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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하계 아시안게임에선 어떤 일이 있었나

역대 하계 아시안게임에선 어떤 일이 있었나

 

글/ 김학수(한국체육대학교)

 

(2018 아시안게임 개막식 모습/ 출처 :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 조직위 홈페이지)

 

 

(아시안게임 정식 로고/ 출처 :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 조직위 홈페이지)

 

   올림픽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종합국제스포츠대회인 하계 아시안게임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팔렘방 두 도시에서 지난 18일 개막, 2주간의 열전을 펼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아시아에서 한국을 포함한 많은 신생국이 독립하게 되면서 아시아 대륙만의 종합 스포츠대회로 출범한 아시안게임은 올해 대회로 18회째를 맞고 있다. 4년마다 열리는 아시안게임은 1951년 인도 델리에서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지난 수십년간 스포츠를 통해 40억 아시안인의 화합과 발전을 이끄는데 기여했다.

 

   아시안게임은 지난 70여년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대회 탄생은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인도, 미얀마(당시 미얀마), 중화민국, 필리핀, 스리랑카(당시 실론) 등 6개 국가가 대회 창설에 합의하고 1950년 제 1회 대회를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하지만 개최국 인도의 대회 준비가 원활하지 못해 1951년으로 연기하여 개최하게 되었다. 제1회 대회에는 창설 회원국이었던 한국은 6.25 전쟁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불참하였고 일본 등 총 11개국이 참가했다. 1974년 제7회 테헤란 대회부터 ‘죽의 장막’ 중국의 참가하면서 아시안게임은 한국, 중국, 일본 동아시아 3국간 스포츠를 통한 국력의 경쟁무대가 됐다. 역대 아시안게임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살펴본다.

 

- 아시안게임에서 마라톤이 빠졌다

   마라톤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종목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표종목이다. 마라톤은 기원전 490년 그리스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그리스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휘디피데스라는 병사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0km나 되는 거리를 달린 것이 기원이 돼 제1회 근대올림픽인 아테네 대회에서부터 핵심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아시안게임서도 1회대회때부터 열렸는데 1974년 제7대회에는 대회 개최국인 이란측의 요구로 마라톤 종목이 제외됐다. 이유는 마라톤이 페르시아가 고대 아테네에게 패했던 마라톤 전투에서 유래했기 때문이었다.

 

  이란의 부흥을 꿈꾸었던 당시 이란 팔레비 국왕은 국가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굴욕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 마라톤을 육상 종목으로 채택하기를 거부, 대회 주최측은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가 정상적인 대회 개최를 위해 이를 허가했다. 팔레비 국왕은 이란의 회교 혁명으로 테헤란 아시안게임이 끝난 1979년 실각했지만, 마라톤을 아시안게임에서 일시적으로 제외시킨 역사적인 인물로 기록되게됐다.

 

-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한국 종합 1위?

   지금이야 생각할 수 없지만 한국이 총메달수에서 중국을 누르고 아시안게임 종합 1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금메달 93개로 금메달 94개의 중국에 간발의 차이로 금메달 수에서 뒤졌다. 하지만 총 메달수에서는 224개로 중국(222개)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2년뒤인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로 종합 4위를 차지해 종합 11위의 중국(금메달 5개)에 크게 앞서기도 했다. 이후 중국이 급성장하면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등에서 많은 격차를 보였다.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은 한국 스포츠가 세계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하는 무대가 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의 굴기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었다.

 

- 한국의 아시안게임 ‘흑역사’,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한국이 돈이 없어 유치한 아시안게임을 스스로 반납해야 했던 암울한 때가 있었다고 한다면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한국의 아시안게임 ‘흑역사’이다. 1970년 제6회 대회를 서울에 유치하고도 준비 부족과 국제적 망신을 우려한 한국은 바로 4년전 대회를 치렀던 태국의 방콕에 대회개최권을 스스로 념겼다. 대회 개최 반납비까지 물으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아시안 게임으로 인해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태국은 1966년 제5회 대회를 개최한데 이어 징검다리 형식으로 연속 개최하면서 적자가 더욱 심해졌다. 한때 반한 감정이 일어 제6회 대회에서의 한국 선수단 입장이나 한국의 경기가 있는 곳에서는 태국인들의 야유가 쏟아지기도 했다.

 

- 축구 종목에만 참가할 수 없는 카자흐스탄

   축구는 아시아 국가들의 경쟁이 가장 치열한 종목이다. 아시안게임에서 축구는 한국을 주축으로 한 동아시아국가들과 이란을 앞세운 중동 국가들의 각축장으로 뜨거운 경쟁이 벌어진다. 지난 1990년대초 소련의 해체이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아시안게임 출전으로 더욱 경합이 치열해졌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스포츠 강국 카자흐스탄은 축구 종목에는 출전할 수가 없다. 카자흐스탄이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원국이 아닌 유럽축구협회(UEFA)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 축구는 AFC 회원국에게만 출전자격을 주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축구 이외에는 복싱, 유도 등 다른 종목에 출전, 여러 메달을 획득하고 있다.

  

   카자흐스탄과는 반대로 호주는 축구 협회가 AFC 소속이지만 OCA의 회원국이 아니어서 참가 자격 자체를 할 수 없다. 다만 심판 파견은 가능하다. 아시안게임 자체가 꼭 아시아 심판들만 참가하는 것은 아니다. 선수는 아시아 선수만 되지만 다른 대륙 출신 심판은 다른 종목에도 많다.

 

- 북한은 태권도에 참가할 수 없다

   태권도는 한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뻗어나간 국기종목이다. 한국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태권도의 모국답게 많은 금메달을 수확한다. 북한도 태권도를 국기종목으로 지정해 군인체육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보급하고, 국제태권도대회도 열지만 아시안게임 등에는 출전할 수가 없다. 태권도는 지난 1986년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는데 북한은 세계태권도연맹(WTF)의 산하단체인 아시아태권도연맹의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참가할 수 없다. 북한은 최홍희가 세운 국제태권도연맹(ITF)에 가입돼 있다. 육군소장 출신인 최홍희 총재는 1973년 캐나다로 망명한 후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세계태권도는 한국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이 주류이며, 국제태권도연맹은 최홍희가 사망한 뒤 세가 많이 약해졌으며 현재는 북한이 주도하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두 단체의 통합을 주선했으나 실패했다. 올림픽서도 북한은 태권도에 출전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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