨티나의 수페르클라시코(El Super Clasico)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고지로 하는 두 팀이 있는데 하나는 누네스(Nuñez) 지역의 리베르플라테(Club Atlético River Plate, 1901년)와 보카(La Boca) 지역의 보카주니어스(Club Atlético Boca Juniors, 1905년 창단)의 경기로 남미에서는 최고의 라이벌전으로 평가된다. 이 더비는 전통적으로 보카는 노동자들이 주축이고, 리베르는 중산층 이상 계층이 중심이어서 보카의 노동자와 리베르의 중산층이 대립한 더비이다. 두 클럽의 팬을 합치면 아르헨티나 축구팬의 무려 73%를 차지해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고 중요한 더비 중 하나로 꼽힌다. 그리하여 세계 최고의 더비 엘클라시코를 능가한다는 의미로 슈퍼클라시코라는 이름이 붙었다. 


특히 경기장 양쪽을 가득 메운 두 팀의 ‘인차(hinchadas : 팬)’들은 돼지와 닭을 끌고 나와 서로를 경멸하는 노래를 부르며 상대를 놀린다. 리베르에선 그들보다 가난한 보카의 인차들이 늘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하여 ‘돼지(los puercos)’라 부르고, 반대로 보카에선 리베르 인차들이 겁쟁이라는 의미의 ‘닭(gallinas)’에 비유해 놀려댄다. 그래서 두 팀의 더비매치가 있는 날이면 경기장 주변은 온통 돼지와 닭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상대에 대한 비방은 화려한 불꽃, 꽃가루, 깃발, 휴지폭탄 퍼포먼스 등으로 이어져 경기 분위기를 고고조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이런 열정적인 인차들의 격렬한 응원은 종종 폭력 사태와 대규모 사고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1968년에 일어난 사고는 단연 기억될 만하다. 이날도 어김없이 두 팀의 경기가 있은 후, 양 팀의 서포터 사이에 생긴 사소한 충돌이 있었는데 이것이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경기장의 스탠드가 무너지는 바람에 무려 74명이 사망하고 15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2004년, 영국의 신문 옵서버는 수페르클라시코를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50가지 스포츠 이벤트" 중 첫 번째로 꼽으며 오히려 스코틀랜드의 올드펌더비 보다도 격렬한 경기로 평가(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더비가 있는 날이면 올드 펌은 초등학교 공차기가 된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하기도 한다.



⑦ ‡대한민국의 슈퍼매치(Super Match) 

 

 

피파에서 선정한 세계의 더비매치에는 우리나라 K-리그의 맞수인 서울 FC(Football Club Seoul, 1983년 창단)와 수원 삼성 블루윙즈(Suwon Samsung Bluewings, 1995년 창단)의 라이법전도 포함돼 있다. 서울(1983년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으로 창단해 1991년 LG 치타스를 거쳐 2004년 FC서울로 변경했다.)의 전신인 ‘안양 LG 치타스’의 경기를 포함하면 1996년에 시작한 늦깎이 더비로 백년이 훌쩍 넘는 유럽의 더비에 비해 역사는 일천하지만 두 팀의 경쟁만큼은 볼만하다. 안양 LG 치타스가 2004년 서울특별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FC 서울로 개칭해  두 구단의 라이벌 매치가 시작되었다. 두 팀의 매치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기면서 경쟁은 점차 심화되었고, 더욱더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2008년도에 들어서며 언론서부터 ‘슈퍼매치(Super Match)’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후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주도하에 서울과 수원의 더비를 정식으로 슈퍼매치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면서 정착, 확산되었다. 


이 더비 역시 다른 사례와 마찬가지로 별명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서울과 수원이 분리돼 있지만 수도권 내에 있고, 지하철 1호선 구간 내에 있어서 ‘수도권 더비’ 또는 ‘지하철 1호선 더비’라고도 하는데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많은 이름이다.



이상에서 소개한 더비들 말고도 세계에는 볼만한 더비들은 많이 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더비(레알마드리드 vs AT마드리드), 잉글랜드의 맨체스터더비(맨체스터 유나이티드 vs 맨체스터 시티)나 북런던더비(아스널 vs 토트넘), 서런던더비(첼시 vs 풀럼), 이탈리아의 로마더비(AS로마 vs SS라치오), 독일의 레비아더비(보루시아 도르트문트 vs 샬케04), 네덜란드의 데 클라지커르 더비(아약스 vs 페예노르트), 터키의 이스탄불더비(페네르바체 vs 갈라타사라이)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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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학수 (한체대 언론정보연구소장)

 

요즘 모임에 가면 말띠해라 그런지 참석자들이 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댄다. 새해 운수를 말과 연관시켜 스피드가 뛰어나고 추진력이 좋은 말처럼 사업도 죽죽 뻗어나갔으면 한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인간과 친숙한 동물인 말이 인간의 손짓과 발짓을 잘 이해하듯이 인간관계도 잘 풀려나갔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나온다. 

 

말 이야기 중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역시 명마에 대한 것일 것이다. 동양의 전설적인 한혈마(汗血馬)와 말의 역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적토마(赤兎馬)는 명마중의 명마로 꼽힌다. 천리마가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자신의 온 에너지를 다 쏟아서 달리기 때문에 모세혈관이 열리면서 땀샘에 피가 섞이게 되어 땀이 흐를 때 핏빛을 띄게 되는데, 피땀을 흘린다는 의미로 천리마를 한혈마로 부르게 됐다는 설이 있다. 중국 한나라 무제는 한혈마를 얻기 위해 7만 명의 목숨을 희생하는 큰 대가를 지불하고 손에 넣었다는 속설도 알려졌다. 적토마는 삼국지에 나오는 명마로 조조가 관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조조가 관우에게 주었다는 적토마는 여포의 것이라고 흔히 말하기도 한다. 초나라 항우의 오추마는 주인의 죽음을 예견하고 오강에 스스로 뛰어들어 충성과 의리를 지켰다는 명마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도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에 흰 말이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영험한 명마의 모습이 그려져 일찍이 명마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은 북유럽과 그리스 신화 등에 많은 명마가 등장해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리스 로마시대에 신을 위한 제례의식의 하나로 전차경주를 열고 제후가 죽을 때 말로 하여금 상여를 끌게 하는 것도 말이 인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동물이라는 의미가 반영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서양의 대표적인 명마로는 세계 최초의 정복자였던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애마 부케팔로스로 꼽힌다. 부케팔로스는 인도원정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목숨을 구했다고 전해졌다. 알렉산더 대왕은 부케팔로스를 길들일 때, “그림자야...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그림자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며, 매우 광폭하여 전장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는 의미로써 알렉산더 대왕은 이 말을 타고 전장에서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명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스포츠로 잘 구현된 것이 경마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7세기에 열린 그리스 올림픽에서 4필의 말이 끄는 전차경주와 기수가 안장을 얹지 않은 채 말등에 올라타고 달리는 경주가 벌어진 것이 경마의 시초로 알려졌다. 영화 ‘벤허’에서는 전차경주에 열광하던 로마인들의 모습이 잘 묘사됐다. 승마술이 발달한 중국 페르시아 아라비아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조직화된 경마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과 같은 근대적 형태의 경마는 12세기 영국에서 출범했다. 1174년 영국 런던의 스미스 필드에서 금요일마다 열린 경마에서 직업기수들이 구매자들에게 말의 속력을 과시하기 위해 경주를 벌였으며 사자왕 리처드 시대에는 기사들이 기수로 참가하여 3마일을 가장 빠른 속력으로 달린 기사에게 40파운드의 상금을 주었는데 이것이 아마 최초의 경마상금이라고 한다. 지금의 경마의 출발점으로 인정되고 있는 영국의 더비는 1780년 5월4일 처음 열렸는데 개최자인 더비 백작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마는 숱한 스포츠 용어들을 낳았다. 커리어(Career)’라는 단어는 원래 프랑스에서 유래한 말(言)로서 말의 가장 빠른 걸음, 즉, 말의 질주를 의미하는 동시에 경주로를 뜻했다. ‘give and take(타협, 협조)’ 역시 경마용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서민들이 경주마의 경매 가격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숙어라고 한다. 경주, 토너먼트 등에서 ‘출발점(처음)부터 결승선(끝)까지’를 의미하는 ‘wire to wire'가 유래되었고, 'point-to-point'는 경마의 ‘크로스컨트리’를 뜻하는 단어로 통한다. ‘wire-to-wire'은 골프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한다는 용어로도 자주 쓰인다. 라이벌전 등을 가리키는 ‘더비’라는 용어도 경마에서 처음 나왔으며 각종 스포츠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쓰이는 흔한 용어가 된 ‘트리플크라운(triple crown)'의 유래 역시 경마에서 처음 사용됐다.

 

올 8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The Jockey(기수)’라는 제목의 멀티미디어형 내러티브기사를 보도해 큰 인기를 끌었다. ‘The Jockey’는 북미 최고의 경마선수로 꼽히는 러셀 베이즈의 삶을 다루었다. 러셀 베이즈는 지난 1월 25일 전 세계 경마 선수 중 최초로 5만 회 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경마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The Jockey’는 그의 삶을 밀도 있게 다뤄내는 동시에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없었던 경마의 이면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승률 24%의 경이적인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한 베이즈에 대한 배팅은 세계 최고의 투자 귀재 워렌 버핏에게 배팅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다는 얘기이다.

이 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경마에서 겜블러들이 말하는 진부한 어록 하나가 있다. “같은 말을 타고 같은 코스를 달릴 수 있지만 결과는 항상 다른게 경마이다”.  사람들은 삶의 경주로에서 성공하기 위해 질주하지만 제각기 결과는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경마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의미이다.

 

2014년 갑오년 청말띠 해를 맞아 말처럼 힘차고 활력 있게 뻗어나가는 한국 스포츠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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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 축구의 발전은 더비에서 비롯되었다 (2)


2. 총성 없는 전쟁, 축구 라이벌전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더비(derby)의 시작은 19세기 중반 영국의 작은 도시 더비(Derby)에서 기독교 사순절 기간에 성베드로(St Peters) 팀과 올세인트(All Saints) 팀이 격렬한 축구경기를 벌인 데서 유래됐다. 앞서 언급한 7개의 더비를 차례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①스페인의 엘 클라시코(El Clásico) 


스페인 명문구단으로 카스티야를 대표하는 레알 마드리드 CF(Real Madrid Club de Fútbol, 1902년 창단)와 FC 바르셀로나(Futbol Club Barcelona, 1899년 창단)의 경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더비 중의 더비이다. ‘고전의 승부’라는 더비 이름에 걸맞게 11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1902년 스페인 국왕컵대회에서 만나 첫 경기를 가진 이래 2012년까지 220회 이상의 맞대결에서 승부를 다퉜다. 양 팀의 로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왕 알폰소 13세가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신의 왕관(문양)과 호칭(‘레알’은 영어로 ‘royal’ 즉, 왕이 인정한 팀을 의미함.)을 하사할 정도로 레알 마드리드는 왕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바르셀로나는 사정이 달랐다. FC바르셀로나의 회장은 카탈루냐 출신의 좌익 성향 정치인으로 반란까지 일으켰던 프랑코의 정적이었기 때문에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바르셀로나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그들의 언어도 쓰지 못하는 상황까지 몰렸는데, 한 때 팀 이름도 카스티야식으로 강제 개칭해야만 했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 팀의 경쟁은 팀의 색깔, 선수 구성, 구단 경영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상반된 성격을 보였다. 왕실의 팀, 레알은 막강한 중동의 오일달러를 기반으로 호나우두, 베컴, 호날두로 이어지는 톱 플레이어들을 영입해 평균 연봉이 세계 1위인 ‘우주 방위군’ 클럽이 되었다. 반면, 바르샤(Barca : 바르셀로나의 애칭)는 레알처럼 스타를 영입하는 것이 아니라 리오넬 메시처럼 유소년을 키워 스타로 만드는 시스템을 갖고 있으며 팬 17만 명 모두가 주주인 ‘시민 구단’으로 광고도 받지 않는 진정한 스포츠클럽임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외부 스폰서십을 받아 달라졌지만 적어도 2006년까지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운영되는 클럽이었다. 이 두 구단은 최근 포브스에서 실시한 세계적인 스포츠 클럽의 평가 1위와 3위를 차지한 바 있다. 잘 아는 맨유는 오랜 1위 자리를 내주고 2위로 밀려 났다.



②스코틀랜드의 올드펌더비(Old Firm Derby)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Glasgow)를 연고로 하는 셀틱FC(Celtic Football Club) 와 레인저스FC(Rangers Football Club) 간의 라이벌전이다. 올드 펌(Old Firm)이란 ‘오랜 친구’란 의미이지만 두 팀의 경기는 절대 친구 같지 않다. 레인저스는 스코틀랜드 북부 고산지대에 사는 소년들이 당시 글래스고우에 유명한 럭비 팀의 이름을 따서 1870년대에 만든 팀이지만 셀틱은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공장 노동자(특히, 조선업)들이 1887년에 만든 팀이다. 뭔가 이 두 팀은 탄생부터가 심상치 않다. 모든 것이 생소한 이주민들에게 셀틱은 유일한 희망이자 자랑거리로 모든 아일랜드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반면 땅주인 스코틀랜드인들은 이주민들이 자기 땅에서 사는 것도 배가 아픈데 축구로 기고만장해지는 모습을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다며 레인저스를 적극 지지하면서 아일랜드 대 스코틀랜드의 대결 구도는 형성되었다. 여기에 종교적 갈등이 둘 사이의 경쟁을 더욱 부추겼는데, 셀틱 서포터들은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레인저스의 서포터들은 스코틀랜드계 개신교 신자들이 대부분이어서 이들의 충돌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셀틱 서포터들은 경기 때마다


 아일랜드의 국기를 흔들지만 반대로 레인저스 서포터들은 영국의 국기를 흔들어 댄다. 이런 서로의 반감 때문에 매 경기마다 선수는 물론이고 서포터즈의 충돌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스코틀랜드의 자랑이다. 이 두 팀이 거둔 성적은 프리미어리그 우승 97회, 컵 우승 68회, 리그 컵 우승 41회로 ‘물반 고기반(실제 두 팀이 우승 아니면 준우승을 번갈아 하는 경우가 많았다.)’으로 부를만하다. 이들의 더비는 스코틀랜드에서 프리미어리그가 시작된 것이 1888년이니 아마도 여기서 소개한 더비 중 가장 오랜 더비로 생각된다. 무려 125년 동안 400회가 넘는 더비를 해 왔다니 놀랍기만 하다. 헌데 최근 무슨 일인지 두 팀의 경기를 볼 수 없다. 알고 보니, 레인저스가 사기를 당해 지난 2012년 6월, 프리미어리그에서 퇴출당해 그동안 두 팀의 더비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때 당한 사기로 영국 국세청이 레인저스의 세금 채납액을 회수하기 위해 대물변제 조치를 취하면서 해단 절차에 들어갔고, 14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스코틀랜드의 최고 명문 축구 클럽 레인저스 FC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셀틱의 팬들 중 일부는 레인저스를 원숭이에 비유하는데 부르고, 레인저스가 강등된 것을 'Monkeys Gone', 레인저스가 없는 SPL을 가리켜 'No More Monkeys'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행히 새로운 레인저스가 4부 리그에서 뛰고는 있지만 이 팀이 연속 승격을 한다고 해도 2016-17 시즌이 되어서야 프리미어리그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벌써부터 올드펌더비가 그리워지려 한다.



③머지사이드더비(Merseyside Derby)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의 리버풀을 연고지로 한 리버풀 FC(Liverpool Football Club, 1892년 창단)와 에버튼 FC(Everton Football Club, 1878년 창단)의 경기로 1892년 처음 시작한 두 팀의 더비는 잉글랜드에서는 가장 오랜 더비이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격렬한 경기를 자랑한다. 두 팀의 만남은 좀 특별하다. 1892년 에버튼이 땅주인과의 마찰로 지금의 리버풀 소재의 구디슨 파크로 홈구장을 옮겼고, 이어서 같은 연고지(안필드)에 리버풀이 창단해 자리를 잡으면서 두 팀의 더비는 시작됐다. 이 더비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가운데 가장 거친 경기로 유명하다. 특히, 가장 많은 퇴장 기록은 그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1992년 잉글랜드 프로축구가 EPL로 재탄생한 이후 총 31차례 격돌한 두 팀의 더비 매치에서 무려 16명이 퇴장 당한 기록은 단연 톱이다. 실제 이 두 팀의 경기 사진들을 살펴보면, 다른 더비에 비해 선수들이 엉켜있거나 경고 또는 퇴장 카드를 받는 장면이 유독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래 중앙의 사진은 제라드가 악동 시절에 퇴장당하는 모습(제라드는 선수 기간 중, 두 번의 퇴장 당했는데 이 사진은 1999년으로 추정함.)이다. 또 서포터즈의 반응도 유별났는데 에버튼의 한 선수가 특점에 성공한 후, 리버풀의 서포터즈 앞에서 멋진 세리모니를 했다가 피자와 오물을 뒤집어 쓴 사례도 있었다. 이 거친 더비의 별명에는 특이한 것이 하나 있다. 팬들 가운데는 이 두 팀 모두를 지지하는 가족 서포터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Friendly Derby’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아래 오른쪽 사진은 에버튼 서포터의 한 청년이 리버풀을 응원하는 노인을 부축(An Evertonian helos a Kopite down the stairs.)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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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 축구의 발전은 더비에서 비롯되었다 (1)


1. 세계의 라이벌전

제목에서 더비와 라이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사실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원을 찾아 봤는데 원래의 의미는 약간 차이가 있다. 더비(derby)는 같은 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두 팀의 라이벌 경기를 의미하는데 잉글랜드 더비셔(Derbyshire) 주의 도시 더비(Derby)에서 유래해 특별히 축구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다. 



