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윤영길 (한국체육대학교 사회체육학부 교수)


몇 해 전에 김호감독과 함께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나흘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유독 아프리카 선수에 대한 평가가 흥미로웠다. 6시 저녁시간에 밥을 안먹고 9시 넘어서 밥을 달라고
하는 선수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6시에는 배가 안고팠다고 대답하더라는 이야기, 유럽 팀에서 계약금 받고 다시 아프리카 정글로 가버리는 이유가 힘들게 왜 그 일을 하냐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아프리카 선수는 포기가 빠르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유럽팀에서는 그런 아프리카 선수를 바꾸기 위해 어린 선수를 홈스테이 시킨다는 이야기에 따스함이 아닌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이지리아 경기. 9시에 밥 달라고 하는 선수, 정글로 가버리는 선수, 빨리 포기하는 선수, 그런 선수만
출전했으면, 아니 유럽에서 홈스테이 해 성장한 선수가 출전하더라도 그 선수에게 빨리 포기해버려라는 주문을 걸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르헨티나의 선물

아르헨티나와의 경기가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4:1, 한 수 아래 팀과의 경기에서 나오는 점수이다. 그렇게 굴욕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도약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분명 아르헨티나 경기는 세계 수준의 팀을
만나면 어떻게 경기를 풀어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90분의
기회를 허둥대다 보내버렸다. 좋은 팀을 상대로 한 경기를 통해 선수는 도약한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는
물론이고 경기를 지켜본 많은 선수에게 그 경기의 영향력이 파급되는 것이 스포츠의 속성이다.

좋은 팀과의 경기, 그 좋은 팀과의 경기가 어떤 의미가 있고 좋은 팀과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010남아공 월드컵 B조라는 기회가 아니었다면 그 선수들이
모아진 팀과 경기를 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아르헨티나 경기에서 메시는 대한민국
축구에 드러난 위험은 치명적이지 않음을 확인시켰다. 현란한 드리블과 폭발적 드리블이라는 메시의
위험, 그 위험을 막는데 너무 많은 힘을 쏟아버렸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메시의 플레이를 위축시키기
위한 전술적 선택은 실점을 않기 위한 수단이어야 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전에서는 메시 플레이의
위축 자체가 목표가 된듯했다.

메시는 대한민국 축구선수에게 드러난 위험은 치명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선물했고, 아르헨티나 팀은
대한민국 팀에 목표와 수단을 혼동하지 말라는 교훈을 남겼다.


위험 관리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팀은 경쟁력을 갖춘 팀 특유의 강점이 있다. 그 강점이 경기에 투영되고 강점이
투영된 경기는 특유의 색을 낸다. 그리스와의 경기에서는 선수 전체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공간을 확보
하는 우리 대표팀의 색을 분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전은 우리 색이 어떤 순간에도 나타나지
않아 무기력했다. 그리스 전과 아르헨티나 전은 대한민국 축구가 나가야 할 방향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준다. 대한민국 색을 분명하게 보여주면 세계 표준으로 설수 있는 반면, 자신의 색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하면 한 수 아래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프리카의 눈물을 보았다. 언제나 가정법은 공허하지만 카이타가 발길질을 하지 않았다면 문제는
단순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 흐름 그대로였다면 무난하게 그리스를 꺾을 가능성이 높았던 나이지
리아였다. 그 카이타의 발길질 하나가 나이지리아는 물론 B조 판도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어느 팀에
2라운드에 진출할지는 B조 경기가 완전히 끝나야 알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대한민국에, 나이지리아에, 그리스에 그리고 아르헨티나 모두에게 위험한 상황이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은 모두를 성장시킬 것이다. 자연계에서 특정 환경에 가장 효율적으로 적응하여 번성을 이룬 생물종은 환경의 변화에
취약해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취약해져 도태되어 왔다. 축구 역시 그렇다는 사실을 지단이 사라진
2010 프랑스가 잘 보여준다.

