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윤동일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된 스포츠, 축구이야기

축구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일까?

 

축구의 기원 ① 동양 : ··일 축구 삼국지


아래 사진은 2009년에 중국에서 제작되어 상영된 적벽대전(Red Cliff)’2부작 최후의 결전편에 등장하는 장면이고, 다음의 사진은 2012년에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미니시리즈 해를 품은 달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2009년 오우삼 감독이 제작한적벽대전2(최후의 결전)’의 한 장면. 위나라 진영에서 군사들의 진중훈련과 오랜 원정에 지친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조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츄슈 대회를 거행했다.



 

2012년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미니시리즈 해를 품은 달에서 출연자들이 축국을 하는 장면

(사진출처:MBC)

 

 이 두 작품 사진은 양국에서 이미 고대부터 성행했던 고유의 공놀이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꼽히는 일본도 역시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공놀이를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들 삼국이 즐긴 공놀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가 즐겨 하는 축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알아보자.

 

인간은 축구와 인연이 깊다그래서 혹자는 인간을 ‘Homo Soccers(축구하는 인간)로 규정하기도 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발길질을 하며 축구 연습을 하다가, 태어나면 손으로 던지고, 발로 차는 가장 원초적인 공놀이를 통해 사회성을 배우고 완성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던지고, 발로 차는 스포츠는 오래 전부터 많은 나라에서 행해졌는데 그 유래도 깊고,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나 과거에 행해진 축구의 실체를 알면 과연 그것이 축구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니 혹자는 스포츠로써의 기교를 견주는 것이 아닌 단순한 공놀이 정도로 혹평할 런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다음에 소개할 서양에서 즐겨 했던 축구 조상들의 면면을 파헤쳐 보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의 역사에서 축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집약된다. 이 중 가장 오랜 기록은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나쁘게 얘기하면 치밀한 계산에 따라 훗날 태종무열왕에 오른 김춘추와 김유신이 사돈을 맺게 되는 스토리(정략결혼)에 가려져 다소 소홀하게 취급되는 것이 바로 고대의 축구 이야기다. 얘기는 이렇다. 김유신의 초대로 유신의 집에서 공놀이를 즐기던 중에 김춘추의 옷끈이 떨어지자 김유신은 일부러 여동생(언니 보희<寶姬>가 거절하자 동생 문희<文姬>가 대신 꿰맸다.)을 시켜 꿰매 주었는데 아름다운 문희의 미모에 반한 김춘추는 이후에도 이 일을 계기로 김유신의 집을 자주 찾았고,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깊어 졌다. 결국 문희는 김춘추의 아이를 회임하여 후일 김춘추의 왕비(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되었다또 다른 기록에는 김춘추가 방문하기 약 보름 전에 보희가 해괴한 꿈을 꾸었다며 심난해 하자, 문희가 비단을 주고 꿈을 샀는데 이 때문에 문희가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여기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했던 공놀이가 바로 삼국시대에 성행했던 축국(蹴鞠)인데 서로 편을 갈라 둘러서서 떨어지지 않고 차거나 그물을 넘기는 경기로 마치 제기차기와 유사한 놀이로 알려져 있다. 또 고려 때의 기록으로 동국이상국집의 후집 고율시(古律詩)우연한 기구를 보고 생각한 것이 있어 뜻을 붙여 시를 짓되, 공에 바람을 넣어 사람들이 모여 차다가 바람이 빠져 사람들이 또 헤어지니 쭈그러진 빈주머니가 남았다.”는 기록도 있다


마지막으로 1790(정조14)에 간행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은 즉 구(; 격구나 타구에 쓰이는 공)자로 지금의 축국은 구희(球戱)인 것이다. 옛날에는 털을 묶어 이를 만들었고, 지금은 가죽 태소의 오줌통으로 공을 만든 것에 바람을 넣어 이를 찬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종합해 볼 때, 축국(蹴鞠)은 공놀이의 일종으로 가죽으로 만든 공(<>)을 발로 차는(<>) 놀이를 말한다. 이 공놀이는 우리 뿐 아니라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도 저마다 유사한 경기들이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경 중국에서 처음 시작(춘추전국시대로 알려져 있다.)한 츄슈가 당나라 시대에 고구려에 전해져 삼국시대를 거쳐 일본에 전파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의 츄슈(Cuju ; 蹴鞠)’는 일반적으로 같은 수로 편을 갈라서 공을 골대(기록에 의하면 여섯 개의 구멍을 만들었다.)에 넣는 것으로 승부를 가르는 경기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는 삼국의 경기방식 가운데 현대의 그것과 가장 유사하다. 또한 9명까지 편을 갈라 서로 공을 차다가 땅에 떨어뜨리면 지는 경기(한 명이 차는 것을 1인장으로 불렀으며 9인장까지 있었다.)도 있었다. 후자의 경기장은 아래 사진처럼 네트 없이 하거나, 높은 네트를 설치해 공을 넘기는 경기로 앞서 김유신과 김춘추가 즐겼다는 놀이를 이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놀이는 게임방식이 제기차기와 유사해 놀이의 기원에 대한 논란이 남아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즐겨 했던 축국이 일본에 전파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공놀이도 있었는데 게마리(けまり ; 蹴鞠)’로 부르는 일본의 전통 공놀이가 그것이다. 이 놀이는 중국이나 한국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을 채택했는데 네모진 경기장의 모서리에 각각 나무 기둥을 세워 놓은 구역 안에서 여덟 명이 한 편이 되어 같은 편끼리 공을 발로 차는 놀이였다. 경기장에 골대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축구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고, 단지 경기방식 만으로 보면 일종의 패스게임 정도로 보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중국의 츄슈(Cuju)                         삼국시대의 축국(蹴鞠)            일본의 게마리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이 세 나라는 모두 같은 한자 권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데 축국만큼은 같은 한자(‘蹴鞠’)를 사용했으며 서로 방식은 달랐어도 공통적으로 발을 사용하는 유사한 형태의 공놀이를 즐겼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위의 첫 번째 사진에 보는 바와 같이 손에 공이 닿는 것을 피하기 위해 뒷짐을 지고 경기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결론적으로 삼국의 공놀이는 공통적으로 손을 사용하지 않고 발만 사용하는 놀이였을 알 수 있다. 이 특징(‘발만 사용하는 공놀이’)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다음에 소개할 서양의 전통 공놀이(‘몹 풋볼<Mob Football>’이라 함.)와 비교해 보면 그 이유와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축구의 기원②-1 서양 : 고대의 공놀이