더비란 본래의 의미대로 ‘같은 지역의 연고팀들 사이의 경기’만을 지칭하는 것이 옳겠으나, 점차 그 의미가 확장되어 같은 지역은 아니더라도 '치열한 라이벌(rival) 관계'를 뜻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축구 강국들의 매치는 물론이고,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두고 오랜 숙적인 한국과 일본의 한일전도 넓게 보면 더비 중 하나다. 그런가 하면 한 나라 안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팀들 사이의 관계를 특별히 ‘내셔널 더비(National Derby)’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라이벌(Rival)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경쟁자”를 의미한다. 라이벌의 어원은 라틴어로 강을 의미하는 ‘rivus’에서 파생된 ‘rivalis’가 "강에서 서로 마주보고 낚시하는 경쟁“관계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아래 삽화나 사진에 보는 것처럼 "하나 밖에 없는 물건을 두고 싸우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확장되어 활용되고 있다. 더비든 라이벌이든, 생태학에서는 ‘천적(天敵)’ 또는 우리말에는 ‘맞수(맞手)’라는 아주 감칠 맛 나는 표현과 더욱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최근 피파(FIFA)가 선정한 세계적인 더비는 모두 7개가 있다.



지난 남아공 월드컵의 우승국인 스페인에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프리메라리가의 최대 라이벌 팀인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CF 간의 ①엘 클라시코(El Clásico), 축구의 종주국 잉글랜드에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서로 붉은 져지를 입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 FC의 ②레즈더비(Reds Derby)와 리버풀 FC와 에버턴 FC의 ③머지사이드더비(Merseyside Derby), 스코틀랜드에는 셀틱과 레인저스의 ④올드펌더비(Derby)가 볼만하다. 이탈리아에는 세리에 A에서 밀라노를 연고지로 하는 맞수로 AC밀란과 인터밀란이 벌이는 ⑤밀란더비(Milan Derby)가 가장 유명하고, 아르헨티나에서는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고지로 하는 보카주니어스(Boca Juniors)와 리버플레이트(River Plate)의 경기를 ⑥‘수페르 클라시코 (El Super Clasico)’라고 부른다. 또한 피파는 세계의 더비 중 하나로 우리나라의 K-리그 클래식의 더비도 소개하고 있는데 FC 서울(전신 안양 LG 치타스)과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라이벌전인 ⑦‘슈퍼매치(Super Match)’가 그것이다. 물론 이상 소개한 것 말고도 더비는 많다. 강 건너편에서 물고기를 낚는 경쟁에 있어 서로는 상대에게 적이지만 존재의 이유이자 스승이며 동반자이다. 고 최동원 선수와 선동렬 선수는 승부에선 적이었지만 서로 넘어서고자 했던 목표 그 자체로 긍정적인 자극과 무한도전의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리하여 선수 시절 내내 건전한 승부와 무한경쟁의 맞수가 되었으며 만년 2인자였던 일본은 우리나라를 따라 잡기 위해 절치부심한 끝에 오늘날 그 염원을 달성했고, 중국은 아직 멀리 뒤쳐져 있지만 언제 그 벽을 넘어올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구소련의 생물학자 가우스(Gause)는 짚신벌레와 같은 원생동물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실험을 통해 상당히 유의미한 결론을 얻었다. 이것이 1934년에 발표된 가우스의 법칙(Gause’s Rule)이다. 한 시험관에는 같은 종의 원생동물을, 다른 시험관에는 서로 다른 종의 원생동물을 각각 두 마리씩 넣고 제한된 먹이만을 주고 변화를 관찰했다. 첫 번째 같은 종의 개체는 시험관의 제한된 공간과 먹이를 두고 다투다 모두 죽고 말았다. 반면 서로 다른 개체들은 시험관에서 제한된 공간과 음식을 적당하게 나누어 먹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실험은 생명체의 ‘경쟁의 배타적 원리’를 설명한 것이지만 경쟁이 치열한 관계를 다루는 영역에 유익한 통찰을 준다. 왠지 라이벌, 경쟁자, 맞수, 천적이 없다면 ‘톰이 없는 제리’처럼 힘이 빠질 것 같다. 싱싱한 회감을 얻기 위해 물고기들이 들어 있는 수족관에 상어는 수족관 전체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적당한 긴장감을 유발시켜 이전의 분위기를 일소하고, 새로운 활력을 준다. 사실 스포츠에서 더비나 라이벌의 개념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전쟁에서는 ‘적(敵)’을 맞수로 인식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게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있었기에 그를 넘어서기 위해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늘 두려운 적이면서 존재의 이유였던 다리우스가 부하들의 손에 허무하게 죽자 위대한 왕은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수 없었는지 모른다. 영국의 웰링턴은 나폴레옹과의 경쟁에 모든 것을 바친 후, 전쟁터를 떠나 그저 쓸쓸한 나날을 보냈으며 프러시아의 노장(老將) 블루헤르는 네 번의 종군(從軍)으로 칠순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부상당한 노구를 이끌고 말 등에 올랐고, 그것을 이룬 후에는 조국 프러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마도 숙적(宿敵) 나폴레옹이 없는 세상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심한 좌절과 회한을 주지만 고난과 역경 그리고 맞수는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이자 생존과 번영의 터전이 된다. 라이벌이 없는 것 보다는 있는 쪽의 미래가 더 밝다. 

여기서 소개한 나라들은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축구를 시작한 이래, 더비를 통해 축구를 발전시켰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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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축구이야기

축구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일까?


축구의 기원 ⑥ : 축구의 기원설그 논란의 끝


그동안 동서양 축구의 역사를 장황하게 더듬어 본 것은 현대의 축구가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이해하자는 측면도 있지만 축구라는 스포츠가 무엇 때문에 기원하여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되었는지를 보려 했던 이유도 있었다결론부터 말하면동양이든 서양이든 이미 고대부터 축구의 교육적 가치를 인식하고이를 군사훈련용으로 고안해 발전시켰으며 널리 대중화 시켰다는 사실이다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경기 모습으로만 보면 츄슈가 서양의 축구에 비해 현대의 축구와 유사한 경기로 보이는데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해 그토록 오래됐다면 왜 현대의 축구로 발전하지 못한 것일까또 오늘날 영국으로부터 이탈리아프랑스 등 역사가 오랜 국가들이 간혹 예선전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축구 강대국으로 최소한 한두 번의 세계대회 우승경력은 있기 마련인데 왜 중국만은 성적이 별로인가 하는 점이다거기에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긴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 처음 츄슈를 시작한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FIFA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기도 함)이다전국책(戰國策)이나 사기(史記)에 의하면당시 츄슈가 가장 번성했던 임치(臨淄)에는 약 7만 호의 주택이 있었는데 여기 사는 주민들은 부유하기도 했지만 신체도 건장하여 음악을 포함해 다양한 문화활동을 영위했는데 스포츠로는 축국을 특히 즐겨 했다고 적고 있다츄슈는 춘추전국시대에 시작해 한나라와 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송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우리나라에 처음 츄슈가 전해진 것도 당나라 시대로 보고 있어 위의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츄슈의 출현 시기를 좀 더 살펴보자기원전 403년부터 진()이 통일을 달성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일컫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이 시기에 특히 강성했던 연<<<<<<<>의 7개 나라를 일컬어 전국7<>이라 함.)’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제한된 공간에 너무 많은 국가들이 공존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국가의 생존을 위해 강한 힘이 필요했다춘추시대와는 달리 전쟁에 지면 한 나라가 소멸해 버리는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상황에서 나라의 생존과 번영은 곧 전쟁에서의 승패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은 곧 모든 국가들의 이상이자 모토가 되었다이처럼 철저한 약육강식의 시기에 강인한 체력과 신체를 단련하고고도의 정신력을 함양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는 덕목이었다이런 필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츄슈였다따라서 츄슈의 경기방식이나 규칙은 그리스나 로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다른 점이 있다면츄슈에서는 손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고골대에 공을 넣는 득점방식을 채택한 것인데 이로 인해 경기규칙이 다소 구체적이었다는 점은 서양의 그것과 대별되었다츄슈의 폭발력은 곧 대중 속에 강한 중독성을 가진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었고급기야는 황실에 까지 보급돼 전성기를 누리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국기(國技)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츄슈의 위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패러다임이 있는데 시대의 특별한 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츄슈도 이런 사상적 조류에 영향을 받았다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유가(儒家)사상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인()과 예()를 숭상하고겸허·온순·선량한 감정을 중시하며 위계질서와 중용을 강조한다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유교적 관점에서는 고대 사회의 야만스러운 풍속을 정리하고사회의 보편적 질서를 구현하는 일면이 있었다이런 유교의 사상적 특성에 격렬하고모험적이며 승리를 위해 피터지게 경쟁하는 원초적인 츄슈 본래의 성격은 부합되지 않았다이런 사상적 불일치는 결국 군자가 용기만 있고의리가 없으면 어지럽다.”는 기조를 낳았고결국 츄슈 본래의 모습도 변형시키기에 충분했다유교의 영향으로 츄슈는 더 이상 격렬한 경쟁을 강조하지 않으며 점차 예의와 수양을 위해 우아하고품위 있는 경기로 바뀌었다우스갯소리지만중국의 유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일면을 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828(추정더운 여름에 미국인 선교사가 고종황제를 초청하여 처음으로 테니스 종목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하였다한참 경기를 참관하던 고종황제가 대뜸 염천에 땀을 흘리면서 저런 일을 어찌 귀빈들에게 시키려 하는가빨리 하인들을 시켜서 하도록 하라!”며 호통을 쳤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또 다른 원인도 있다츄슈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인 당송의 시대에는 이를 군사훈련으로 삼은 것은 물론이고 통치자의 관심도 높아서 경기가 있을 때마다 황제가 직접 관람할 정도였다위에서 이렇게 좋아하니 아래에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그리하여 츄슈는 전국 어디서나 시간만 나면 즐겨하는 국기(國技)가 되었다그러나 당송에 이어서 등장한 원()의 시대에는 양상이 달랐다유목생활을 했던 그들은 대부분을 말 위에서 지내 차이로 인해 그리고 건국 당시부터 한족(漢族)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츄슈 금지를 법으로 정하기에 이르러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오락성과 방탕함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사실 몽골은 말을 타고 하는 구기로 오늘날의 폴로(Polo)와 유사한 격렬한 기마격구(騎馬擊毬)를 즐겨 했던 사실에 기초해 볼 때츄슈를 배척한 핵심은 단순한 생활풍습의 차이에 기인한 이유도 있겠지만 한족(漢族)의 근간을 거부해야 하는 정치적 필요와 명분에 의한 것으로 무게가 실린다명나라 장수인 장사신의 시(“군사를 돌보지 않고 부녀자를 끓어않고주연과 축국을 즐긴다.”)나 소녀경의 한 대목으로 기녀들이 노는 모습이나 보며 그 자태를 즐기는 유희로 전락하고 말았다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이전부터 시작해 약 1천년 동안 성행했던 츄슈는 이후 더 이상의 발전을 꾀하지 못하고장구한 역사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츄슈는 군사훈련에 도입돼 널리 보급되기 시작해 황제가 즐겨 관람하며 전 국민이 즐기는 국기(國技)가 되었으나 유교의 등장과 원나라의 정책으로 스포츠가 아닌 기예나 유희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리해 보면 기원에서부터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에서 비롯하여 만인이 참가하는 스포츠로 대중화 되었다가 사상과 정책 기조의 변화에 따라 기교만을 겨루는 소수의 기예(技藝)로 전락했으며 다시 관상용으로 또는 한낱 기녀들의 희롱행위가 되고 말았다축구 종주국 영국에서 현대축구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19세기에나 들어서야 가능했음을 볼 때현대 축구와 가장 유사한 공놀이를 처음 고안하여 대중화에도 성공했으며 엄청난 저변과 정책적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13년 현재 중국남자 국가대표팀의 경우 FIFA에 가입된 약 200여개의 국가 가운데 고작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음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 오랜 축구 기원설에 대하여도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이미 살펴 본 바에 의하면동양에서는 공통적으로 손의 사용을 금지했고특히 츄슈는 구장 끝에 6개의 구멍에 발로 차 넣는 것으로 승부를 가렸는데 반해 서양의 축구는 손의 사용에 대해 그 어떤 제한도 없었으며 득점 방식도 공을 상대 진영의 골라인을 통과시키거나 교회에 공을 들여 놓는 것으로 하였다특히영국에서 근대적인 축구가 자리 잡기 전까지는 손을 사용해 격렬한 몸싸움이 허용된 격투형 축구가 보편화되었으며 그 모습은 오늘날의 축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결론적으로 현대축구와 유사성 관점에서는 중국이 축구의 발상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영국은 오늘날의 경기 모습으로 규칙을 정비하고축구협회와 정식 대회를 조직하는 등 축구의 근대화와 대중화를 견인해 세계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축구의 종주국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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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축구이야기

축구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일까?


축구의 기원 ④ : 태생부터 남다른 축구


그리스에서 시작한 서양의 고대 축구가 로마에 이어져 군대 스포츠로 제국 전체에 전파되어 각 나라마다 고유한 형태의 축구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다특히 이들 경기들은 저마다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국가와 민족의 상징 놀이로 손과 발을 사용하는 집단축구의 형태로 발전했으며 지역별로 독특한 세시풍속이나 축제 또는 정식 대회 등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그 전통과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기원전 76세기의 그리스라면 올림픽 제전이 정식으로 개최되어 달리기를 비롯해 5종경기가 정착되고격투경기와 경마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던 시기다또한 그리스 군사력의 핵심인 중무장 보병들의 역할과 위상이 중요해져 무장한 채로 달리는 경기(호프리토드로모스<Hoplitodromos>)가 올림픽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기도 했다.여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어 생각해 보면 그리스와 로마 군대는 전통적으로 융통성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공히 중장보병에 의한 밀집 전투대형을 기본으로 하여 고도로 훈련되고잘 조직화된 당대 최고의 전사들로 편성된 군대였다그리스의 팔랑스<Phalanx>’, 로마의 레지온<Legion>’을 근간으로 한 집단전투의 핵심은 대형의 유지에 있고이를 위해서는 고도의 훈련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당시 주변 위협에 대항해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스포츠를 권장했고이를 통해 전시 대비태세를 점검하여 유사시를 대비했던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올림픽의 정식 종목에는 고작해야 개인 경기만을 고집했다는 것은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대 올림픽 종목에 대한 연구에서 밝힌 바 있지만 대부분의 올림픽의 정식 종목들은 전시에 필요한 개인 전투기술과 관련된 종목들이고, 5종경기도 전시에 필요한 개인 전투기술을 종합한 종목으로 볼 수 있으며 팀 경기라 해봐야 전차경기 정도가 고작이다이는 당시 주력이었던 중무장 보병들을 운용하는 것(전략·전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어쨌건 로마의 군대축구 하르파스툼은 중세까지 이어졌고피렌체 등을 중심으로 성행한 집단축구 칼치오로 계승되었다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로마에서는 고대의 하르파스툼을 주로 하고피렌체는 중세 이후 성행했던 칼치오 축제를 즐겨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 집단축구의 전파도



고대 올림픽과 유사한 시기에 등장한 것이 고대 축구 에피스키로스라면 이 경기에는 조직의 전투기술이 포함되었을 법하다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그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다만그리스를 계승한 로마의 군대에서만 축구(하르파스툼)를 정식 군사훈련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질 뿐이다축구를 군사훈련으로 채택했다는 기록은 로마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잉글랜드에서는 초기에는 외침으로부터 조국의 독립과 왕위계승 등의 사유로 연속된 전쟁에 대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축구에 심취했던 국민과 군인들에게 축구를 자제(금지)하고 유사시 전쟁 준비와 궁술 연마를 강조했다그러나 이후 등장한 대포와 화약의 위력은 활의 위상을 위협했고급기야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이런 전쟁양상의 변화와 함께 축구가 단결과 조직력을 향상시켜 국방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당시 국왕이 직접 오랜 금지령을 풀고 군에서 궁술을 연마하는 대신 축구를 정식 훈련과목으로 채택해 장려한 바도 있었다이 밖에도 프랑스 역시 군에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조직 응집력 등을 함양하는데 유용한 스포츠로 인식하고 군사훈련에 정식 과목으로 채택했었다.

또한 경기 성격이 말해 주듯이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에서는 각 나라마다 공통적으로 외침에 대항해 독립과 민족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으로써 축구의 역할도 컸는데 특히, 1바이킹의 지배를 받았던 잉글랜드에서는 11세기에 덴마크가 철수하자 그동안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덴마크인의 무덤에서 두개골을 꺼내 발로 차면서 울분을 풀었다고 한다이런 전통은 매년 로마를 비롯한 외국의 점령군을 몰아내고독립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도시 전체가 참여하는 축구가 축제의 메인행사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아일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매주 마다 즐기는 축구(게일릭 풋볼<Gaelic Football>)와 하키(헐링<Hurling>) 역시 유사한 역사와 배경을 가지고 있다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함께 했던 축구의 역사는 비단 영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축구를 즐겼던 곳이라면 공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그리하여 오늘날 축구전쟁으로 불리는 국가대표 팀들의 A매치(국가대항전)는 이런 역사적 뿌리에서 비롯해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잔사들의 전쟁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일 삼국의 축국 전파도



중국의 츄슈도 군사훈련을 위해 고안된 군대축구였다츄슈는 기원전 3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시기는 진()나라가 등장하기 이전인 전국(戰國)’시대로 소위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적 배경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제한된 공간에 너무 많은 국가들이 서로의 이익을 다투며 공존하는 상황에서는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각종 연횡합종(連衡合縱)의 정치외교술도 필요하지만 주변 상황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스스로의 생존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지키는 힘의 근원은 곧 군대이고 이 군대의 근간은 곧 군인들이었기에 군인들의 신체와 체력 그리고 정신력은 곧 나라의 운명과 직결되었다따라서 강한 군대를 보유하는 것은 모든 국가 지도자들의 소망이었다이런 시대적 필요와 요구에 따라 고안된 경기 종목이 비로 츄슈라 할 수 있다츄슈의 경기 방식은 서양의 집단축구와는 사뭇 다르다특히손을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여러 개의 구멍에 공을 넣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경기의 치열함은 상당했었으며 경기 자체의 중독성으로 민간에서 황실에까지 보급될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츄슈와 관련하여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계속 하겠다.

