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 12번째 선수들의 축구전쟁(2)

 

 

 

글/ 윤동일

 

 

 앞서 소개한 국가대표팀과 더비팀들을 포함해 세계에 모든 서포터들은 오랜 종교 갈등, 지역감정, 경쟁관계나 어이없는 오심(誤審), 믿었던 자기 팀의 패배 그리고 과거에 당한 패배나 수치에 대한 보복 등 형형색색의 이유로 점잖은 신사의 모습을 버리고 흉악해 진다. 축구는 태생부터 전쟁에서 기원했고, 1백 년이 넘는 역사에 수 만 명이 경기에 동원되기 때문에 다른 종목과는 달리 대형의 안전사고와 대규모 충돌 요인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기장의 안과 밖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참사에서 한두 명이 아니라, 수 백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서포터들을 ‘훌리건(Hooligan)’이라 부르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사례를 보면 오히려 ‘광란(狂亂)의 폭도(暴徒)’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여기서 소개할 사례는 지면 관계상 안전사고(선수를 태운 항공기의 추락사고, 부실 공사로 스탠드가 무너져 발생한 인명사고 등)는 생략하고, 경기 도중에 또는  일어난 서포터들의 충돌이나 난동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참사들만 시대 순으로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 언급하는 더비는 앞서 소개한 내용을 참조하기 바란다.

 

 

 

➍ 헤이젤 참사(Heysel stadium disaster)
  앞서 스코틀랜드의 더비와 서포터를 소개했지만 역시 잉글랜드를 빼고선 논할 수 없다. 1985년 유러피언컵에서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리버풀 FC와 이탈리아의 명문 구단 유벤투스 FC가 결승전에 올랐고, 이 둘은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격돌했다. 경기는 도시 북서부에 위치한 스타이움에서 개최됐는데 이 경기장은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여 1930년에 세워진 벨기에의 자랑이자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처음에는 보두앵(Baudouin) 또는 주빌레(Jubilé) 경기장으로 불렀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위치한 지명을 따서 헤이젤경기장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역대 최악의 축구장 난동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참사는 우연히 결승전에서 맞붙게 된 양 팀 서포터의 단순한 충돌로 빚어진 것이 아니다. 좀 더 관점을 확장해 보면, 유럽대륙의 축구장을 장악하려는 잉글랜드의 ‘훌리건’과 이탈리아의 ‘울트라’간의 경쟁에 의한 주도권 쟁탈전으로 볼 수 있다. 1984년, 리버풀의 서포터 더콥의 일부 회원들이 유벤투스의 서포터 울트라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것이 참사의 시작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85년 5월 29일 두 팀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들처럼 숙명적으로 유러피언 결승전에서 만났고, 리버풀의 더콥은 1년 전 받은 수모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경기 시작 한 시간 전, 대회 주최측은 양 팀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응원석을 펜스로 구분했고 서로 나뉘어 입장한 가운데 경기장은 이미 양 팀 서포터들의 열정적인 응원으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먼저 유벤투스 팬들이 중립지대 건너편에 위치한 리버풀 관중들에게 무엇인가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으며 도발을 시작했다. 이에 격분한 리버풀 관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훌리건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쇠파이프와 몽둥이 등 흉기를 들고 중립지대의 펜스를 넘어 유벤투스의 관중석을 덮쳤다. 훌리건들이 난동은 1년 전 사태의 보수 대상인 울트라와 일반 관증들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기습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벤투스 측의 관중들은 경기장을 황급히 떠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많은 인원이 출구로 몰렸다. 결국 7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벽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고 관중들은 압사당하거나 스탠드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당했다. 경기장 이름을 붙인 이 참사(줄여서 Heysel disaster라고 함.)로 인해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나 부상을 당했으며 사건을 주동했던 훌리건 29명이 구속됐다.

 

이게 다가 아니다. 당시 난동을 방조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의 모든 축구팀들에게 향후 5년 동안 국제 대회에는 출전금지의 중징계가 내려졌다. 물론 훌리건의 온상지 리버풀 FC도 포함되었는데 리버풀에겐 특별히 2년이 가산되어 7년으로 통제되었다. 또한 건국 100주년을 상징하는 벨기에의 자부심 헤이젤경기장은 한동안은 육상경기만 열리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다. 아울러 응원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큰 경기장의 스탠드석이 모두 철수되고 좌석제로 변경됐고, 경기장에서의 음주 금지와 훌리건의 적극적인 진압도 명문화되었다. 아울러 다음에 소개할 참사와 함께 테일러 보고서와 1992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출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 말고도 리버풀 FC와 관련된 사건은 또 있다.

 

  

 <쇠파이프와 몽둥이 등 흉기를 들고 유벤투스 관중석으로 향하는 리버풀의 훌리건들과 당시 참혹했던 장면들>

 

http://metro.co.uk/2011/05/17/heysel-stadium-disaster-film-in-the-pipeline-13414/
http://www.dailymail.co.uk/sport/football/article-1282111/Liverpool-remember-Heysel-Disaster-minute-silence.html
http://futebolhistoria.blogspot.kr/2012_02_01_archive.html

 

 


➎ 힐스보로 참사(Hillsborough disaster)
  1989년 4월 15일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리스트 FC간의 FA컵 준결승전은 잉글랜드 셰필드에 위치한 힐스보로 스타디움에서 거행되었다. 킥 오프 시간(오후 3시)이 다가오자 관중들은 급증했는데, 특히 오후 2시30분∼40분 사이에 약 5,000명의 입장객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입장구의 회전문(turnstyle)은 병목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고의 징조였다. 평소에는 수용 한계에 이르면 경찰과 직원이 터널의 입구에 서서 진입을 막고 다른 문으로 유도했지만 이 날은 그러지 않고, 회전문 옆에 출구로 사용하던 보조문을 개방해 해소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회전문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린 사람들이 일제히 보조문으로 몰렸고, 이어서 어김없이 재앙은 찾아 왔다. 경기가 시작된 지 6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일부 팬들이 지나치게 붐비는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펜스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자, 경찰이 권고하여 심판은 경기를 잠시 중단시켰다. 이 때, 관중들은 펜스에 있는 작은 문을 억지로 열었고, 이를 통해 그 곳을 빠져나왔다. 팬들은 펜스에 매우 빽빽하게 몰려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압력으로 질식사하고 만다. 관중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찰과 직원, 구급 대원만으로는 사태를 처리할 수 없었다. 이 사고로 죽은 사람만 96명이었고, 766명의 팬들이 부상당했다.


