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남상우(충남대학교 스포츠사회학 연구실장)

지난 달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과거 식스팩을 넘어 에잇팩을 향해 달려가던 나의 완벽한(?) 몸에 피하지방이 쌓이면서 가장 가까운 와이프에게도 무시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피하지방의 등장으로 나의 식스팩은 그 자취를 감췄고(물론, 힘주면 드러나긴 한다!), 결국 잘 단련된 몸으로 자아정체성이 형성되었던 나로선 거금을 들여 헬스클럽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운동장을 뛰면 되겠건만, 헬스클럽을 끊으면 사우나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는 마케팅의 꼬임에 넘어가기 마련이다(잘 알다시피 대전의 유성온천은 솔직히 괜찮다!).

헬스클럽의 공간사회학
요즘은 헬스클럽 대부분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많은 고객을 유인한다. 에어로빅이나 요가와 같은 운동에서부터 음악에 맞춰 그 재미없게 타오던 자전거를 타도록 만든 스피닝 싸이클에 이르기까지, 어떻게든 고객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무던히 애를 쓴다. 그 옛날 재미없게 무념무상으로 러닝머신 위를 뛰어야 했던 풍경은 다양한 채널을 시청할 수 있는 TV스크린이 설치가 되면서 몇 시간이고 그 재미없는 달리기를 뛰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이렇게 하더라도 헬스클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운동장소임엔 틀림없다. 막힌 공간에 요즘은 산소방이다 해서 야외에서 뛰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놓았지만, 거의 대다수가 혼자서 운동을 해야 하는 구조에다가 운동의 재미를 느끼는데 절대 필요한 경쟁 같은 것이 개입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씩 러닝머신을 뛰는 옆 사람과 경쟁이 붙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때문에 헬스클럽은 그 공간의 구조에 있어 혼자서도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운동할 수 있도록 형성되어야한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채찍질 할 수 있는 그러한 구조.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신발끈을 매고 러닝머신 위를 뛰며, 역기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 헬스클럽은 그러한 구조를 모색해야 했고, 이 지점에서 푸코가 말한 자기감시의 메커니즘이 개입된다. 아마도 푸코가 지금의 시대에 헬스클럽을 봤다면, 분명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오, 벤담의 파놉티콘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자기감시의 결정체여!”라고 말이다.

푸코의 눈에 비친 현대사회의 자기계발 담론
푸코의 자기감시와 관련하여 간단하게 몇 마디만 하자. 푸코는 오늘날의 사회가 자기감시의 메커니즘에 봉착했으며, 이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고 규율하며 근대적 주체로 길러진다고 말했다. 즉, 국가나 정부로 대표되는 사회적 권력체가 바라는 주체, 가령 말 잘 듣고, 게기지 않는, 뭐 그런 사람들을 양산하기 위해 스스로가 자신을 다스리도록 만드는 구조라 할까? 가장 대표적으로 ‘자기계발’담론 따위가 거기에 속한다.

오늘날 엄청난 수의 백조와 백수가 양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우석훈의 말처럼, 손에 짱돌을 들며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토플/토익책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오늘날 많은 직장인들이 퇴근 후 열공을 해야 하는 샐러던트(샐러리맨과 스튜던트의 합성어)가 되어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왜 사회적 구조에 불만을 터트리지 않고 ‘내가 못나서 그래’,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래’라고 자학하는가? 왜 스스로를 옥죄고, 규율하고, 한탄하는가? 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이게 다 권력자가 만들어놓은 일종의 ‘자기 탓하기 담론’ 때문이다. 전문용어로 ‘자기계발담론의 딜레마’

토익 몇 점에 기타 활동 몇몇 등, 스펙의 전형(규범)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면, 자기 스스로를 거기에 맞추어 평가한다. 일종의 자기감시가 일어나는데, 나는 토익 점수가 이러니까 여기에 더 투자하고, 이건 괜찮으니까 됐고....등등. 보이지 않는 감시주체의 눈을 의식하며 누군가 나를 꾸준히 바라보고(여기에선 스펙이 되겠다) 있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에 전념한다. 알아서 제 앞길 찾아가게 만들기 전략!!
 
헬스클럽과 자기감시: 네 몸을 꾸준히 살펴봐!
물론 푸코는 이러한 자기감시의 메커니즘이 파놉티콘이라 불리는 감옥에서 찾았는데, 이 원리는 헬스클럽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우선, 헬스클럽의 벽은 대부분이 전신거울로 이루어져 있다. 왜 그럴까? 자신의 몸을 지속적으로 보면서 자각하라는 뜻에서다. 내 몸에 대한 응시의 권력을 스스로에게 부과함으로써 자신이 몸의 평가자가 되도록 만드는 작업. 그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거울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어글리한 혹은 세빠지는 외모를 보면서 분발하려 하거나 만족해한다.

여기에 커다란 LCD모니터에 비춰지는 S라인 몸매의 여성모델과 권상우나 비로 대표되는 섹시남의 뮤직비디오가 꾸준히 방영된다. 몸의 기준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비의 복근을 보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몸을 본다. 되고 싶은 욕망과, 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이 중첩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시점에 다다르기 시작할터. 하고자 하는 욕구가 슬슬 불타오른다. 이 과정에서 여친이나 남친에게 몸매로 고별을 경험했던 이라면, 이건, 100%다.

그 때 중요한 것은 바로 지식의 개입. 여기에서 헬스클럽 강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저렇게 되고 싶으시죠? 그럼 저희가 마련해드리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세요. 유산소 운동 30분에 근력트레이닝 30분으로 3개월 만에 비의 몸매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속삭임 뒤에는 아름다운 복근을 만드는데 필요한 자세와 반복 횟수, 강도, 시간 등, 과학적 지식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그러면서 강사가 가끔씩 웃통을 까준다. “보세요, 저도 이걸 통해 이런 몸을 만들었답니다.” 한 마디 날리는 결정타!

만국의 고객이여, 달려라?!
이와 같은 몇몇 조건으로 헬스클럽이라는 공간은 자기감시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내가 도달해야 할 몸매의 목적지로서 S라인과 복근짱 몸매가 규범(norms)으로서 꾸준히 보여 지고, 그것은 우리들의 시선을 통해 내면화된다. 누구나 되고 싶지만, 아무나 될 수 없는 몸에 대한 욕망. 그 욕망의 규범이 바로 헬스클럽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전파되는 것이다.

여기에 꾸준히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체중계와 거울! 자기 몸의 생김새를 항상 응시하며 내면화된 사회적 몸의 규범과 비교하도록 만들어준다. 여기에다가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자기극복의 사례를 몸소 실천하고 재현한 헬스강사의 몸과 함께 과학적이라 믿어지는 운동시간, 강도, 빈도의 지식체가 개입되면, 비로소 혼자서도 꾸준히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자기규율의 공간으로서 헬스클럽이 작동된다.

어디 이뿐인가? 여기엔 자기관리가 곧 미덕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 한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과거 박정희 시대의 모토는 지금까지도 ‘관리는 스펙’이란 변이된 표어로 변태되어 우리의 몸에 투사되시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이들의 스펙 관리에 외모관리까지 넣어야만 하는 오늘날, 그 하나의 장소로서 지켜볼만한 곳이 바로 헬스클럽이라는 사실. 건강을 위한 운동장소가 아닌, 스펙관리를 위한 장소로서의 헬스클럽. 이런 웃기지도 않은 상황이 이젠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지금.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할 때가 아니라, 이젠 관리할 때다!!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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