우리나리의 축국이나 일본의 게마리에서는 서양 공놀이에서 보이는 전투적 성향을 찾아볼 수는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 중국의 츄슈’ 만큼은 로마제국의 하르파스툼이나 프랑스의 과 마찬가지로 전시를 대비한 군인들의 군대 스포츠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 전에 전혀 교류 없이 격리된 두 대륙의 국가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유사한 형태의 스포츠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축구의 기원 ⑤ 중국의 츄슈

지금까지 동양에서 성행했던 고대의 공놀이(츄슈 등 3)와 서양에서 기원했던 고대 및 중세의 공놀이(에피스키로스 등 6)를 모두 살펴보았다일반적으로 우리는 영국을 축구의 종주국(宗主國)으로 알고 있는데 각 종목들의 특징을 비교해 보면 오히려 중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특히경기방식만 본다면 유럽의 집단축구 보다는 츄슈가 오히려 현대의 축구와 더 닮아 보인다이런 생각을 갖도록 한 배경에는 중국의 끈질긴 노력이 숨어 있는데 이와 관련한 긴 이야기가 있다.

지난 2004년 FIFA는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현대 축구의 종주국(宗主國)인 영국에게 인증서를 수여하였다그런데 같은 해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당시 세계 축구협회(FIFA) 회장과 아시아 축구연맹(AFC)의 회장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피파가 주최하는 아시아컵대회의 개회식에 참석해 개식사와 축사를 통해 중국이 축구의 발상지임을 언급했다그리고는 피파의 홈페이지에 한 스포츠사학자의 연구 논문을 인용하면서 축구의 중국 기원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중국의 노력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다음에 소개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시간대별로 정리한 것으로 그들이 중국을 거론하게 된 배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중국 역사상 츄슈가 가장 성행했다고 주장하는 산동성 쯔보시에 축구박물관을 개관해 오랜 기간 준비했던 세계 축구박물관의 지평을 열었다이 박물관은 약 800백 평 규모의 거대한 공간에 가장 오래된 체육교과서로 주장하는 츄슈 25을 비롯한 150여 점의 유물, 300여 폭의 그림 그리고 당시를 재연한 장면 등을 전시하고동시에 전문 기예단에 의해서 멋진 츄슈 공연도 주기적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그리고 관람이 끝나면 전시관의 초입에 세워 둔 안내간판에 적힌 문구(“세계 축구는 츄슈에서 기원했다<世界足球起源于蹴鞠>)”를 다시 일깨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06년 츄슈 민속축제를 국가급 문화유산에 등재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츄슈를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켰다이후에도 베이징 올림픽(2008축구의 식전경기로 츄슈공연을 펼쳐 보인 바 있다.)을 포함한 국가의 주요 국내외 행사에 동원함으로써 중국인들과 세계인들 앞에서 츄슈 공연을 보란 듯이 시연하였다.

2007년 드디어 중국은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현대 세계 축구의 본거지인 국제축구연맹(FIFA)의 본부에도 진출했다아래 사진은 당시 피파 회장(블래터)과 임원 그리고 중국 축구협회 관계자들이 함께 중국에서 준비한 조형물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인데 부조에 새긴 글귀가 매우 인상적이다중앙에는 전통복장을 한 두 명의 선수가 츄슈 경기를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그 밖에는 외곽을 따라 성스러운 공의 기원을 의미하는 성구지원(聖球之源)’을 조각했다이게 다가 아니다.


(1) (2) 

(3)  

유럽의 고대 또는 중세의 축구에서는 볼 수 없는 여섯 개의 구멍(골문)에 발로 차서 넣는 경기로 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뒤로 감춘 모습(1)이 매우 인상적이다그리고 국가급 문화유산에 등록한 츄슈 축제 가운데 전문 기예단에 의해 재현된 모습(2)으로 베이징 올림픽과 영화(적벽대전)로도 만들어 홍보했다마지막 사진은 2007년에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FIFA 본부에 성구지원(聖球之源)’ 제목의 전통복장을 한 두 명의 선수가 츄슈를 하는 부조상을 거는 장면(3)이다



2008년 잘 아는 바와 같이 베이징 올림픽이 거행된 해로 중국은 2004년 애틀랜타에서 소련 몰락 이후 세계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초강대국의 입지를 만방에 알린 미국에게 도전장을 내밀고이를 세계에 알렸음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여기서 올림픽과 관련하여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2009년 : 2008년에 이어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오우삼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2’(적벽대전 1편은 2008년에, 2편은 2009년에 각각 상영되었음.)에서 조조군의 위나라 병영에서 결전을 앞두고장기간에 걸친 해외 원정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고사기를 진작시키며 동시에 진중훈련의 목적으로 조조와 군 수뇌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규모의 츄슈 대회를 개최하는 장면을 과도할 정도로 노출시켜 세계 영화시장에 뿌리기도 했다. 2부작의 대작이기는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 4시간으론 턱없이 부족한 대사건을 다루면서 전체 스토리 전개와 아무 상관없는 츄슈에 과도하게 할애한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당시의 군웅할거(群雄割據)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강군(强軍)이 필요했고정병양성(精兵養成)을 위해 츄슈를 적극 권장했다(다음에 소개하겠지만 역사적으로 츄슈가 전성기에 국기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정도로 봐주더라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지금까지 언급한 일련의 과정이 의도적으로 기획된 것이라면 올림픽과 츄슈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막강한 정치·경제력에다 역사·문화 등을 한데 묶어 세계에 중국의 총체적인 힘을 과시한 것으로 이해된다이런 전체 맥락에서 본다면 영화의 진행에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츄슈 장면을 삽입한 배경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영화적벽대전2’를 제작할 당시 오우삼 감독은 양쪽에 6개의 골문을 만들었던경기장이나축국을 즐기는 소녀상’(당나라 시대등 역사적 기록과 사료를 재현하는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세계는 중국의 집요한 노력 탓에 영국을 현대 축구의 종주국으로중국의 츄슈를 현대 축구와 가장 유사한 경기로 인정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중국은 2002년 한일 양국이 개최국의 자격으로 자동 본선에 진출하여 어부지리로 받은 혜택이기는 하지만 올림픽에 나가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던 등소평의 염원도 달성(중국 축구협회는 2050년이 되어야 본선 진출이 가능한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했고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고정치·경제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기회를 의미하는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 영역에서도 그 중심에 우뚝 선 것이다.

우리는 2004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구소련 몰락 이후 세계 초강대국으로써의 입지와 이미지를 굳혔던 미국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중국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기울였던 노력을 잘 알고 있다이런 차원에서 축구도 신중화(新中華)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아닐까만약 이러한 일련의 노력이 치밀한 계획과 계산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면 중국은 축구를 포함한 스포츠의 영역에서도 그들의 역사와 문화 등 민족의 총제적인 우월성을 전 세계에 과시함으로써 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국가 위상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물론 성적만 보완한다면 말이다그러나 마냥 부럽기만 하다거나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왠지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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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축구이야기

축구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일까?


축구의 기원②-2 서양 : 중세의 공놀이


고대 그리스의 공놀이는 로마군을 통해 철저하게 전투성으로 무장했고이런 성향은 중세를 거치면서 더욱 증폭되어 유럽의 각지에 전파되었으며 그 결과 놀이라 부르기 어려운 수준의 과격한 격투경기가 도처에서 성행했다이런 현상은 그리스나 이탈리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다 건너 잉글랜드도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리고 재능이 있는 특정 소수가 아니라 마을 등 공동운명체의 구성원 전체가 참가하는 집단 경기로 발전했기 때문에 이를 통칭해 집단축구(Mob Football)’라고 부른다중세 유럽인들을 열광시켰던 집단축구는 지역이나 시기와 상관없이 역사적으로 전쟁에 뿌리를 두고 있어 실제 전투를 모방하거나 전투 상황을 상정한 경기였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조금 과장해 표현하면 고대의 공놀이는 중세에 비하면 오히려 일정한 형식에 맞춰 추는 집단 군무나 제례를 연상할 정도였다.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면서 축구는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비교적 얌전했던 고대 공놀이는 점차 과격한 격투경기로 변모했고급기야는 거의 모의전투’ 아니 전투 그 자체로 부를 수 있을 만큼 격렬한 경기가 되어 버렸다이렇게 된 배경엔 로마군의 역할을 도외시 할 수 없다로마가 전쟁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점령지에 주둔한 로마군의 전쟁방식이 가미되어 더욱 치열한 스포츠가 되었다결국 로마제국의 시기(43~410)에 로마 군인들이 유럽 전 지역에 주둔하게 되면서 각지에 축구를 전파했고그 결과 나라마다 각양각색의 축구경기가 생겨난 것이다로마의 속주가 된 영국에서는 같은 섬나라임에도 불구하고잉글랜드에서는 마을 전체가 참가하는 쉬로브타이드 풋볼(Shrovetide Football)’을 즐겼고아일랜드에서는 독특한 민속경기 게일릭 풋볼(Gaelic Football)’이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물론 이들의 경기방식은 같은 축구지만 전혀 달랐다이탈리아에서는 칼치오(Calcio)’라 하여 규칙의 제한 없이손과 발 등 신체를 사용하여 상대방 골문에 득점하는 경기를 즐겼고프랑스에서는 추수 후에 밀기울이나 건초 등을 채운 공을 신체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대 진영에 옮겨 놓는 경기인 (Soule)’이 성행했다.



1.잉글랜드의 쉬로브타이드풋볼(Shrovetide Football)

잉글랜드의 쉬로브타이드풋볼은 비교적 간단했다양 팀은 서로 맨몸으로 출전해 돼지 방광 같은 것에 공기를 채운 공을 서로 합의된 지점으로 옮기는 쪽이 이기도록 한 것 이외에는 특별한 경기규칙이 없었다규칙에 제한이 없으니 그 치열성은 가히 짐작되는 부분이다인원도 제한이 없어 마을 대항전의 경우 한 팀이 무려 500명이나 됐다는 기록도 있으며 목사나 신부도 예외일 수 없었다놀라운 것은 주먹과 발로 차는 것은 물론물어뜯거나 눈을 찌르는 행위도 허용됐는데 쇠붙이나 돌멩이를 휴대하지 않는다면 모든 행위가 가능했다당시엔 골대가 없었으니 서로 합의된 지점(Goal)을 마을마다 있는 교회로 정하고여기서 시작해 광장을 지나 골목골목을 누비며 상대편 교회에 공을 들여놓으면 시합은 끝난다경기시간 제한도 없고서든데스(득점과 함께 경기가 끝나는 방식)로 진행됐기 때문에 무득점이면 이틀 이상 지속되는 경우도 있었다교회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면 여기를 허용한다는 것은 마을로써는 더할 수 없는 수치로 인식했기 때문에 소속이나 단결 정도에 따라 경기는 전쟁 수준으로 발전되기 십상이었다이로 인해 한 경기에서 수십 명의 부상자는 물론이고심지어 사망자도 속출했으나 그 중독성은 더욱 증폭됐다이를 심각하게 여긴 황실에서는 무려 42번이나 법으로 금지했지만 그 뿌리를 뽑을 수는 없었다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이런 야만적인 경기가 성행했다는 점은 아이러니지만 돌멩이나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다면 오심 논란이나 승패에 대한 항의경기몰수 등 그 어떤 추잡한 행위도 존재하지 않았다이런 관점에서 역설이지만 축구를 가장 신사적인 경기라 규정할 수 있는데 신사의 나라 영국의 이미지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잉글랜드의 쉬로브타이드 풋볼(Shrovetide Football)



2.아일랜드의 게일릭 풋볼(Gaelic Football)

잉글랜드에 쉬로브타이드 풋볼이 있다면 아일랜드에는 게일릭 풋볼이 있다이 경기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꼽히는 이 경기는 케이드(caid)로 알려진 중세의 민속경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경기방식을 보면 쉬로브타이드 풋볼이나 현대의 축구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다른 경기와 달리 한 팀의 선수는 25명으로 제한하고경기 중에는 당연 손의 사용은 허용되었으나 공을 손으로 던지는 행위는 금지되었다다만손이나 발로 드리블을 하거나 상대방의 골문을 향해 주먹으로 공을 치거나 펀트하는 것은 허용했다득점은 골포스트의 크로스바 위로 넘기면 1골포스트와 크로스바 사이의 골 망에 넣으면 3점을 얻도록 하고 있어 럭비와 유사한 차등 득점을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게일릭 풋볼은 풋볼이라는 이름을 붙여 축구로 위장했지만 축구와 럭비 두 종목을 합친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럭비에서 분기(分岐)된 경기로 보는 것이 옳다물론 경기 사용구는 타원형의 럭비공이 아닌 축구공처럼 둥글 것을 사용한다.



  

아일랜드의 게일릭 풋볼(Gaelic Football)



3.이탈리아의 칼치오(Calcio)

이탈리아는 12세기 경 부터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도시로 독립되었는데 이 도시들은 주변의 농촌지역까지 관장하면서 도시국가로 발전되었다이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중심의 시스템은 이후 이탈리아가 통일(1871)되기까지 끊임없는 전쟁과 함께 지역감정의 원인이 되었으며 유달리 강한 승부욕과 응원문화를 가진 배경이 되기도 했다어쨌든 14세기에 들어 피렌체를 중심으로 칼치오 경기가 행해졌는데 이 경기는 도시 축제의 일부로 행해졌다경기 방식은 시나 행정구에서 선발된 양 팀 선수 100여 명이 양 팀의 중앙 지점에서 경기를 시작하고자기 팀의 지역 경계선을 골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비록 통일된 이후에도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있어 축구란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라 도시와 도시간의 대항전 성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이런 경쟁심이 배가되어 경기의 치열도는 극에 달했는데 아래 사진에 보는 것처럼 선수들이 공을 차거나 들고 뛰는 행위 말고도 공과 무관하게 상대 선수와 힘겨루기를 하거나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은 물론이고심지어는 주먹다짐을 교환하거나 발로 차는 행위까지도 허용되었다칼치오의 경기 모습을 보면 오늘날 가장 격한 스포츠로 인정되는 럭비와 흡사한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럭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친 경기였다칼치오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관심과 자부심은 남다른데 오늘날 프로 축구팀들의 이름에서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예를 들면 우디네세 칼치오’, ‘칼리아리 칼치오’, ‘카타니아 칼치오’ 등은 모두 중세에 집단 축구 칼치오를 즐겨 했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칼치오(Calcio)



4.프랑스의 술(Soule)

프랑스에서는 술이라는 축구경기를 즐겨 했다이 경기는 19세기까지 브르타뉴와 피카르디 지방에서 성행하였고 공업화 이전에 농촌사회에서 행해지던 공동체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경기 방식은 양 진영의 선수들이 밀기울이나 건초더미를 채운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공인 술(soule)을 모든 신체적 수단들을 동원하여 상대 진영에 옮겨다 놓는 경기였다아래 삽화에서도 보듯이 이 경기 역시 로마나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군대에 보급돼 군사훈련을 위한 정식 과목으로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술(So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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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일까?

 

축구의 기원 ① 동양 : ··일 축구 삼국지


아래 사진은 2009년에 중국에서 제작되어 상영된 적벽대전(Red Cliff)’2부작 최후의 결전편에 등장하는 장면이고, 다음의 사진은 2012년에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미니시리즈 해를 품은 달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2009년 오우삼 감독이 제작한적벽대전2(최후의 결전)’의 한 장면. 위나라 진영에서 군사들의 진중훈련과 오랜 원정에 지친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조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츄슈 대회를 거행했다.



 

2012년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미니시리즈 해를 품은 달에서 출연자들이 축국을 하는 장면

(사진출처:MBC)

 

 이 두 작품 사진은 양국에서 이미 고대부터 성행했던 고유의 공놀이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꼽히는 일본도 역시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공놀이를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들 삼국이 즐긴 공놀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가 즐겨 하는 축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알아보자.