 

고인들을 기리는 의식이 리버풀 FC의 홈구장 안필드의 빌 생클리 문에서 있었고, 1999년에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도 있었다. 리버풀 성당의 남쪽 도로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석이 있다. 구단에선 두 참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프로리그 출범 당시 만들었던 엠블럼의 양쪽에 횃불 두 개를 추가해 1993년부터 2012년까지 사용했다. 이 엠블렘과 관련해서는 다시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또 힐스보로 참사의 희생자들 중에는 1980년에 태어나 유소년팀을 거쳐 프로 팀에 이르기까지 전체 축구 인생을 리버풀과 맺고, 2013년 현재 소속 팀 리버풀과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세계적인 축구 스타 스티븐 제라드의 사촌형도 포함돼 있다. 헤이젤과 힐스보로 두 참사는 결국 법원으로 보내졌고, 재판을 담당했던 테일러의 ‘힐스보로 사태 연구 보고서’, 줄여서 ‘테일러 리포트’가 발표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축구의 전통을 파괴한다는 거센 항의 논란도 있었지만 1990년 발표된 이 보고서는 스포츠 이벤트의 사고 방지에 관한 제반 조지를 담고 있으며 특히, 모든 스타디움에는 보호 철망을 철거하고, 기존의 입석 형태가 아닌 좌석 형태의 좌석제를 의무화하며 주류 판매를 금지하며 안전을 위해 방벽의 설치 등을 다루고 있다. 이후 축구장은 좀 더 안전한 곳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비싼 입장료는 내야 하는 부담도 커지게 되었다.

 

               <당시 이층 스탠드로 피하는 관중들과 펜스에 몰려 입사 직전의 장면. 그리고 희생된 관중들>
http://www.liverpoolecho.co.uk/news/liverpool-news/hillsborough-police-kept-money-found-5826801
http://www.belfasttelegraph.co.uk/news/local-national/uk/shame-of-hillsborough-laid-bare-as-justice-nears-for-innocent-liverpool-fans-28791636.html

 

➏ 샤를레러 난동(Charleroi stadium riots)
유로 2000을 통해 잉글랜드 훌리건들은 다시 한 번 벨기에에서 그들의 ‘명성’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우선 잉글랜드는 지난 해 우승국 독일을 맞이해 34년 만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전반 독일의 공격을 잘 막아낸 잉글랜드는 후반 8분, 독일 진영의 오른쪽 코너 부근에서 얻은 프리킥을 베컴이 정확하게 반대로 올렸고, 상대 수비수를 따돌린 시어러가 헤딩으로 결승골을 넣어 34년 동안의 설움을 복수했다. 이 날 밤, 거리에는 잉글랜드의 훌리건 수백 명이 벨기에 수도 브뤼셀과 경기가 열렸던 샤를레러 시가를 휩쓸고 다녔다. 여기엔 주최측의 경기장 배정 실수도 한 몫을 담당했다.

유럽축구연맹은 축구에 열광하는 영국과 독일 간의 경기를 아주 작은 경기장만 갖고 있는 샤를레러에서 열도록 결정했는데 그나마도 경기 티켓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티켓은 ‘있는 사람들’이나 축구 클럽들의 ‘스폰서’들에게 할당되어 있어 경기를 보기 위해 모인 영국 서포터들에게는 기회조차 없었다. 이런 불만은 고스란히 경기를 관전하고 싶지만 티켓을 갖지 못한 영국 팬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샤를레러의 찰스2세 광장에는 대형 스크린이나 대형 TV가 단 한 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경기를 중계하는 스피커나 심지어 스코어보드조차도 없었다.

이제 그들이 갈 곳은 오로지 텔레비전이 설치된 술집 외에 대안이 없었다. 그리고는 거기서 의자를 차지하고 그곳에 ‘죽치는’ 수밖에 없었다. 경기를 보기 위해 그들은 벌건 대낮부터 술을 마셔야 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승리에 대한 기쁨과 분노가 폭발해 버렸다. 술에 취한 영국 팬들이 거리를 질주하자, 벨기에 경찰들은 최루가스와 물대포로 진압하려 했고, 경찰의 수가 늘수록 그들은 광폭해져만 갔다. 이 사고로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고, 부상자는 56명에 불과했지만 무려 8백50명이 넘는 잉글랜드 축구팬들이 벨기에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들을 포함해 기간 중 연행된 인원은 965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464명이 추방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데이비드 베컴(David Beckham)의 센터링을 받아 헤딩슛으로 결승골을 넣고 환호하는 잉글랜드의 알란 시어러(Alan Shearer)와 허탈하게 지켜보는 독일의 수문장 올리버 칸(Oliver Kahn). 샤를레러 광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잉글랜드 훌리건들과 벨기에 경찰이 물대포를 동원해 진압하는 장면>


http://www.dailymail.co.uk/sport/worldcup2010/article-1289645/England-v-Germany—Iconic-images-games-evocative-fixture.html
http://www.youtube.com/watch?v=SCni-iqAj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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