아무리 철저히 대비해도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발생한 위험 상황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한민국 축구 유전자의 건강한 변이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고 하고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고 한다. 물리법칙으로 관성은 자리하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도 관성이 존재한다. 심리적 관성......  대한민국이나 나이지리아 모두 2010월드컵 B조 1라운드 2차전이 힘들게 끝났다. 대한민국은 아르헨티나와 후반 한점을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추격에 고삐를 당기다 2점을 실점하고 동력 자체가 심하게 약화되어 경기를 마쳤고, 나이지
리아 역시 앞서가다 카이타의 퇴장 이후 팀이 역전 당했고 심지어 카이타 선수가 살해 위협을 받는 지경
까지 이르렀다. 분명 두 팀 모두에게 어두움의 심리적 관성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그리고 양팀 모두에게 경기 초반 2차전의 심리적 관성이 나타날 것이다.

경기 초반 양팀 모두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질 것이다. 선취점이 중요하다. 아프리카 팀이 선취점을
얻으면 대한민국 선수는 더 열심히 뛸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 말고, 이
경기 잡을 수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으로 뛰어야 한다. 이겨야 한다는 부담은 몰입할 수 없게 하지만
잡을 수 있다는 낙관은 경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대한민국이 선취점을 얻으면 더 조여야
한다. 아프리카 선수는 포기할 줄 아는 선수들이다. 그래서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 쉽게 포기해버린다.
그리스가 아르헨티나를 이겼다고 생각하고 경기를 풀어가야 한다. 盡人事而盡人事, 최선을 다해 뛰고
하늘의 명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뛰고 또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남아공, 카메룬, 코트디부아르 등 아프리카 팀이 줄줄이 어려운 경기를 하고 있다.대륙의
경기력 관성이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아니 대륙의 경기력 관성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파부침주(破釜沈舟)

허정무감독의 출사표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역설적이지만 선수들은 살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이 경기에서 이기면 어떤 결과가 이어지는지 선수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기기 싶은 열망이 간절할 것이다. 이제 투지와 승부욕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다.
더반의 경기장에서는 나이지리아를 응원하는 기운이 경기장을 덮는 어려운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아프리카 여서 그렇고 더반에 나이지리아인이 많아서 더 그럴 것이다. 1998년 네덜란드 전의 5:0
패배와 경기장을 가득 채웠던 오렌지색 응원을 기억한다.

破釜沈舟, 항우는 타고 왔던 배를 부수어 침몰시키고, 솥도 깨뜨리고, 주위의 집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병사들에게는 사흘 먹을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살기 위해 병사들은 출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우리는 항우의 배, 솥, 집, 사흘 치 식량이 아닌, 출진 명령이 떨어졌을
때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병사들에 주목해야 한다. 심판의 휘슬이 울리는 동시에 선수들은 나이지리
아에 돌진해 경기 초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경기 초반 주도권을 잡아야 적어도 중립에 가까운
상황에서 경기를 운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기를 반전시켜 나이지리아 선수를, 나이지리아 관중을
잠재울 수 있다.  


그리고 VISION

우리 목표는 분명 16강이었다. 하지만 16강 이후의 VISION 역시 중요하다. 16강에 천착해 16강 이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듯 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2002년 포르투갈과 경기를 앞두고 일본으로 건너
갔던 히딩크를 기억한다. 16강 상대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탈리아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일본으로
간다고 했을 때 여기저기서 당황스러워 했다. 아직 1라운드 3차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2라운드
경기를 준비한다고? 하지만 그 선택은 적중했다. 그 이탈리아를 16강에서 만났다.

솥을 깨고 배를 침몰시켜도 다음 수는 생각해야 한다. 허정무 감독이나 2010대한민국 대표팀에게는
2010 남아공 월드컵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축구 전체를 보면 2010 남아공 월드컵
역시 하나의 과정이다. 대한민국 축구가 가야할 머나먼 여정의 하나, 그 여정의 하나인 2010월드컵에
대한민국 축구 모두를 걸어버리면 머나먼 여정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거나 또 한 번의 경험을
쌓았다. 그 경험이 상처를 남기더라도 그 상처로 대한민국 축구가 건강해진다면 대한민국 축구에게는
고마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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