 

인간은 축구와 인연이 깊다그래서 혹자는 인간을 ‘Homo Soccers(축구하는 인간)로 규정하기도 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발길질을 하며 축구 연습을 하다가, 태어나면 손으로 던지고, 발로 차는 가장 원초적인 공놀이를 통해 사회성을 배우고 완성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던지고, 발로 차는 스포츠는 오래 전부터 많은 나라에서 행해졌는데 그 유래도 깊고,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나 과거에 행해진 축구의 실체를 알면 과연 그것이 축구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니 혹자는 스포츠로써의 기교를 견주는 것이 아닌 단순한 공놀이 정도로 혹평할 런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다음에 소개할 서양에서 즐겨 했던 축구 조상들의 면면을 파헤쳐 보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의 역사에서 축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집약된다. 이 중 가장 오랜 기록은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나쁘게 얘기하면 치밀한 계산에 따라 훗날 태종무열왕에 오른 김춘추와 김유신이 사돈을 맺게 되는 스토리(정략결혼)에 가려져 다소 소홀하게 취급되는 것이 바로 고대의 축구 이야기다. 얘기는 이렇다. 김유신의 초대로 유신의 집에서 공놀이를 즐기던 중에 김춘추의 옷끈이 떨어지자 김유신은 일부러 여동생(언니 보희<寶姬>가 거절하자 동생 문희<文姬>가 대신 꿰맸다.)을 시켜 꿰매 주었는데 아름다운 문희의 미모에 반한 김춘추는 이후에도 이 일을 계기로 김유신의 집을 자주 찾았고,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깊어 졌다. 결국 문희는 김춘추의 아이를 회임하여 후일 김춘추의 왕비(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되었다또 다른 기록에는 김춘추가 방문하기 약 보름 전에 보희가 해괴한 꿈을 꾸었다며 심난해 하자, 문희가 비단을 주고 꿈을 샀는데 이 때문에 문희가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여기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했던 공놀이가 바로 삼국시대에 성행했던 축국(蹴鞠)인데 서로 편을 갈라 둘러서서 떨어지지 않고 차거나 그물을 넘기는 경기로 마치 제기차기와 유사한 놀이로 알려져 있다. 또 고려 때의 기록으로 동국이상국집의 후집 고율시(古律詩)우연한 기구를 보고 생각한 것이 있어 뜻을 붙여 시를 짓되, 공에 바람을 넣어 사람들이 모여 차다가 바람이 빠져 사람들이 또 헤어지니 쭈그러진 빈주머니가 남았다.”는 기록도 있다


마지막으로 1790(정조14)에 간행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은 즉 구(; 격구나 타구에 쓰이는 공)자로 지금의 축국은 구희(球戱)인 것이다. 옛날에는 털을 묶어 이를 만들었고, 지금은 가죽 태소의 오줌통으로 공을 만든 것에 바람을 넣어 이를 찬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종합해 볼 때, 축국(蹴鞠)은 공놀이의 일종으로 가죽으로 만든 공(<>)을 발로 차는(<>) 놀이를 말한다. 이 공놀이는 우리 뿐 아니라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도 저마다 유사한 경기들이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경 중국에서 처음 시작(춘추전국시대로 알려져 있다.)한 츄슈가 당나라 시대에 고구려에 전해져 삼국시대를 거쳐 일본에 전파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의 츄슈(Cuju ; 蹴鞠)’는 일반적으로 같은 수로 편을 갈라서 공을 골대(기록에 의하면 여섯 개의 구멍을 만들었다.)에 넣는 것으로 승부를 가르는 경기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는 삼국의 경기방식 가운데 현대의 그것과 가장 유사하다. 또한 9명까지 편을 갈라 서로 공을 차다가 땅에 떨어뜨리면 지는 경기(한 명이 차는 것을 1인장으로 불렀으며 9인장까지 있었다.)도 있었다. 후자의 경기장은 아래 사진처럼 네트 없이 하거나, 높은 네트를 설치해 공을 넘기는 경기로 앞서 김유신과 김춘추가 즐겼다는 놀이를 이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놀이는 게임방식이 제기차기와 유사해 놀이의 기원에 대한 논란이 남아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즐겨 했던 축국이 일본에 전파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공놀이도 있었는데 게마리(けまり ; 蹴鞠)’로 부르는 일본의 전통 공놀이가 그것이다. 이 놀이는 중국이나 한국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을 채택했는데 네모진 경기장의 모서리에 각각 나무 기둥을 세워 놓은 구역 안에서 여덟 명이 한 편이 되어 같은 편끼리 공을 발로 차는 놀이였다. 경기장에 골대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축구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고, 단지 경기방식 만으로 보면 일종의 패스게임 정도로 보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중국의 츄슈(Cuju)                         삼국시대의 축국(蹴鞠)            일본의 게마리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이 세 나라는 모두 같은 한자 권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데 축국만큼은 같은 한자(‘蹴鞠’)를 사용했으며 서로 방식은 달랐어도 공통적으로 발을 사용하는 유사한 형태의 공놀이를 즐겼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위의 첫 번째 사진에 보는 바와 같이 손에 공이 닿는 것을 피하기 위해 뒷짐을 지고 경기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결론적으로 삼국의 공놀이는 공통적으로 손을 사용하지 않고 발만 사용하는 놀이였을 알 수 있다. 이 특징(‘발만 사용하는 공놀이’)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다음에 소개할 서양의 전통 공놀이(‘몹 풋볼<Mob Football>’이라 함.)와 비교해 보면 그 이유와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축구의 기원②-1 서양 : 고대의 공놀이


유럽에서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시작한 중국의 츄슈(Cuju) 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즐겨 했던 공놀이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스에서 처음 시작한 이 놀이는 동양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경기방식이나 하는 모습은 달랐다. 공통적으로 공을 사용한다는 점 이외에 어떤 유사함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기들은 열강들 사이에서 생존과 주도권을 유지하고, 최악의 상황에서는 주변국들과 생사를 건 전쟁도 불사해야 했던 당시의 국가와 민족 생존의 역사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유럽에서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제국을 비롯해 중세의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하면 전통적으로 고대로부터 세계의 패권을 좌우했던 군사대국이자 강대국이다. 동시에 이들은 공교롭게도 현대 축구에서는 빠질 수 없는 축구 강호들로 중세에는 공교롭게도 저마다 민족 고유의 공놀이를 고안해 즐겼던 나라들이기도 하다. 이제 그리스에서 태동해 로마를 거쳐 유럽과 전 세계에 전파된 축구 조상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1. 그리스의 에피스키로스(Episkyros)

역사에 기록된 가장 오랜 고대 축구는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경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에선 이미 이 시기부터 축구와 유사한 경기가 상행했는데 에피스키로스(episkyros) 또는 파이닌다(Phaininda)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이하 에피스키로스) 한 팀에 12명에서 14명으로 편성된 선수들이 중앙에 원이 그려진 경기장에서 서로 자기진영의 골라인을 지키는 경기였다. 경기 방식은 공을 차거나 던지면서 전진해 마지막에는 상대가 지키고 있는 골라인을 넘는 것(현대 축구처럼 골대에 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상대 진영의 골라인을 통과하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했다. 두 팀의 선수들이 상대방 골대 방향으로 공을 손으로 던지고, 발로 차거나 드리블을 하면서 앞으로 밀고 나가는 형식을 취하다 보니 양 팀 선수간의 신체접촉은 불가피했으며 그 피해(선수들의 부상) 정도는 다른 경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아마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인들이 올림피아 제전에서 즐겨 하던 정식종목 가운데 판크라티온이나 권투 등 격투종목을 제외하면 가장 치열한 경기일 것이다. 이런 경기방식은 로마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특히, ‘세계 대제국 건설이라는 특명을 부여받은 로마 군단과 군인에 의해 더욱 심화 계승되었다.

  

  

그리스의 에피스키로스(Episkyros)



2. 로마의 하르파스툼(Harpastum)

하르파스툼(Harpastum)’은 그리스인들이 즐겼던 에피스키로스(Episkyros)의 로마 버전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경기의 특성(개인과 집단의 전투성은 물론이고, 조직력과 단체정신을 함양하는데 적합하여 군사적 차원에서 훈련의 가치를 인식한 것 같다.)에 주목해 세계제국 건설에 유용한 방안을 강구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즐겼던 하르파스툼은 그리스의 에피스키로스와는 달리 로마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경기로 로마군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경기의 치열도는 마치 전쟁의 수준에 버금가게 되었다. 경기에 사용된 공은 오늘날 축구공에 비해 훨씬 작은 소프트볼 정도 크기의 공을 사용했으며 경기는 양 팀 사이에 던지는 것으로 시작됐는데 양 팀은 공을 상대방의 골라인 너머로 보내기 위해 공격과 수비를 펼쳤다. 전체적으론 그리스의 그것과 유사하였다 볼 수 있으나 로마는 군단의 전투대형을 유지하는 기본 전투대형에 기초해 공격과 수비의 분업이 이루어졌고 다분히 원시적이지만 집단 전투에 필요한 기술(전략·전술)들이 사용되었다. 경기 규칙은 간단했다. 손과 발의 사용은 기 본이고, 별도의 제한사항은 없었다. 그리하여 경기 모습은 아래 사진에 보는 것처럼 다분히 전투를 닮아 있었고, 에피스키로스에 비해 역동적이고 남성미가 넘치는 경기가 되었다. 따라서 참가하는 선수들은 엄청난 속도와 민첩성이 필요했고, 과감한 육체적 접촉을 수반했기 때문에 경기 도중 부상은 필수였기 때문에 통상 진흙이나 잔디 위에서 행해졌다. 로마는 당대에 가장 잘 조직된 군대와 고도로 훈련된 전사를 보유한 고대국가였다는 점(기원전 유럽에 생존했던 열강들에 비해 로마 군단의 편성, 무기체계는 물론 고도의 훈련시스템은 매우 탁월했었다.)에 동의한다면 로마가 그리스의 공놀이를 군대에 보급해 군사훈련으로 채택함으로써 로마제국 건설이라는 위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단련된 로마군단(Roman Legion)을 제국 건설과 운영을 위한 추력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로마의 군대는 유럽에서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각 점령지들을 관장하는 동시에 점령지마다 그들의 전투 공놀이를 소개했고, 전 세계에 전파했음은 틀림없다. 물론 여기에는 브리타니아(Britannia)’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던 축구 종주국, 영국도 포함돼 있었다.

   


로마의 하르파스툼(Harpast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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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국방부)

 

        1936년 LA 올림픽 육상 5000m 결승 경기에서 핀란드의 라우리 라티넨과 미국의 랄프 힐이 접전을 벌였다. 결승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라티넨이 한 발 앞서 달렸고 그 뒤를 힐이 바짝 추격했다. 힐이 사력을 다 해 라티넨을 앞서려고 바깥쪽으로 빠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라티넨이 힐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이었다. 멈칫하던 힐은 다시 방향을 고쳐 안쪽으로 추월하려 했다. 그러자 라티넨이 또 그 쪽으로 몸을 트는 것이었다. 주춤할 수 밖에 없는 힐이었고 그렇게 라티넨과 힐은 거의 동시에 골인했다. 사진 판독 결과 라티넨의 우승으로 결정이 났다. 그러나 관중석에서 야유의 함성이 이는 것이었다. 달리기 경주에서 앞지르려는 선수의 길을 막으면 실격으로 처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중들이 라티넨의 우승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힘이 달려 비틀거렸을 뿐인 라티넨은 관중들이 왜 소란을 피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필름을 보고서야 당시의 상황을 알게 된 라티넨은 얼굴이 붉어졌다. 분명한 진로 방해였던 것이다. 라티넨은 그 즉시 힐에게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그러나 힐은 오히려 민망해 하며 라티넨의 우승을 축하해 주는 것이었다. 곧 이어 시상대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진풍경이 펼쳐졌다. 자신이 우승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라티넨은 힐을 한사코 맨 윗자리로 밀었고, 힐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사양하는 것 아닌가. 이 둘의 실랑이를 관중석에서도 다 볼 수 있었다. 당시 메인스타디움에서 관전하던 모든 관중들은 이 들의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에 뜨거운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2004년 아테네국제육상선수권대회에서 남자 마라톤에서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넘어져 우승을 놓친 유명한 사례가 있다. 브라질 선수 리마는 결승점 4Km를 남겨 두고 선두를 달리다 한 아일랜드 종말론자에게 밀쳐 넘어졌다. 그대로 속도를 유지하면 우승은 문제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이변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4년을 준비해 금메달을 눈앞에서 놓친 것이다. 아니 도둑 당했다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화가 날 법도 하건만, 결승점에 도착한 그는 얼굴에 천진난만한 웃음과 멋진 세리모니를 보여 주었고, 시상대에서 그렇게 고대하던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목에 걸고도 그 어떤 원망이나 몸짓도 없었다. 후일 아일랜드 정부는 그를 초청하여 국민적 사과와 함께 국빈의 예우를 보여 주었다. 아래 사진에 보는 것처럼 은메달도 아닌 동메달을 목에 걸면서 보여준 밝은 모습은 개인적으로 모든 스포츠에서 성공했던 그 어떤 선수보다 행복한 모습 그 자체로 쉽게 잊혀 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으로 기억한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마라톤에서 관중이 뛰어 들어 역주하는 반다라이 리마를 방해하는 장면과 3위로 골인하면서도 천진난만한 모습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다음 내용은 앞서 소개한 랜스 암스트롱의 사례이다. 최근 금지약물 복용으로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그의 이야기 가운데 2003년에 열린 ‘투르 드 프랑스대회’는 유난히 특별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사이클 구간 독주 경기로 피레네 산맥을 횡단하는 코스를 20구간으로 나누어 20일 동안 경기가 치러지며 각 구간의 기록을 합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개인독주 경주다. 당시 15일까지 선두를 달리던 랜스 암스트롱은 응원을 나온 꼬마 아이의 가방을 피하려다 넘어지게 되었다. 당시 2위로 불과 15초 차이로 뒤를 쫒던 독일의 얀 울리히는 암스트롱 때문에 만년 2인자로 있었기에 이 불의의 사고는 그에겐 곧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만년 2위에서 1위로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그는 추월하지 않았고, 오히려 암스트롱이 다시 일어나 레이스를 재개할 때까지 페달을 멈추고는 기다려 주었다. 결과는 암스트롱이 1위, 얀 울리히가 2위를 차지했다.

 

경기가 끝난 후, 울리히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던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나는 기다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운을 이용하여 이 경주에서 승리하였다라고 한다면 그러한 경주는 승리할 가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 장면은 세계에 알려졌고, 우리나라의 한 시인(박노해)은 “1위로 달리던 암스트롱이 응원하는 아이의 가방을 피하려다 그만 넘어져 나뒹굴었습니다. 겨우 15초차로 뒤쫓던 독일의 울리히 선수는 만년 2위의 한을 벗어 던질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멈췄습니다. 암스트롱이 다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할 때까지 그는 묵연히 멈춰서 있었습니다. 숨 가쁘던 피레네 산맥도 멈출 줄 모르고 질주하던 지구 위의 사람들도 울리히와 함께 숙연히 멈춰선 것만 같았습니다.”라고 표현했다. 만년 2인자의 자리를 선택한 울리히야 말로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보여 준 귀감이 되었다. 랜스 암스트롱은 암 선고를 받고도 긴 투병생활과 함께 7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며 당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되었고, 얀 울리히는 평생 동안 염원했던 정상의 자리를 정도(正道)가 아니라 하여 스스로 포기했다. 이 날의 경기는 두 선수에게도 변화를 주었는데 그동안 서로에게 정상의 자리를 노리는 라이벌의 관계를 뛰어 넘어 진정한 평생의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암스트롱의 역경 스토리는 1996년 고환암과 세포 종양 선고를 받으면서 시작하여 수술과 화학요법을 병행하면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7연패의 위업을 달성했고, 기간 중 ABC, AP통신, ESPN, Sports Illustrated 등이 주관하는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그는 2005년 투르 드 프랑스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후, 2007년 자신이 설립한 재단 활동에 몰입했는데 앤드레아 애거시, 무하마드 알리, 앤드레아 예거, 알론조 모닝, 제프 고든 등의 유수의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재단(Athletes for Hope)을 확대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8년 현역에 다시 복귀하여 2009년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 출전하여 그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3위를 차지하는 놀라운 기록을 보였다. 다음은 그의 인터뷰 내용이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가 보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면서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깨달음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나면, 매일 아침 신선한 기분으로 깨어나 내게 특별한 또 하루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활기차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하루하루를 이어가자고 다짐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가 내게 오로지 사이클에만 매달려 장대비 속에서도 여섯 시간씩 높은 산을 오르내리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게 바로 내 대답이다.” 얼마나 진한 감동의 순간인가? 이것이 다른 영역과 구별되는 스포츠의 진정한 힘일 것이다.

 

 

2003년 투르 드 프랑스대회에서 넘어진 랜스 암스트롱(미국, 사진의 왼쪽)을 기다려 준 얀 울리히(독일, 사진의 오른쪽)가 레이스를 마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 대회를 계기로 둘은 진정한 친구가 되었고, 독일의 얀 율리히는 암스트롱 못지않은 세계적인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스포츠의 본질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최고가 되기 위해 정진하는 자기 자신과 그리고 대적한 라이벌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한다. 그러나 경쟁에 비겁한 방법은 허용되지 않으며, 비록 라이벌에 비해 부족하더라도 인정되는 수단과 방법으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결과는 그 다음의 문제인 것이다. 전쟁에서의 적은 영원히 그 적대감정이 지속되지만, 스포츠에서 건전한 경쟁을 겨루었다면 경기 후에는 모두가 친구이며 동반자이다. 그리하여 스포츠에서는 승자만 칭송받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패자에게도 아낌없는 박수와 무한의 후원을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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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태승 2013.08.28 21:45 신고

    그 간의 글들 중 기억에 남는 씨리즈를 다시 읽어봤습니다.
    스포츠둥지 윤동일님께서 요즘에 많이 바쁘신가보네요.
    글들이 1달 가까이 올라오지 않는 것을 보니.

 

 

글/ 윤동일 (국방부)

 

            전쟁과 스포츠는 흔히 영역을 넘어 상대 영역을 은유한다. 이는 곧 영역 간 유사상과 차이점이 공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포츠는 전쟁에서 유래했지만 본질적으로는 ‘흥겹게 노는 행위(고대 영어의 display에서 유래했다.)’를 통해 부정적인 마음을 없애고, 인간성과 사회성을 완성하기 위한 활동이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선 전쟁과는 다른 성격의 활동으로 보인다. 이런 본질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상반된 의지를 가진 지적(知的)인 상대와 벌이는 무한경쟁 속에서 최고를 추구하는 공통점 때문에 실전에선 서로에게 훌륭한 스승이자 가이드를 제공해 준다. 반면에 상호 경쟁적인 신체활동은 적(enemy)으로부터 생명을 보존(to survive)하기 위한 전쟁과는 달리 서로가 합의한 규칙에 따라 페어플레이 정신을 준수하여 상대방(rival)과 경쟁하고, 비록 지더라도 깨끗하게 승복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승리(victory)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패했더라도 최선을 다해 겨뤘다면 아낌없는 박수와 찬사를 보내며 경쟁 자체를 즐기는(to enjoy) 행위로 간주하는 것은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따라서 ‘규범성’은 스포츠와 전쟁을 구분하는 특징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된다.


  앞서 육상 종목에서 최근 발생한 이슈를 사례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과연 마라톤은 어떨까? 비교적 익숙하지 않은 마라톤의 규칙과 이를 어긴 사례가 있다면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마라톤에 적용되는 규칙과 반칙에 대한 규정은 타 종목에 비해 비교적 간단하다. 아래 표에 보는 것처럼 경기에 준수해야 할 것 3개 조항과 범하지 말아야 할 7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라톤은 수영처럼 자신만의 코스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쇼트트랙스케이팅처럼 충돌이 있을 염려도 없는 경기이다. 그저 정해진 코스를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경기이기 때문에 이변이 생길 일도 없어 보이는데 사실 올림픽의 역사에는 다른 종목과는 다른 다양한 상황에서의 이변이 많은 편이다.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서는 미국의 프레드 로쓰가 선두로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서자 장내는 환성의 도가니로 변하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아리스가 로쓰에게 월계관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로쓰는 반환점인 20㎞지점에서 지나가는 자동차의 도움으로 메인스타디움에 골인한 사실이 폭로 되었고, 본인은 물론 주최국 미국은 곤혹을 치러야 했다. 우승은 그로부터 약 1시간 후 미국의 토마스 힉스가 지칠대로 지쳐서 골인한 덕에 다행히 미국이 금메달을 잃지는 않았다. 1908년 4회 런던올림픽 마라톤에 출천한 이탈리아의 ‘피에트리 도란도’는 결승선 50미터 앞까지 여유롭게 선두로 질주했으나, 긴장이 풀려서인지 점점 휘청거리더니 결승선을 불과 10여 미터 앞두고 쓰려졌다. 이걸 애처롭게 여긴 심판들과 경기진행요원들이 도란도를 부축해서 질질 끌면서 결승선을 통과시켰다. 잠시 뒤에 2등으로 들어온 존 헤인즈가 격렬히 항의해서 도란도는 결국 실격 처리되었다. 기절해 있다가 병원에서 깨어난 도란도는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면서 항의했지만 규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설픈 친절이 사람하나 망친 사례로 사진에서 도란도 왼쪽을 부축한 심판은 ‘셜록 홈즈’의 작가 코난 도일이다. 이때 도움을 준 심판들은 미국 선수가 우승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그의 행동은 몇 되지 않는 마라톤의 규칙을 어긴 결과로 자국 선수의 실격을 조장한 셈이 되었다.

 

<표 4> 마라톤 규칙 

(1) 경기규칙
  1. 지정된 장소를 달리며,
  2. 참가자는 전문의사의 건강진단서를 제출하여야 하고,
  3. 음식물은 주최 측이 준비하되, 코스의 출발점에서부터 11km의 지점에 준비하고, 5km마다 두도록 되어 있다.
    선수는 자기가 희망하는 음식물을 신청하여 허락을 받으면 지정된 공급소에서 이용할 수 있다.
(2) 반칙에 대한 규정
  1. 다른 주자를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행위
  2. 도구를 이용해 편법으로 뛰는 행위(고무줄을 발에 건다던가 하는 행위)
  3. 마라톤을 뛰기 전에 금지된 약물복용 행위
  4. 경기 중 의사나 타인으로부터 응급조치를 받는 행위
  5. 타인으로 부터 도움을 받는 행위
  6. 동반자와 함께 달리는 행위
  7. 자신의 그룹을 벗어나 앞 그룹에서 뛰는 행위 등  이 모든 행위는 실격으로 처리된다. 

 

누구나 한번쯤은 학창시절 체력검정을 포함하여 장거리를 달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장거리를 달리는 경우 도중에 벌어지는 불의의 사고는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단순히 미끄러지거나 휘청대는 행위조차도 전체적인 리듬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다시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그야말로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몸을 빠른 시간에 다시 일으켜 원래의 페이스로 돌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도 종반에 접어들면 더욱 그러하다. 2011년 대구국제육상선수권대회 의 첫 경기로 시작된 여자마라톤은 케냐 선수들의 잔치가 되었다. 40km까지 선두에서 뛰던 키플라갓은 대회조직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급수대 앞에서 물병을 잡으려다 팀 동료인 체롭과 다리가 뒤엉키면서 땅바닥에 무릎을 찧은 것이다. 체롭은 더 이상 뛰지 않고, 넘어진 그녀에게 다가가 상태를 걱정하면서 도움을 주었다. 규칙상 타인의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말로 격려와 가이드를 했다. 3위로 뛰던 젭투 역시 키플라갓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넘어진 키플라갓이 다시 일어나 뛰기를 시작하자, 나머지 두 명도 합세하여 무리를 이루어 역주했고, 막판까지 더 이상의 이변 없이 넘어지기 전의 순서대로 골인했다. 결국 케냐가 마라톤 역사상 최초로 같은 국가 선수들이 1위, 2위, 3위를 모두 차지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들은 대회전부터 “우리는 한 팀으로 뛸 것”을 선언했으며 이를 행동으로 지켰다. 당시 체롭은 “친구이자 팀 동료인 키플라갓이 쓰러진 것을 보고 그냥 뛸 수 없었다.”고 추월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던 기자들에게 답변했다. 이들의 팀웍과 우정은 결승점에 먼저 도착한 키플라갓이 이어서 도착한 젭투와 체롭을 껴안고 기쁨과 고마움을 나누는 감동의 장면을 연출하였다. 마라톤은 분명 개인경기임에 틀림없지만 이들은 마치 단체경기처럼 팀으로 달렸다.

 

1908년 런던올림픽 마라톤에서 경기진행 요원들이 부축하여 실격한 피에트리 도란도의 골인 장면과 이를 주제로 제작된 영화의 한 장면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1∼3위를 차지한 케냐 여자 마라톤 선수들과 40km지점에서 넘어진 후에도 1위로 골인한 키플라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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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국방부)

 

 

               하나 뿐인 목숨을 걸고 하는 고대 검투사들의 ‘토너먼트(tournament)’나 중세 기사들의 마상창시합 ‘쥬스팅(jousting)’, 미국 서부 개척 당시 일대일의 ‘결투(duel)’도 있기는 했으나 일반적인 스포츠는 전장의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생명을 걸지 않고, 서로의 힘과 체력 그리고 기예를 견주는 것으로 승부를 판가름해 보는 것이다. 무예의 실력을 규칙에 따라 간접적으로 견주어 보고 그 결과에 승복한다. 스포츠가 무예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간접적인 투쟁이기 때문에 무예처럼 곧이 곧대로 승복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여러 가지 규칙들을 정해 놓고 결과에 승복하도록 강요하게 되는데 그것이 스포츠맨십이다.

 

더 간단히 말하면 졌으면 졌다고 깨끗이 승복하고 물러나라는 말이다. 물론 무예에서는 그러한 용어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목숨은 하나 밖에 없고, 단판 승부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따라서 패장의 변명은 진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결국 스포츠에서 승패는 곧 생사와 직결되는 전쟁에서처럼 승복해야 하는 절대적 속성을 갖는다. 스포츠에서 절대승복 해야 것은 결과만이 아니다. 엄정한 규칙도 마찬가지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이변이라면 세계적인 톱스타들의 몰락을 들 수 있다. 매일 진행되는 경기의 일정을 알리는 팜플렛의 표지 모델은 그날 주요 경기의 우승후보가 표지모델로 등장하는데 많은 선수들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매스컴에서는 “데일리 프로그램의 저주”라고 불렀는데 첫날 남자 장대높이뛰기의 ‘스티브 후커’로부터 남자100미터의 ‘우사인 볼트’, 남자110미터허들의 ‘로블레스’ 그리고 여자장대높이뛰기의 ‘이신바예바’에 이르기까지 매일 표지모델로 올랐던 선수들이 줄줄이 떨어졌다. ‘라이트닝 볼트’로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는 새로 적용된 규칙 때문에 실격하여 경기조차 뛰지도 못했다. ‘부정출발’로 결승전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우리나라 김국영 선수도 마찬가지다. 번개처럼 빠른 그에게 기록상 대적할만한 상대도 없었는데 신기록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찰라의 순간에 스타팅블록을 박차고 일어서는 바람에 실격되었다. 이전에는 두 번까지 부정출발(2 false starts)이 허용되었다가 워낙 경기가 지연되는 문제가 있어 규칙을 바꿔 2001년에는 한 번으로 줄었다. 한 선수가 부정출발하면 경고로 그치지만 다음엔 그 어떤 선수의 부정출발도 허용되지 않는다(straight red rule). 그러자 스타트 느린 선수들이 의도적으로 스타트가 빠른 선수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기 위해 부정출발을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다시 규칙을 개정하게 되었다.

 

2010년부턴 단 한 번이라도 부정출발을 하는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즉시 실격 규칙(instant dis-qualification rule)’을 도입하였다. 물론 이 규칙은 선수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했고, 경기력 향상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대구 대회 이후 폐지되었다. 남자 110미터 허들의 강력한 우승후보 쿠바의 로블레스는 결승점을 통과한 뒤 멋진 세러모니를 했지만 허들을 넘으면서 라이벌 중국 류상을 방해한 것으로 판정되어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허들경기는 1미터가 조금 넘는 허들(정확한 허들의 높이는 1.067미터이다.)을 넘어뜨려도 규칙위반은 아니다. 그러나 허들에 닿는다면 달리는 순간 속도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리듬과 균형을 잃어 달리기 연속된 템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회복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대부분의 트랙경기에 적용되는 규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경쟁자 보다 앞서기 위해 상대를 밀치거나 진로를 방해하는 행위를 실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로블레스의 금메달 박탈은 소위 ‘rule 163.2’로 불리는 규칙에 적용된 것이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100미터에서 단 한 번의 부정출발로 실격된 우사인 볼트와 김영국 선수는 경기에 출전조차 하지 못했다.


 

스포츠에는 경기규칙 말고도 도핑(doping)으로 알려진 약물복용 금지 규정도 준수해야 한다. 도핑은 운동선수가 일시적으로 경기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흥분제 · 호르몬제 등의 약물을 복용하는 것으로 건강을 해치고 스포츠 정신에도 위배되기 때문에 각종 경기연맹에서 금지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남자 100미터 경기는 미국의 인간탄환 ‘칼 루이스’와 캐나다의 마하인간 ‘벤 존슨’의 세기의 대결로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었다. 결승전에서는 벤 존슨이 9.79초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내며 우승하였으나 경기 종료 후 실시된 도핑테스트에서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금메달이 박탈되었고, 2년간 국제대회 출전 자격이 정지되었으나 이후에도 약물에 의존한 것이 밝혀지면서 더 이상 그의 질주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사실 올림픽사(史)에서 있어 금지약물 복용에 대한 규제는 예상한 것 보단 그 역사가 오랜 편이다. 1960년 로마올림픽 사이클 100km 도로경기에서 덴마크의 ‘크루트 젠센’이 각성제 암페타민을 과다 복용하여 사상 최초로 약물 중독에 의한 사망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충격으로 덴마크 사이클 선수단은 남은 경기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복귀하였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금지약물을 규정하고, 이를 복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72년 삿포로동계올림픽부터 도핑테스트를 실시하였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미국의 여성육상 스타 메리언 존스는 3관왕에 올랐지만 약물복용으로 메달이 박탈되었고, 법정 위증 혐의로 수감되기까지 했으며 2008년 베이징올림픽 공기권총에서 은‧동메달을 딴 북한의 김정수 선수 역시 메달을 반납해야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100미터 결승에서 제일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 벤 존슨은 경기 후 도핑테스트에서 금지약물 복용으로 실격 처리되었다.

2004년 올림픽 우승과 1999∼2005년까지 투르드프랑스에서 7회 연속 우승한 랜스 암스트롱은 오랜 법정공방 끝에 모든 성적이 박탈되었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선수들의 도핑 추세는 날로 지능화되어 가고 있고, 반대로 이를 밝히고자 하는 도핑테스트 역시 올림픽이 회를 거듭할수록 횟수와 범위가 함께 증가하는 추세다. 2013년 초부터 세계 스포츠인 아니 세계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들이 이어졌다. 2월 중순, 여자친구 살해 혐의로 기소된 남아공 출신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 소식이 전해졌는데 개인적으로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암과 투병하면서도 ‘사이클 황제’로 칭송되는 전설적인 체육인의 몰락이었다. 이 사건은 세계적인 프로 로드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le Tour de France)’에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7년 동안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는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이 그동안 제기된 금지약물 복용을 시인하면서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투르 드 프랑스는 한 신문기자의 아이디어로 1903년에 시작하여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대회로 프랑스 전역을 일주해 우승자를 가리는데 일부 경기는 이탈리아, 독일 심지어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도 거행될 정도로 인기 있는 대회이다. 무려 3천km 이상의 거리를 시간당 평균 30∼40km의 속도로 3주 동안이나 달려야 하다 보니 구간 중 많은 오르막은 물론이고, 산악을 넘어야 하는 등 고통과 인내가 요구되어 참가자의 15∼20%가 포기하는 극한의 스포츠로 알려져 있다. 암스트롱은 1996년 고환암과 세포종양의 전이로 수술과 재활을 통해 심각한 고통을 이겨내고, 1999년부터 출전한 투르 드 프랑스에서 그가 이룬 위대한 업적은 2010년부터 팀 동료의 고발로 제기된 의혹은 2012년 8월 법정공방을 포기했고, 그 결과 1998년 8월부터 대회에서 세운 모든 성적이 박탈되었으며 미국반도핑기구(USADA)에서도 영구 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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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국방부)

 

         개인적으로 “인간은 도전할 때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표현에 동의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성을 완성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영역이다. 아래 표는 앞서 소개한 많은 스포츠 영웅들의 경구들을 정리해 본 것인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새삼스레 그들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는 것은 이를 통해 진정한 스포츠의 진목을 느껴 보고자 함이다.

 

 

스포츠 영웅들의 말 말 말 

- 카로리 타카스(헝가리, 속사권총) 
  : 내겐 아직 왼 손이 남아 있다. 오른손이 했는데 왼손이 못할 이유가 없다.


- 리차드 로스(미국, 수영)
  : 금메달을 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지 수술이나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 아베베 비킬리(에티오피아, 마라톤) 
  : 더 이상 내 다리는 달릴 수 없지만 나에겐 아직 두 팔이 있다. 나의 조국이 강인하게 시련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 알 오터(미국, 원반던지기) 
  : 누군가가 내 갈비뼈를 뽑아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처럼 고귀한 것은 없다.
   어떤 직업,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나 돈도 올림픽의 경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 이봉주(대한민국, 마라톤) 
  : 마라톤을 즐기지 못했다면 진작 은퇴했겠지만 달리는 게 좋아서 그냥 뛰다 보니 20년이 흘렀다.


- 피스토리우스(남아프리카공화국, 육상 400m) 
  : 패배자는 경주에서 맨 마지막에 들어오는 자가 아니다. 앉아서 구경만 하고 뛰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패배자 이다.


- 아크와리(탄자니아, 마라톤) 
  : 내 조국은 레이스에 출전만 하라고 7000마일이나 떨어진 이곳에 보내지 않았다. 조국은 레이스를 끝내고 오라고 여기에 보낸 것이다.


- 호이트팀(미국, 마라톤/철인3종경기) 
  : 난 아들 없이는 달리지 않는다.(릭 호이트) 단 한 번만이라도 휠체어에 아버지를 태우고 내가 밀어 드렸으면  한다.(딕 호이트)


- 에밀 자토펙(체코, 육상 5천·1만/마라톤) 
  : 우리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그가 4개의 금메달을 따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온몸을 던진 투사였기 때문이다.(국제육상연맹회장의 애도사)


- 알랑 미뭉(알제리, 마라톤)
  : 식민지 조국 알제리의 국민과 이 기쁨을 나누겠다.


- 손기정(대한민국, 마라톤) 
  : 기쁘기도 기쁘나 실상은 웬일인지 이기고 나니 기쁨보다 알지 못할 설움만이  복받쳐 오르며 울음만 나온다.   남승룡과 함께 사람 없는 곳에 가서 남몰래 서로 붙들고 몇 번인가 울었다. 이곳의 동포들이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만 앞선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나라 없는 설움에 대해서 모른다. 내가 우승한  뒤 일본 국가가 연주될 때, 나는 고개를 떨궜다.  

 

 

 

카로리 타카스(헝가리) 피스토리우스(남아프리카공화국) 호이트팀(미국)

에밀 자토펙(체코)과 알랑미뭉(알제리) 손기정(대한민국)

 

 

전쟁의 속성을 고려해 볼 때,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신체적 장애는 허용되지 않는다. 각 나라마다 전투군인을 선발하기 위한 조건은 엄격한 신체기준을 포함하여 까다롭고,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공무원에게 적용되는 정년은 적용되지도 않는다. 이는 전쟁이 극한의 고통이 수반되고, 이를 굳건히 견뎌야하기 때문이다.


  각색된 내용이기는 하지만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의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던 꼽추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며 레오니다스의 근위대에 입대하기를 희망했지만 방패를 들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고대 전쟁에서 방패는 칼이나 창에 비해 더욱 중요하다. 고대의 전투는 방진(Phalanx) 이라는 밀집대형을 갖추어 집단 대 집단이 격돌하는 전투양상을 보였다. 이 집단대형 안에서 방패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접한 전우들의 생명을 온전히 보호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고대 그리스의 방패는 전쟁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지만 이보다 집단전투의 대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따라서 고대의 전투에 있어 모든 전투원은 잘 쓰는 손과 무관하게 왼손에 방패를 들었고, 오른손에는 창이나 칼을 들었다. 고대의 전사는 전투에서 모두 오른 손잡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전하게 되면 두 집단은 서로 엉켜 오른쪽으로 돌게 되는 방향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했던 방패를 들지 못하는 전사란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전쟁의 역사 가운데 가장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사례가 있다.


  이 이야기는 열국지에 등장하는 마릉전투와 관련된 내용이다. 스승 귀곡자(鬼谷子)의 문하생으로 방연(龐涓)과 함께 수학한 손빈(孫賓)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손님 빈(賓)’ 자에 ‘달 월(月)’을 합하면 전혀 다른 뜻이 되는데 ‘다리 자르는 형벌’을 의미하는 ‘빈(臏)’ 자로 개명하였다. 결국 그는 친구이자 동문수학한 위(魏)나라 방연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다리를 잘리게 되었고,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이 때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미친 짓을 하게 되었고, 이를 본 방연은 손빈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이 틈을 타 손빈은 스승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하여 적국 제(齊)나라로 도주하였다.

적국의 군사(軍師)가 된 손빈은 이제 방연과의 일전을 위해 말 대신 가마를 타고 출전하였다. 성미가 급한 방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손빈은 군사들의 야전 아궁이 터를 줄여 나가는 방법(‘감조<減灶>전술’이라 함)을 사용하여 방연의 조바심을 부추겼고, 급기야는 정예 군사를 차출하여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추적에 나선 방연을 함정에 빠뜨렸다. 허겁지겁 추격한 방연의 정예군이 도착한 ‘마릉(馬陵)’이라는 분지에는 손빈의 지시대로 모든 나무를 베어 내고 한 그루만 세워 두었고, 껍질을 벗겨 밤에도 쉽게 눈에 띌 수 있도록 하였다. 추격 중에 허허벌판에 우뚝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는 방연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여기에 새긴 글씨를 보기 위해 횃불을 들자 손빈이 미리 배치해 둔 궁수들의 수많은 화살이 시위를 떠났고, 방연의 최후는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나무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을까? 내용은 이렇다.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다.(방연사차수하<龐涓死此樹下> - 군사손빈<軍師孫臏>)” 이를 본 방연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 이야기는 기원전 중국의 전국시대와 진(秦)나라를 배경으로 한 ‘열국지(列國志)’에 등장하는 유명한 ‘마릉(馬陵)전투’로 군인들에겐 ‘감조전술(減灶戰術)’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아마도 손빈은 기원전 전장에서 유일하게 중증장애(두 다리가 잘린)를 딛고 군사(軍師)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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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국방부)

 

           마라톤은 혼자서 하는 경기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안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한 팀을 이뤄 34년째 달리는 이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들 부자의 이름을 따서 ‘호이트 팀(Team Hoyt)'이라고 부른다. 둘이 달리지만 다리는 넷이 아니라 둘 뿐이다.


  아들 딕은 탯줄이 목에 감겨 뇌에 산소 공급이 막히면서 뇌성마비와 경련성 전신마비의 선천성 장애를 갖고 태어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된다. 의사들은 정상적인 삶을 살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 릭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학습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기 시작한 수년이 지나서야 13살의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대학 연구팀의 기증으로 받은 특수 컴퓨터(Tuffs University의 엔지니어들의 도움으로 생각을 화면에 글로 나타낼 수 있는 컴퓨터 장치)를 통해 아들과 처음 의사소통이 가능해 졌다. 컴퓨터를 배운 아들이 처음 쓴 글은 운동경기를 보자는 것이었고, 처음 경기장을 찾았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달리고 싶어요.” 그동안 한 번도 함께 뛰어 본 적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달리기는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아들이 15살이 되던 해(1977년)에 이들은 8km 자선 달리기 대회에 나가 꼴찌에서 두 번째로 완주하였다. 경기 후 아들은 “처음으로 제 몸에서 장애가 사라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당시 공군 중령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그 느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직장도 포기한 채,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1981년 처음으로 보스톤 마라톤대회에 출전했지만 10km에서 포기했고, 이듬해에 다시 도전하여 완주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마라톤에서 완주한 기록은 모두 68회나 되었고, 특히 보스톤마라톤은 24회 연속 완주의 대기록도 가지고 있다. 이 팀의 최고 기록은 2시간 40분 47초였다. 개인적으로 마라톤에 참가했거나 완주한 기록은 없지만 20km와 30km를 완주한 경험에 비춰볼 때 정상인이 혼자 달렸을 때의 기록과 크게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이해된다. 앞서 언급했지만 마라톤 선수들조차 호이트팀처럼 그렇게 많은 완주 기록을 가진 사람은 없다. 정상인이 그 기록을 달성하려면 2∼3년 정도의 전문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정말 믿기 어렵다. 그러나 호이트팀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호이트 부자가 마라톤에 출전하여 역주하는 모습. 처음 마라톤을 시작할 당시 어린 딕 호이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라톤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아들은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고 싶어 했지만 수영도 할 줄 몰랐고, 자전거는 어떻게 타는 지도 잊었을 정도였던 아버지는 난감했다. 아버지를 걱정했던 주변 사람들이 “아들을 더 힘들게 할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아버지는 이내 세계 철인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철인 3종 경기는 수영 – 사이클 – 마라톤 순으로 진행되며 거리만 따져도 226.295km를 이동해야 하는 경기다. 출발신호가 울리자 모두가 물살을 헤치며 나갈 때 아버지는 아들을 보트에 태워 자신의 몸과 밧줄로 연결한 후, 뒤늦게 배운 수영으로 3.9km의 바다를 헤치며 전진한다. 기진맥진 뒤늦게 도착한 지점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손에 든 아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자전거를 개조해 마련한 시트에 고정시키고는 자신도 복장을 챙겨 입고 마운트에 올라 180.2km의 거리를 밟아 나아간다. 이제 자전거에서 아들을 내려 휠체어에 옮기고는 운동화를 신고 50kg의 아들을 밀면서 마지막 42.195km의 거리를 사력을 다해 달린다. 어둠이 깔린 한 참 뒤에야 이들 부자가 결승점을 통과했다. 경기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린 지 무려 16시간 14분이 지나서 도착한 결승점에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자리를 지킨 관객들이 가득 매우고 있었다. 그날 결승점에 있었던 모두는 1위로 골인한 선수 보다 더 큰 박수와 갈채를 보냈으며 지켜 본 두 눈에선 뜨거운 감동의 눈물이 한 없이 흘러 내렸다.(유튜브에 실린 동영상을 보고 필자가 느낀 감정을 토대로 작성하였음.) 단축 경기를 포함하여 2011년까지 총 238회의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했으며 최고 기록은 13시간 43분 37초였다. 이들은 인류의 역사를 통털어 진정한 아이언맨(철인, iron man)으로 더 이상의 설명도 필요치 않다. 2011년까지 이들이 참가한 크고 작은 경기에 참가한 횟수는 무려 1,000회가 넘는다.

 

 

호이트 부자의 철인3종경기에 출전해 역주하는 모습

 

  여기에 1992년에는 총 6,010km의 거리를 사이클로 달려 미국 전역을 횡단하기도 했다. 이 경이적인 기록에 대해 스포츠계에서는 “혼자 달리면 세계 최고 기록을 낼 것”이라며 마라톤 전향을 정식으로 제안할 정도했지만 아버지는 “난 아들 없이는 절대 달리지 않는다.”며 단호히 거절하기도 했다. 한편 보스톤 대학을 졸업한 아들 릭은 아버지에게 받기만 했다며 “단 한 번만이라도 휠체어에 아버지를 태우고 내가 밀어드렸으면 한다.”는 소원을 키우고 있다. 2013년 현재, 아버지 릭 호이트(Rick Hoyt)는 72세, 아들 딕 호이트(Dick Hoyt)는 51세의 할아버지 팀이 되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아들 릭의 나이라면 할아버지 취급을 받아도 무난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올해 보스톤 마라톤을 비롯해 장애인대회 등 매년 참석하는 일정은 예정대로 치른다고 한다. 과연 두 할아버지들의 도전은 어디가 끝일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한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 이야기는 책은 물론이고, 유튜브나 오프라 윈프리 쇼 등 여러 매체에서 다루면서 세계로 전파되었고, 눈물바다를 만들었던 유명한 실화가 되었다. 피스토리우스의 말처럼 패배자는 경주에서 가장 늦게 들어오는 주자가 아니라 앉아서 구경만 하고 뛰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992년 사이클로 미국을 횡단하는 모습(좌)  2012년 호이트 부자의 모습(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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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국방부)

 

         역사적으로 약소민족에게 있어 스포츠는 피지배에 대한 설움을 달래고 침략국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저항하고, 복수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 되어 왔다. 스케이트 살 돈이 없어서 돈이 들지 않는 마라톤을 선택했던 고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은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 민족에게 한없는 감동을 주었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42.195km를 달렸지만 마지막 골인하는 순간에 보인 선명한 태극기와 시상대에서 조차 금메달을 목에 걸고서도 기미가요가 흐를 때 고개를 떨어뜨렸던 장면(황영조 선수와 대담에서 "지금 젊은 사람들은 나라 없는 설움에 대해서 모른다. 내가 우승한 뒤 일본 국가가 연주될 때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벅찬 감동이자 비장함이다. 이 날 관중석에는 골인장면을 지켜보면서 목이 터지도록 애국가를 부른 안익태 선생도 있었다.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은 마라톤 1인자라는 단순한 의미를 뛰어 넘어 국민들에게 일제에 항거하는 정신적 상징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인터뷰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기쁘기도 기쁘나 실상은 웬일인지 이기고 나니 기쁨보다 알지 못할 설움만이 복받쳐 오르며 울음만 나옵니다. 남승룡과 함께 사람 없는 곳에 가서 남몰래 서로 붙들고 몇 번인가 울었습니다. 이곳의 동포들이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만 앞섭니다."(1936년 8월 9일 인터뷰) 특히, 김구 선생은 나라 없는 한국청년이 올림픽에서 우승했다는 나라 잃은 설움과 그 청년이 지원병으로 필리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일본이 허위 유포한 소문)에 그리고 올림픽 우승의 장대한 기록이 독립되지 않으면 그냥 묻힐 것이기에 독립의 감격으로 세 번 울었다고 밝히기도 했다.(1946년, 베를린올림픽마라톤 우승 10주년 기념식에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입상한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모습

 


  예로부터 스포츠 선수 특히, 마라토너들은 외국의 압제에 맞서 싸웠던 군인이자 용감한 투사였다. 이런 현상은 약소국가이면서 외국의 침략을 받은 나라일수록 두드러진 공통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세계 여러 나라의 손기정 선수들을 만나보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가난한 구두공장에서 생계를 꾸려 나갔던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은 나찌의 점령기를 거치며 힘없는 나라의 현실을 체험하면서 종전 후 해방조국의 군대에 자원하여 입대하였다. 완전군장을 매고 달리기 연습에 매진했던 청년 자토펙은 전후 처음 열린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하여 10,000미터에서 우승하였다. 그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4년 뒤 열린 1952년 헬싱키대회에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5,000미터, 10,000미터 그리고 마라톤까지 장거리 세 종목을 석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 장거리 종목을 모두 석권한 사례는 자토펙 이전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육상 계에서 전설 그 자체가 되었다. 명실상부한 스포츠 영웅으로 이름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육군의 육상팀 코치를 맡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독일에 이어 조국을 강점한 소련에 항거한 그는 체코 독립선언(1968년 ‘2천어 선언’이라 함) 가담하여 반소민주화 운동과 ‘프라하의 봄’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군의 힘을 빌려 정권을 잡은 체코 공산당은 그를 육군 코치에서 해임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1990년 체코 민주화 이후까지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2000년 겨울 프라하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서 당시 국제육상연맹회장(라미네 디아크)의 애도사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그가 4개의 금메달을 따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온몸을 던진 투사였기 때문이다.”

 

영원한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자토펙과 알란미뭉

 


  늘 자토벡의 그늘에 가려 만년 2위의 자리에 있었던 알제리 출신의 한 무명 선수가 있었다. 알제리는 역사적으로 지단, 앙리 등 유명한 축구선수를 배출한 나라로 스포츠에서 만큼은 자부심이 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1830년 프랑스에 점령당하여 무려 132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한일 합방을 전의 기간까지 포함하면 약 반세기 정도였던 우리보다 무려 세 배의 기간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 핍박과 설움의 정도는 가히 짐작이 된다. 1954년 전국에서 무력봉기를 시작으로 무려 8년의 독립전쟁을 통해 1962년에 비로서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때문에 우리의 손기정 선수처럼 프랑스 국기를 달고 뛰었던 선수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알랑 미뭉’이었다.  세 번의 올림픽에 도전했던 그는 1948년 런던에서는 1만미터에서 1952년 헬싱키에서는 5천미터와 1만미터에서 체코의 영웅 자토벡의 산을 넘지 못하고 만년 2위의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도전은 자토벡과 함께 1956년 멜버른대회에 마라톤으로 출전하였다. 늘 막판에 자토벡에게 역전당했던 그는 레이스 도중에 줄곧 뒤를 돌아보며 자토벡의 위치를 확인하려 했으며 영원한 리이벌 차토벡을 뒤로 하고 선두로 골인했다. 우승한 미뭉에게 다가와 뜨거운 축하의 포옹을 한 사람은 바로 자토펙이었고, 이 두영웅은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자들에게 “식민지 조국의 국민과 이 기쁨을 함께 하겠다.”고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앞서 소개했던 맨발의 군인 아베베 하사(下士, 병사 보다는 위이지만 장교보다 아래인 간부의 계급)는 식민지였던 조국 에티오피아와 민족의 한을 가슴에 품고, 그들을 침공한 이탈리아를 징벌하였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마라톤은 유서 깊은 콜로세움을 출발하여 로마의 시내와 교외를 돌아 베네치아 광장에 이르는 코스에서 진행되었는데 결승점인 베네치아 광장은 과거 무솔리니가 2차 세계대전을 알리며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이탈리아 국민과 장병들을 선동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양을 치던 한 목동이 12살 어린 나이에 황실 근위병에 선발되어 하사 계급장을 달고, 맨발로 로마를 정복하여 민족의 한을 풀었던 당대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의 조국이 강하게 시련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고 전했고, 이후 우리나라에도 방문하여 “나는 어려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지는 못했지만 황실 근위대 선배들이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던 것을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며 한국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강조한 바 있었다.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를 비롯하여 자토펙, 알랑 미뭉, 아베베에 이르는 이들은 모두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달렸던 피디피데스의 후예들이다. 우리가 특별히 마라톤의 우승자에게 ‘영웅’이란 칭호를 붙여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나치 홍보를 위해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베를린올림픽을 기록영화로 제작한 리펜슈탈 여성 영화감독은 손기정·남승룡 두 선수의 기록을 남기며 “진짜 묘한 느낌이었다... 승자가 그토록 영광스러운 순간에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고 진솔한 감정을 털어놨다. 히틀러의 의도대로 독일의 약소국 침략을 정당화해야 했던 그녀는 어쩌면 스케이트 살 돈이 없어서 마라톤을 선택해 온갖 고난과 수모를 겪으며 골인한 그들이 왜 가슴의 국기를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떨 군 채 시상대에 올라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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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태승 2013.05.17 22:54 신고

    그 동안 바빠서 스포츠둥지 사이트 방문이 뜸했네요.
    그 간의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어 흐뭇했습니다.
    마라톤에 대해 이렇게 장대한 스토리를 작성하신 것에 대해 놀랐습니다.
    특히 마지막 스토리 '민족과 국민의 설움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달려 세계에 알리다'에서는 약간의 감동이 일었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일제 시대에 양정고보(지금의 양정중고등학교)에서 마라톤 훈련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양정중학교 82회 졸업생이라 당시 양정중고등학교 내에 손기정기념관이 있었는데 그곳에 손기정 선수의 기념물들을 점심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관람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화이팅 부탁드립니다!

 

 

글/ 윤동일 (국방부)

 

        마라톤은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마라토너는 대회 3∼4달 전부터 식이 요법을 병행하면서 하루 수십 킬로미터씩 달리는 지옥훈련을 이겨내야 한다. 또 마라톤은 인간의 몸 전체에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너무 많이 뛰면 무릎과 발목이 약해지고 스피드가 떨어지며 결국 선수로서의 생명력이 바닥나게 된다. 이러다 보니 세계 유명 선수들도 통상 공식대회를 15번 정도 참가해 완주한 후에는 은퇴를 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수 가운데 공식 대회에 무려 43회나 출전해 41회를 완주한 선수가 있다. 2009년 10월 데뷔 20년 만에 은퇴한 이봉주 선수다. 1990년 전국체전에서 마라토너로 데뷔한 그는 20년 후 같은 대회에서 우승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불혹(不惑)을 눈앞에 둔 마라토너의 대회 참가 자체가 뉴스였는데 그는 젊은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까지 차지했다. 그는 짝발이면서 평발이다. 마라토너에게 치명적인 신체 조건이다. 왼발이 오른발보다 작아 뛸 때마다 몸이 왼쪽으로 기울고, 평발이라 다른 선수들에 비해 체력 낭비도 심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지 않았다. 마라톤에서 선천적 천재성보다 후천적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 결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2001년 세계 최고 권위의 보스톤마라톤 우승,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및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연패 등을 이뤄냈다. ‘봉달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치열한 승부 근성과 집념으로 유명하다. 한 번도 올림픽 금메달을 딴 적이 없지만 그 덕에 계속 도전해야겠다는 목표 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힘든 훈련도 참았다. “마라톤을 즐기지 못했다면 진작에 은퇴했겠지만 달리는 게 좋아서 그냥 뛰다 보니 20년의 세월이 흘렀다”며 스트레스 해소법조차 가볍게 뛰면서 음악을 듣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국내 남자 마라톤 최고 기록은 2000년 도쿄마라톤에서 짝발과 평발을 가진 그가 세운 2시간 7분 20초에 머물러 있다.

 

 

이봉주 선수(2001년)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선수(1960년, 1964년)          탄다니아의 아크와리선수(1968년)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고원지대(아비시니아)에 위치하고 있어서 폐활량 키우기에 유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케냐와 함께 장거리 육상과 마라톤의 강국이다. 선수층은 얇지만 현재 세계 신기록(2시간 3분 39초)을 갖고 있을 정도로 마라톤에 관한 한 자신 있는 에티오피아에는 아프리카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을 제패한 맨발의 기관차 ‘아베베 비킬라’가 있다. 아베베는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전문 마라토너가 아니라 그는 황실 근위대에 소속된 군인이었다. 이런 그가 1960년 로마올림픽에 처음 출전해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선수들을 제치고, 그것도 맨발로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였고, 4년 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맹장제거 수술을 받았으나 불가능이라 했던 예상을 깨고, 운동화를 신고 마라톤 사상 처음 2연패를 달성했다.(다른 한 명은 1976년과 1980년 올림픽에서 연속 우승한 옛 동독의 발데마르 치에르핀스키이다.) 이 공로로 그는 하사에서 중위로 진급했다. 1968년 세 번째 올림픽 도전에서 그는 여전히 강해 보였다. 그런데 약 17km 지점에서 갑자기 아베베가 길가를 벗어나 경주를 포기했다. 로바 코치는 나중에 기자회견에서 아베베가 경기 전 몇 주 동안 왼쪽 다리 골절상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아베베의 팀 동료였던 마모 월데 선수는 그의 부상을 알고 있었고, 아베베가 레이스를 포기하고 난 후 마치 그의 거울 속 이미지인양 도로를 질주해 1위로 골인했다. 후에 마모 월데 선수는 그의 우상이었던 아베베에게 그 영광을 돌렸다. 자신이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조국의 3연패를 일구며 돌아온 그는 대통령에게 하사받은 고급 승용차를 몰다가 사고로 그만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올림픽에서 마라톤 도전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올림픽 도전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베베는 불굴의 군인정신으로 “더 이상 내 다리는 달릴 수 없지만 나에겐 아직 두 팔이 있다.“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장애인 올림픽의 전신이 되는 스토크맨더빌 휠체어 대회에서 양궁과 탁구종목에 출전했고, 탁구에선 정상에 올랐으며 노르웨이 장애인올림픽에서는 썰매경주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하였다. 그가 딴 금메달은 모두 네 개로 사고 전에 두 개와 사고 후에 두 개를 따며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간 승리의 대명사가 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의 마라톤경기는 한 편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이 날의 경기는 앞서 부상을 입은 아베베가 레이스를 포기한 반면 팀 동료 웰데가 결승선을 통과했고, 그 뒤를 이어 대부분의 선수들이 모두 골인하면서 경기는 마무리되고 있었다. 어느 취재 기자의 보도기사는 당시의 상황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제 관중석엔 불과 수천의 관중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고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엔 호루라기와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비상등의 불빛이 어둡고 차가운 멕시코시티의 저녁에 스산한 기운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자들이 다시 몰리면서 「이제 이번 마라톤경기의 마지막 주자가 오고 있습니다.」 라는 장내 아나운서의 발표가 있었다.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아크와리 선수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다리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을 고통으로 비틀거리면서 달리는 그에게 방금 전까지 조용하기만 했던 수천 명의 관중들은 서서히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크와리는 트랙을 돌면서 고통스런 경주를 계속했고, 관중들의 환호는 점점 더 커져갔다. 그가 다리를 절면서 결승점을 지났을 때, 관중들은 마치 그가 금메달을 딴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한 기자는 그의 경기에 대하여 이렇게 적기도 했다. “오늘 우리는 인간 정신의 가장 순수한 것을 형상화 한 아프리카의 한 젊은 마라토너를 보았다. 스포츠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 행동이었다. 스포츠는 성숙한 인간이 하는 경기라는 스포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었고, 용기라는 말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 행동이었다. 이 모든 영예를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아크와리 선수에게 바친다.” 경기를 마친 후 가진 인터뷰에서 왜 그런 고통을 견뎠는지, 왜 포기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받았다. 아크와리 선수는 그 질문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당신들이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조국은 나에게 레이스에 출전만 하라고 7,000마일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보낸 것이 아니라 레이스를 끝내고 오라고 나를 보낸 것"이라며 기자들을 꾸짖는 듯이 대답하고는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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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글/ 윤동일 (국방부)

 

         유럽을 잉태한 마라톤 전투의 위대한 가치만큼이나 마라톤 영웅들의 다양한 스토리는 인생 그 자체이다. 2시간을 넘게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경기다 보니 초인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지만 42.195km의 긴 여정에 도전하는 이들의 스토리는 우리의 다양한 삶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이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달렸고, 어떤 이는 나라 잃은 약소민족의 희망을 위해 달렸으며 어떤 이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달렸다. 그리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라톤에 도전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토너들의 진한 감동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몸이 불편한 것이지, 정신이 불구(不具)는 아니다.
  2011년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가장 개인적인 관심을 끌었던 선수는 우사인 볼트도(자메이카 단거리 스피린터), 이신바예바(러시아 장대높이뛰기)도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종아리뼈가 없어서 생후 11개월 만에 두 다리의 무릎아래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 의족에 의지한 채 정상인들과 함께 400미터 육상경기에 출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블레이드 러너(블레이드 의족을 달고 달리는 것에서 유래한 별명)’로 불리는 의족 스프린터 오스카 피스토리우스[각주:1]였다. 양쪽 혹은 한 쪽 다리가 없는 장애 세계기록을 보유한 그의 기록은 45.07초로 휠체어 경기의 세계 일인자 중국의 장리신과 같은 기록이다. 비장애인 경기의 세계기록인 미국의 마이클 존슨이 1999년에 세운 43.18초에는 2초 이상 늦은 기록이지만, 한국 기록(손주일 선수가 1994년에 세운 45.37초) 보단 0.2초 빠른 기록이다. 다시 말하면 기록만으로 볼 때, 휠체어와 의족에 의존한 그들과 겨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는 없다고 보면 된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남아공의 피스토리우스 역주 모습

400미터 육상 세계기록 비교

 

 

스포츠에는 불구(不具)의 몸으로 또는 심각한 부상을 극복하며 세계 정상에 선 초인들의 역사는 무수히 많다. 올림픽에 국한하여 소개하더라도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요약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초기 올림픽에는 정식종목 가운데 지금은 없어진 스탠딩 육상종목이 있었다. 말 그대로 제 자리에 서서 높이뛰기, 멀리뛰기, 세단뛰기를 하는 경기이다. 미국의 ‘레이 어리’는 소아마비로 평생을 휠체어에 실려 살기 싫어서 시작한 체조와 점프 덕분에 대학 육상부 주장까지 맡으면서 1904년부터 4개 대회에세 모두 10개의 금메달과 3개의 신기록을 수립하였고, 미식축구 선수로도 뛰었다.

 

미국의 검은 진주 ‘윌마 루돌프’는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22명의 형제 중 20번째로 태어나 성홍열, 소아마비, 폐렴을 앓으며 11살까지 목발에 의지하며 살았다. 친구들처럼 뛰어 놀 수 없어서 바구니에 농구공을 던지며 놀았던 그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걷는 연습을 했고, 결국 중학교 농구선수가 되었다. 이후 육상에 관심을 보인 그녀는 16살의 나이로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고,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는 단거리 종목(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계주)에 출전하여 세 종목 모두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 그밖에도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미국의 ‘월터 데이비스’도 휠체어에 의지했던 소아마비였고, 1984년 로스엔젤레스올림픽 800미터에서 금메달을 딴 ‘조아킴 크루즈’는 오른발이 왼발에 비해 짧았다.

 

이 올림픽 영웅들은 소위 말하는 ‘절름발이들’이었다. 아예 손과 발이 없었던 선수들도 있었다. 헝가리 권총사격 국가대표였던 ‘카로리 타카스’는 군인으로 1938년 훈련 중에 불의의 수류탄 폭발사고를 당했다. 오른손잡이 사격선수가 오른 손을 잃었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슬픔과 좌절을 딛고, 주변의 걱정과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못할 이유가 없다며 다시 권총을 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왼손을 오른손처럼 사용하며 균형을 잡고 새로운 사격감각을 만드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그의 피나는 노력은 불과 1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는 올림픽 우승을 목표로 맹훈련에 돌입했다. 그의 노력은 10년 만에 달성되었다. 그는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하여 속사권총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42살의 적지 않은 나이로 2회 연속 정상에 올랐다. 그가 젊었을 때 오른 손이 하지 못했던 일을 선수로는 중‧노년기에 들어 왼손이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또 다른 헝가리의 신화는 수구(水球) 선수 ‘올리버 할라’이다. 11살 때 전차(tram)에 치어 한 쪽 다리의 무릎을 절단해야 했던 그는 재활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수영에 몰두하여 유럽선수권대회 1,500미터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구로 전향하여 헝가리 국가대표의 주전으로 96경기에 참가하였다. 올림픽은 1928년 암스텔담대회부터 모두 세 번을 출전하여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소위 외팔과 외다리 선수들이 정상인들을 물리치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그런가하면 경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부상이나 예기하지 못한 상황을 강인한 정신력과 투혼으로 극복한 사례도 많다. 1896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싸이클 도로경기는 아테네에서 출발하여 마라톤까지 왕복하는 87km 구간에서 열렸다. 그리스의 ‘콘스탄틴 티니디스’는 마라톤까지 선두를 유지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다른 선수와 충돌하며 자전거는 부서졌고, 부상도 입었다. 응급치료를 받고 나서 그는 경기 보조원의 자전거를 빌어 타고 다시 달렸다. 아테네에 들어서며 그에게 또 다른 시련에 직면한다. 길에 나온 사람을 피하려다 또 벽을 들이 받았는데 자전거는 망가졌고, 부상도 심했다. 대충 치료를 받고 난 그는 이번엔 관중의 자전거를 얻어 타고 1위로 골인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그의 몸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그의 표정에는 수많은 고난을 겪은 흔적이 역력했다.”고 적었다.

 

1908년 런던올림픽 남자수영 800미터 계영경기에 출전한 헝가리 팀은 2위 영국 보다 상당히 앞서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영자(泳者)인 ‘졸탄 할메이’는 레이스 도중 발생한 근육경련으로 갑자기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근육경련은 정도와 무관하게 일단 한 번 발생하면 더 이상의 경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할메이는 세 번씩이나 텀벙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사력을 다해 2위로 골인한 후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권투 라이트급에 출전한 헝가리 ‘임레 하란기’는 국내 경기에서 다친 코 때문에 수술을 권유 받았지만 올림픽을 앞둔 그는 수술을 미뤘다. 올림픽을 마친 후 코의 부상은 더욱 악화되었지만 시상대의 가장 위에 설 수 있었다.

 

1956년 멜버른에서 1960년 로마대회까지 투원반 올림픽챔피언이었던 미국의 ‘알 오터’는 1962년 국내 경기 중 목뼈를 다쳐 1년 넘게 깁스를 하고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일주일을 앞두고 겨우 깁스를 풀긴 했으나 여전히 부목에 붕대를 감은 채 경기에 출전했다. 좋은 자세와 높은 집중력이 필요한 경기에 부자연스런  부목과 붕대는 행동을 제한했기 때문에 성적은 좋을 리 없었다. 세 번째 시기를 앞두고 오터는 붕대를 풀어 부목을 제거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마치 누군가가 내 갈비뼈를 뽑아내는 것 같았다.”라고 털었던 그의 성적은 세계 신기록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까지 석권하며 16년간 올림픽 4회 연속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리스트가 되면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1964년 도쿄올림픽 남자혼영의 강력한 우승 후보인 미국의 ‘리차드 로스’는 경기 이틀 전 심한 복통으로 병원에 급히 후송되었다. 맹장염을 판정한 의사들은 당장 수술을 권유했으나 이 17살의 청년은 “수술이나 받으러 여기 온 것이 아니다.”라며 수술은 물론 진통제도 거부하고, 얼음찜질만으로 경기에 임하여 자신의 기록을 무려 3초나 단축하면서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미국의 다이빙 황제 ‘그렉 루가니스’는 88올림픽의 가장 영웅적인 선수로 평가된다. 그는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세계대회에서 19연승을 기록했고,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스프링보드와 다이빙 두 종목을 석권했던 우승후보 영순위였다. 그런데 예선전에서 도약대에 머리를 부딪쳐 8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대부분 이런 경우라면 경기를 포기했을 법한데 그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다이빙에서 최초로 올림픽 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렉 루가니스(1988년, 미국 스프링보드)  카로리 타카스(1948·1952년, 헝가리 속사권총) 

윌마 루돌프(1960년, 미국 육상) 알 오터(1960·1964년, 미국 원반던지기)

 

 

 

 

ⓒ 스포츠둥지

 

 

  1. 피스토리우스는 1986년 생으로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2012년 런던 페럴림픽에서는 400미터 계주에서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며 우승하며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으나 2013년 2월 14일, 여자 친구 살해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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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국방부)

 

 

3. 마라톤에 숨은 엄청난 이야기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 그 이상이다.
 마라톤은 쿠베르탱과 뜻을 같이 해 올림픽 제정에 참여한 한 통역자 마이클 브레알(Michel Breal)이 올림픽에 장거리 달리기 종목을 넣어보자는 제의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엔 쿠베르탱도 42km가 넘는 장거리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것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야하기 때문에 반대했었다고 전한다.


  유전적으로 심장이 큰 경우도 있겠지만 마라톤 선수들의 심장은 일반인에 비교해 매우 다르다. 크기는 일반인에 비해 1.5배 이상(심장의 좌우 직경은 일반인이 평균 10cm내외인 반면, 마라톤 선수들의 심장은 평균 16cm에 이른다.) 큰 편이지만, 심장 박동수는 일반인의 절반(일반인 심장 박동은 분당 70회 정도이나 마라토너들은 분당 40회로 황영조 선수의 경우는 분당 38회였다고 한다.) 수준에 불과하다. 의학계에서는 마라톤 선수들처럼 강한 심장을 부를 때 ‘스포츠 심장(Athletic Heart)’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선천적으로 강한 심장을 물려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는 후천적인 훈련과 노력에 의해 마라톤에 특화된 신체구조와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신체도 바뀔 정도로 초인간적인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마라톤이 기원에서부터 가장 올림픽의 정신을 대변하는 경기로 인식되었고, 소위 ‘올림픽의 꽃’이란 별명도 얻게 된 것이다. 인간으로서 한계에 대해 도전하고 그 열정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가장 큰 감동을 전하는 마라톤 경기를 올림픽의 모든 경기 가운데 가장 마지막 순간에 진행하는 것도 후천적으로 피나는 노력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초인간의 경지를 달성해야하기 때문이다. 약간의 상상력을 보탠다면 앞서 언급했던 고대 올림픽에서도 전투복장을 착용하고 무기를 휴대한 채로 달리는 경기(무장달리기)도 역시 가장 마지막 순서에 진행했던 것과 연장선에서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며 마지막 결승점을 통과하면서 느끼는 성취감 또한 신에게 자신을 바치는 의미에서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신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주목하는 것은 마라톤이 앞서 소개한 아테네의 밀티아데스와 5천 결사대의 승리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 이상의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지중해의 지리적 중요도와는 달리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에 있어 그리스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중동지역에서 이집트, 바빌로니아까지 거대 제국을 건설했던 페르시아에겐 그리 구미 당기는 곳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우스 1세로부터 시작한 그리스 원정의 꿈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그리스와의 교역과 도시국가들을 접수하면서 맛 본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는 점을 꼽는다. 절대군주의 권력과 힘을 가졌던 다리우스는 자신 이외의 자유인은 없었다. 왕족이 아닌 신분으로 쿠테타에 의해 세운 자신의 세계 제국에 그리스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미칠 영향에 대해 걱정했고, 자신의 권력유지에 커다란 장애물로 인식하며 두려워했던 것이다. 때문에 전혀 아쉬울 것 없었던 대제국의 통치자는 자신의 발아래 모든 그리스 국가들을 두기를 원했던 것이다. 마치 프랑스 혁명 사상이 전파될 것을 두려워 한 열강들이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대불동맹을 형성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다리우스의 염원은 마라톤의 패배로부터 시작되어 3차 원정에서도 실패했고, 결국은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반면에 세계 최초로 동양과 서양의 일대 격전에서 그리스의 승리는 곧 전 세계에 그리고 인류 문명사에 있어 유럽의 시작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마라톤에서부터 시작하여 테르모필레로 이어진 승리는 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만 지켰던 것이 아니라 유럽 전체를 외세로부터 굳건히 지켜낸 역사적 사건(영국 군사전략가 퓰러는 마라톤전투에서 그리스의 승리는 “유럽이라는 아기가 탄생하면서 낸 소리였다.”고 평가했다.)으로 유럽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후일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M.T.Cicero, BC 106∼43)는 아테네의 5천 결사대와 스파르타의 300근위병들의 주검 앞에서 "조국에 충성을 다하고, 여기에 누운 위대한 전사"로 칭송하기도 했다. 이제 외침으로 조국의 국운이 풍전등화에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라톤 평원에서의 승리와 아테네 5천 중장보병들의 투혼 그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 승전보를 전한 피디피데스의 숭고한 정신은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하계올림픽에서 재현되었다. 비록 1천년 이상 지속된 고대 올림픽에서는 정식종목으로 거행되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올림픽의 정식종목으로 전 세계인들이 어디서나 즐겨 하는 대중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오늘날 유럽을 잉태한 고대의 최대 사건으로 높이 추앙하는 입장에 반해 대제국의 소멸을 지켜봐야 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참담하고 암담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페르시아 국가들의 입장에서 마라톤 경기는 그리 탐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라진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에서는 ‘터부’로 인식하는 오랜 전통이 있어 국가 차원에서 금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1974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에 마라톤 경기는 열리지 않았다.

 

제1회 올림픽 포스터         제1회 올림픽 경기장(그리스 파나티나이코)           제1회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 장면

 

마라톤은 올림픽 종목 중에서 가장 고되고 힘든 종목이다. 다른 육상경기와는 다르게 경기장을 출발하여 도심지와 교외를 따라 야외에서 경기를 진행하며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와 경주를 마친다. 일단 풀코스를 완주하면 평균적으로 4kg의 체중감량이 수반되고, 경기 도중에 포기하거나 여러 가지 부상은 물론 드물게는 기절하거나 심장을 비롯한 신체에 많은 부하가 가해져 사망에 이르는 사례까지 생긴다. 또한 다른 종목과는 달리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종목이고 경기가 2시간 넘게 진행되기 때문에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엄청난 지루함을 느끼게 해준다. 보는 것도 하는 만큼이나 어지간한 근성 없이는 보는 것 자체가 괴로울 정도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뛰고 난 뒤 결승선에 들어가면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여 불굴의 의지를 갖고, 초인적인 능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마라톤 경기의 특성 때문에 개인 종목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목들에 비해 전하는 감동이 많은 종목이기도 하다. 승전보를 알리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군인의 절박함에서부터 신체적 결함과 온갖 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모진 역경을 극복해낸 믿지 못할 이야기와 온 나라 아니 전 세계인을 감동시켜 눈물짓게 만든 이야기도 있으며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가슴에 담고 민족의 희망을 위해 달리는 마라토너들도 있었다. 이제 마라톤 영웅들이 전하는 진한 감동의 스토리들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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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국방부)

 

 

 

2. 마라톤에 숨은 엄청난 이야기


 마라톤 평원에서의 대격돌, 마라톤전투!
  그리스 정벌을 위해 다리우스는 정예군 4만 명을 태운 페르시아 함대를 이끌고 에게해를 넘어 지중해를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에 대부분이 미리 겁을 먹고, 항복한 상태였다. 용맹한 전사들의 나라, 스파르타도 종교제전(카르네이아)과 지역내 반란 진압을 이유로 적시 참전이 불가능함을 통보해 온 상태였다. 많은 도시국가들 가운데 오직 아테네만이 ‘결사항전’과 ‘항복’을 두고 원로원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주화(主和)파는 비굴하지만 페르시아의 대군을 당해낼 수 없다며 전쟁은 피하고 항복을 주장했지만 장군이자 전략가였던 밀티아데스를 주축으로 한 주전(主戰)파들은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 없다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시시각각으로 페르시아의 위협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원로원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격론으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이 때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밀티아데스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원로원에 “우리가 지게 되면 그때 성문을 열어도 늦지 않다.”는 비장한 메시지를 남기고 아주 비밀스럽고 급작스럽게 소집된 5천여 명의 자원병들만을 이끌고 페르시아군의 예상 상륙지점으로 향했다. 에레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다른 도시국가들과 플라타이아인들이 합세하여 가까스로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아테네의 양분된 상황을 비교적 잘 파악한 다리우스의 작전계획은 이러 했다. 그는 아테네의 중심지인 팔레론을 직접 지향하지 않고, 병력을 둘로 나누어 1차로 마라톤에 상륙하여 아테네의 주력을 유인한 후, 예비대를 주력이 빠진 팔레론으로 진격시켜 아테네 원로원을 접수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다리우스의 전략은 아테네의 상황과 군사적 능력을 감안해 볼 때 매우 탁월한 선택으로 군사전략적 측면에서도 매우 높게 평가된다. 최종의 군사목표에 직접적으로 압박을 가하지 않고, 상대가 반드시 응할 수밖에 없는, 비교적 원거리에 위치한 마라톤을 1차 목표(이를 ‘대용목표’라 한다)로 선정함으로써 상대의 전력과 노력을 분산시키고, 가장 최소한의 전투와 희생으로 궁극적인 목표(팔레론)를 달성한다는 전략은 매우 탁월했었다. 전쟁의 오랜 역사 가운데 가장 탁월한 전략으로 평가되는 ‘간접접근(Indirect approach)' 방식을 구사한 것으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고대에 간접전략을 처음 사용한 군사적 천재였던 셈이다.

 

  마라톤 평원에서의 전투 경과는 대략 이렇다. 아래 전투 상황도에 보는 바와 같이 2만 5천명의 페르시아군과 1만여 명의 아테네군은 바다에 수직으로 포진했다. 병력면에서 우세한 페르시아군은 중앙에 정예보병이 위치했고, 좌·우익에 궁수와 방패병들을 균등하게 배치했다. 반면 열세한 아테네군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측면을 감안해 당시 보편적인 전투대형을 포기하고, 새로운 전투대형을 갖췄다. 앞서 페르시아군의 대형처럼 정면과 좌우 측면의 전투밀도를 균등하게 유지하는 것이 전장의 상식이었으나 아테네의 밀티아데스는 중앙의 병력을 줄이고 좌우 측면의 병력을 더욱 보강했다. 그리하여 중앙군은 일반적인 8열에서 4열로 줄여 편성했고, 여기서 절약한 병력을 양 측익에 배치해 평소 보다 두 배로 증강해 상대적인 편성을 맞췄다.

전투가 시작되자 정면의 우세한 페르시아중앙군은 아테네군의 정면을 쉽게 돌파했고, 열세한 아테네군은 페르시아의 중앙군에 밀려 후방으로 후퇴하는 듯 보였다. 초전의 승리도 잠시, 중앙에서의 성공에 도취된 페르시아군이 돌파구를 확장하고, 아테네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더 많은 전력을 투입하는 동안 측익의 변화는 심상치 않았다. 먼저 페르시아군의 우익이 아테네군에 의해 붕괴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좌익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중앙군의 전진과 양 측익의 후퇴로 전선은 자루의 형상을 띄게 되자, 이번엔 자루처럼 생긴 포위망에 갇힌 페르시아군을 격멸하기 위한 아테네군의 반격이 이어졌다. 전황의 불리함을 인식한 페르시아군의 주력은 전투대형이 와해되어 도주했고, 아테네군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습지로 패주한 페르시아군의 대부분은 아테네군의 추격에 전멸 당했고, 바다를 향해 도주한 잔병들은 정박한 함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페르시아군은 약 6,400여명이 전사한 반면, 아테네의 피해는 고작 190여명에 불과했다. 참고로 전투현장을 답사해 전투장면을 재현한 델브루크에 의하면 아테네군이 선택한 마라톤 평원의 폭은 1.6km에 불과하여 정상적인 병력배치가 불가하여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매복의 형태로 배치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본 다리우스 대왕은 소수인 아테네군의 비정상적인 병력배치를 가볍게 보고는 쉬운 승리를 장담했다. 정면의 중앙군은 밀렸지만 좌우 경사로에 매복한 측익에 의해 바위나 통나무를 굴려 내리면서 기습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페르시아는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살육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페르시아의 완패는 전장평가의 차이에 기인한 문제로부터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라톤전투(BC492)
  페르시아왕 다리우스의 2차 원정에서
  아테네군과 치른 육상전투
▶전력비교(페르시아 : 아테네 = 4 : 1)
  -페르시아군(다리우스1세)
    : 2.5만명, 경보병, 궁수, 기병
  -아테네군(밀티아데스)
    : 1만명, 중보병, 창병, 기병 없음
▶전투경과(아테네군 중심)
  -중앙을 뒤로 물려 페르시아군 유인
  -좌·우익을 포위
  -정면견제와 양익포위로 페르시아군을
    격멸, 페르시아군 퇴각
▶전투결과 : 아테네군 승리
▶전투피해(추정)
  -페르시아군 : 6,400여명 전사
  -아테네군 : 190여명 전사
※지중해의 지배권을 유럽이 장악
  최초 간접접근전략, 양익포위전술 구사

미리톤전투(BC490)의 개관

 

 

 페르시아 주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면서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를 얻기는 했으나 페르시아의 함대가 출발하는 것을 막지 못했던 밀티아데스의 고민은 이제부터였다. 이 함대가 만약 변변한 군대 하나 없었던 아테네의 심장부를 직접 공략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아테네 점령을 위해 해상에서 대기 중인 페르시아군(1.5만)에게 하시라도 성문을 열고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원로원에 승전보를 알려 ‘항복하지 말고 항전(抗戰)’할 것을 알려야만 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뿐 이었다.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자를 선발해 승전보와 장군의 항전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발이 빠른 전령(傳令, 명령을 전달하는 병사)으로 하여금 “우리가 이겼으니 페르시아 군이 공격해도 절대 항복하지 말고 지켜라. 그리고 우리가 배후에서 협격하면 이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도록 했다. 국가의 안위가 달린 승전의 메시지를 갖고 달리기 위해 선발된 전령, 피디피데스(전령의 이름이나 달린 거리 등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분분하다.)는 마라톤으로부터 아테네에 이르는 거리를 쉬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렸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이 그로 하여금 죽기를 각오하고 달리게 한 이유였다.

밀티아데스는 마라톤에서 승전의 기쁨을 누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잔여 병력들을 이끌고 서둘러 아테네로 돌아와야 했다. 해상에 정박해 있는 페르시아 해군과 마라톤에서 도주한 적의 육군이 아테네를 공격한다면 지금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아테네군 모두는 무장을 고쳐 입고, 달리기 시작했고, 페르시아가 공격하기 이전에 아테네에 도착했으며 페르시아 함대는 완전히 철수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승전보를 알린 것도 말고도 아테네 중장보병들의 빠른 이동속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아테네군 중장보병의 약 32kg의 갑옷을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착용한 채로 마라톤 평원에서 약 1.5∼2km를 거의 달리는 속도로 공격해 페르시아 육군을 격멸하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전열을 정비한 후,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무려 33km의 거리를 빠른 보속으로 돌아와 페르시아의 상륙에 대비할 수 있었다.

이는 이미 기원전에 아테네군의 전령과 중장보병이 보여 준 능력은 오늘날까지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군대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유추해 보건대, 늘 상대적으로 열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한 배경에는 고대 올림픽을 통해 달리기를 기본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전장에서 필요한 다양한 전투기술을 습득했다는 것이다. 무기나 전투 장비를 개발하고,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통해 개인 및 조직의 전투기술을 연마하는 것과는 별개로 운동을 통해 단련한 강한 신체의 덕을 톡톡히 본 것 같다. 특히, 마라톤 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갑옷을 입은 채로 아니면 적어도 중장보병들이 들었던 방패를 휴대한 채로 달리는 경기가 있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건, 페르시아는 마라톤 전투에서 패한 후로부터 약 10년 동안 그리스에 대한 그 어떤 야욕도 갖지 못했다.

 

 

승전보를 전하는 전령(올리비에메르송 작)     마라톤전투의 아테네군 전사자 무덤     피디피데스의 청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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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동일 (국방부)

 

 

 

마라톤에 숨은 엄청난 이야기
즐겁게 노는 행위를 통해 인간성과 사회성을 추구하는 스포츠는 평시 전쟁 준비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현대 스포츠의 원형인 고대 올림픽 경기는 종교와 스포츠가 결합된 종합 축제이지만 군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평시의 전쟁 준비태세를 점검하고, 전사들의 전투기술과 능력을 일정 규칙에 따라 견주어 보는 일종의 군사훈련의 시험장이었다. 전장에서 적보다 빨리 원하는 지점으로 이동(육상트랙경기‧스키)하고, 적과 만나면 무찌르고(펜싱‧사격‧활쏘기‧격투종목), 물을 건너(수영‧조정) 성을 공격하거나 방어(육상필드경기)하며 전장에 유용한 말을 다루는 기술(승마‧마장마술‧폴로‧마상격구) 등은 전승을 보장하는 유용한 전투기술들이다. 전장이동기술과 사격 등 전투기술을 혼합한 종합경기(근대5종경기‧바이애슬런)와 ‘올림픽의 꽃’으로 불리는 마라톤(Marathon)과 수영‧사이클‧마라톤을 합친 철인 3종경기 등은 모두 장거리 경주종목들로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가운데 마라톤은 실제 있었던 전쟁에서 유래했다는 말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 전쟁은 지중해의 패권 쟁탈을 위해 중동의 대제국 페르시아가 진출하면서 그리스와 벌인 세 번의 원정 가운데 두 번째 원정에서 비롯되었다.


※ 지금부터 소개할 전쟁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에 의해 밝혀진 내용은 아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역사기록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쓴 몇 줄이 고작이다. 그나마도 그가 직접 현장을 본 것도 아니고, 전해오는 이야기와 각종 자료를 참고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여기에 소개하는 내용은 독일의 군사학자로 프레데릭 대왕의 군사고문을 지낸 델부르크의 연구(그는 직접 현장을 방문해 당시 상황을 가정하고, 지형을 고려해 기동로, 병력배치 등을 재현함으로써 군사사<軍事史>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은 바 있다.)를 기초로 작성한 것임을 밝혀둔다.

 

 

 

 ▶페르시아전쟁(BC492-479)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지중해의 패권
  쟁탈을 위해 벌인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사신을
  살해하자 페르시아가 원정을 하게 됨.
▶전쟁경과
  -1차원정(BC492)
    : 폭풍우로 실패
  -2차원정(BC490)
    : 마라톤전투 아테네 승리
  - 3차원정(BC480∼479)
    : 테르모필레전투에서 지연(9일)
     →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 승리
▶페르시아 원정 실패, 그리스 패권 장악
* 마라톤전투 : 마라톤의 유래
* 테르모필레전투 : 영화 ‘300’의 배경으로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전투

페르시아전쟁(BC492-479)의 개관

 

 

마라톤의 역사적 배경 : 페르시아 전쟁
  마라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중동과 아시아 지역의 맹주였던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에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기원전 492년에서 479년까지 13년간 지속된 고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전쟁의 발단은 중동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한 페르시아가 세계제국을 꿈꾸며 에게해를 넘어 지중해 일대의 그리스 도시국가를 통합하려는 의지를 펼치면서부터였다. 150여 도시국가로 구성된 그리스 지역의 대부분은 이미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력에 복속되었고, 기원전 499년부터 493년까지 유일하게 이오니아가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도모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Darius) 1세는 반란의 책임을 물어 이오니아를 초토화했고, 계속해서 그리스 쪽으로 진격해 트라키아와 스키타이 그리고 마케도니아를 평정했다. 다리우스 대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세를 몰아 지중해 전역을 자신의 발아래 두기 위해 페르시아의 무적 군대를 진군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이오니아 반란에 원정군을 보내며 끝까지 항전을 고집했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 그리고 스파르타뿐이었다. 이들을 평정하기 위해 10년 넘게 지속된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첫 원정은 기원전 492년 사위인 마르도니오스의 지휘 하에 원정군을 보냈지만 에게해를 건너면서 아토즈 부근에서 만난 폭풍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회군했다. 이듬 해 다리우스는 다시 사절을 보내 복종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아테네는 사신들을 재판에 세워 사형에 처했고, 스파르타는 한술 더 떠서 우물에 빠뜨려 “거기서 실컷 땅과 물을 퍼 가라.”고 했다. 이에 격분한 다리우스는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우선 제압하기 위해 기병을 포함하여 대군을 이끌고 직접 2차 원정길에 나섰다.

그러나 마라톤(Marathon) 평원에 이르러 아테네의 장군이자 전략가인 밀티아데스(Miltiades)에게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하고는 또 다시 실패하고 만다. 결국 다리우스는 두 번의 원정에 실패하면서 지중해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어 황제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의 반란국들을 진압한 뒤, 선조들의 염원을 계승하기 위해 지중해로 대규모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에게는 세 번째가 되는 원정에서 크세르크세스는 막강 육군을 해상으로 투입하여 도시국가를 쓸어버리려는 계획을 갖고 출발했지만 육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테르모필레라는 협곡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Leonidas)가 이끄는 소수 정예군(고대 올림픽 종목들을 소개하면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제전에 대한 참가 규정으로 인해 당시 종교제전 중에 있었던 스파르타는 근위병 300명만 보낼 수 있었다.)을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을 만나면서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3일의 시간을 지체하더니 급기야는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계략에 휘말려 협소한 살라미스의 해협에 1천 2백여 척의 주력을 투입하는 실책을 범함으로써 원정의 파국을 맞이했다.

영화 ‘300’의 배경이 되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한 ‘테르모필레 전투’는 약 7천여 그리스 연합군이 20만명의 페르시아 대육군을 테르모필레라는 좁은 협곡(Hot Gate : 좁은 통로를 의미함)에 몰아넣어 그리스에 시간을 벌어 줌으로써 페르시아의 3차 원정이 파국을 맞게 되는 불씨를 제공했다. 마라톤 평원에서의 패배에 이어 테르모필레에서의 실수가 페르시아가 유럽 진출에 실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5세기 중동을 거점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 대제국은 3차 원정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지중해 진출의 숙원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리스에 이어 지중해의 맹주로 새롭게 등장한 신흥국 마케도니아의 도전을 받아 위대한 맞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에게 무릎을 꿇고 결국 제국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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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야 -캐처 요기 베라

 

 

야구는 살만한 집안의 미국 신사들이 조직화한 스포츠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야구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하층계급 청소년들이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야구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학식과 교양이 부족하고, 말투가 어눌한 선수도 많았다. 그러나 학력이 낮아도 위대한 인생 드라마를 쓴 위인들이 있듯이 가방끈은 짧아도 입담과 재치로 대중을 사로잡는 운동선수도 더러 있다. 미국 야구에서는 요기 베라(Lawrence Peter "Yogi" Berra)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요기 베라는 1925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이탈리아계 이주민 2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벽돌공장의 가난한 노동자였고, 베라도 중학교 2학년 때 공부를 접고 공장에 나갔으나 거기서 야구를 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베라는 작았다. 배팅하는 모습은 요가 수행자처럼 독특했고, 시합에 지고 나면 요가 수행자 자세로 슬픈 표정을 짓기도 했다. 요기(Yogi)는 그런 베라의 모습 때문에 친구 보비 호프만(B. Hofman)이 붙여준 것이었다.


요기 베라는 1942년 카디널스의 트라이 아웃에 참가했지만 작은 신장 때문에 잘렸다. 500달러에 양키스로 간 그는 포수 훈련을 받았고, 1949년 양키서의 주전 포수, 외야수, 훗날 감독까지 거치며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인이 되었다. 요기베라는 17년간(1946–1963) 양키즈 선수로 아메리칸리그(AL) MVP에 세 차례나 오르는 유일한 4명 중 한명이었고, 양키스와 메츠 감독으로서 AL과 내셔널리그(NL) 팀을 월드시리즈로 이끈 감독 6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선수, 코치, 감독으로서 월드시리즈에 21차례 출전했고, 선수로서 14차례 진출하여 10개의 우승 반지를 낀 행운의 메이저리거였다.

 

요기 베라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 위대한 야구선수로는 물론 흥미로운 경구로 인해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를 사용해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말라프로피즘(malapropism) 경향이 강했던 그는 요기즘(Yogiism)이란 단어가 생겨날 정도로 화려한 언변을 자랑했다. 백악관 초청 만찬에 다녀온 그는 “스테이크 디너(steak dinner)인줄 알았더니 스테이트 디너(state dinner)더구먼. 대화가 곤란했어요. 너도 나도 이야기를 많이 해서요.”라고 불평했다. 정치인들은 손님 불러놓고 자기말만 하더라는 것이다. “피자를 어떻게 잘라드릴까요?”라는 웨이터리스의 주문에는 “8개는 배가 너무 부르니 4개로 잘라 주시오.”라고 답했다. 왜 그 유명한 루게리스의 레스토랑에 잘 가지 않느냐고 묻자 “거기는 더 이상 아무도 가지  않아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동료 가라지올라(J. Garagiola)가 그의 집에 가기 위해 뉴저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을 때 두 갈래 길에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는 “도로에서 갈림길을 만나면 두 길을 다 택하면 된다.”라고 했다.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곧바로 양키서의 감독에 올랐을 때였다. 기자들이 그의 감독 경력을 문제 삼자 오랫동안 선수로 뛴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며 “보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되받아쳤다. 그 외 야구 코멘트도 많다. “야구 경기의 90%는 절반이 정신적인 것이다.”라는 말로 야구가 멘탈 게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야구장을 떠나서도 그는 언제나 말로 주위에 웃음을 선사했다.


많고 많은 요기 베라의 말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말은 1973년에 남긴 것이다. 당시 그가 속한 뉴욕 메츠는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디비전 시리즈에서 초반에 끌려가고 있다가 마지막에 역전 드라마를 썼다. 패색이 짙었던 순간에도 베라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말을 남겼다.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야!“라는 출처 불명의 관용구와 유사한 비유이다. 야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생도 그렇다. 인생은 희망이 있는 한 끝까지 분투해야하는 드라마 같은 것이다. 끝나기 전까지 끝난 게 아니다.

 

 


참고문헌
Berra, Yogi (1998). The Yogi Book. New York: Workman Publishing Co.
Gary Mack & David Casstevens/최의창, 마인드 스포츠. 서울: 무지개사.
Grabowski, John F.(2001). Baseball. San Diego, California : Lucent Books Inc.
Yogi Berra the Official Web Site presented by LTD Enterpr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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