유럽에서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시작한 중국의 츄슈(Cuju) 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즐겨 했던 공놀이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스에서 처음 시작한 이 놀이는 동양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경기방식이나 하는 모습은 달랐다. 공통적으로 공을 사용한다는 점 이외에 어떤 유사함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기들은 열강들 사이에서 생존과 주도권을 유지하고, 최악의 상황에서는 주변국들과 생사를 건 전쟁도 불사해야 했던 당시의 국가와 민족 생존의 역사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유럽에서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제국을 비롯해 중세의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하면 전통적으로 고대로부터 세계의 패권을 좌우했던 군사대국이자 강대국이다. 동시에 이들은 공교롭게도 현대 축구에서는 빠질 수 없는 축구 강호들로 중세에는 공교롭게도 저마다 민족 고유의 공놀이를 고안해 즐겼던 나라들이기도 하다. 이제 그리스에서 태동해 로마를 거쳐 유럽과 전 세계에 전파된 축구 조상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1. 그리스의 에피스키로스(Episkyros)

역사에 기록된 가장 오랜 고대 축구는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경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에선 이미 이 시기부터 축구와 유사한 경기가 상행했는데 에피스키로스(episkyros) 또는 파이닌다(Phaininda)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이하 에피스키로스) 한 팀에 12명에서 14명으로 편성된 선수들이 중앙에 원이 그려진 경기장에서 서로 자기진영의 골라인을 지키는 경기였다. 경기 방식은 공을 차거나 던지면서 전진해 마지막에는 상대가 지키고 있는 골라인을 넘는 것(현대 축구처럼 골대에 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상대 진영의 골라인을 통과하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했다. 두 팀의 선수들이 상대방 골대 방향으로 공을 손으로 던지고, 발로 차거나 드리블을 하면서 앞으로 밀고 나가는 형식을 취하다 보니 양 팀 선수간의 신체접촉은 불가피했으며 그 피해(선수들의 부상) 정도는 다른 경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아마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인들이 올림피아 제전에서 즐겨 하던 정식종목 가운데 판크라티온이나 권투 등 격투종목을 제외하면 가장 치열한 경기일 것이다. 이런 경기방식은 로마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특히, ‘세계 대제국 건설이라는 특명을 부여받은 로마 군단과 군인에 의해 더욱 심화 계승되었다.

  

  

그리스의 에피스키로스(Episkyros)



2. 로마의 하르파스툼(Harpastum)

하르파스툼(Harpastum)’은 그리스인들이 즐겼던 에피스키로스(Episkyros)의 로마 버전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경기의 특성(개인과 집단의 전투성은 물론이고, 조직력과 단체정신을 함양하는데 적합하여 군사적 차원에서 훈련의 가치를 인식한 것 같다.)에 주목해 세계제국 건설에 유용한 방안을 강구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즐겼던 하르파스툼은 그리스의 에피스키로스와는 달리 로마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경기로 로마군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경기의 치열도는 마치 전쟁의 수준에 버금가게 되었다. 경기에 사용된 공은 오늘날 축구공에 비해 훨씬 작은 소프트볼 정도 크기의 공을 사용했으며 경기는 양 팀 사이에 던지는 것으로 시작됐는데 양 팀은 공을 상대방의 골라인 너머로 보내기 위해 공격과 수비를 펼쳤다. 전체적으론 그리스의 그것과 유사하였다 볼 수 있으나 로마는 군단의 전투대형을 유지하는 기본 전투대형에 기초해 공격과 수비의 분업이 이루어졌고 다분히 원시적이지만 집단 전투에 필요한 기술(전략·전술)들이 사용되었다. 경기 규칙은 간단했다. 손과 발의 사용은 기 본이고, 별도의 제한사항은 없었다. 그리하여 경기 모습은 아래 사진에 보는 것처럼 다분히 전투를 닮아 있었고, 에피스키로스에 비해 역동적이고 남성미가 넘치는 경기가 되었다. 따라서 참가하는 선수들은 엄청난 속도와 민첩성이 필요했고, 과감한 육체적 접촉을 수반했기 때문에 경기 도중 부상은 필수였기 때문에 통상 진흙이나 잔디 위에서 행해졌다. 로마는 당대에 가장 잘 조직된 군대와 고도로 훈련된 전사를 보유한 고대국가였다는 점(기원전 유럽에 생존했던 열강들에 비해 로마 군단의 편성, 무기체계는 물론 고도의 훈련시스템은 매우 탁월했었다.)에 동의한다면 로마가 그리스의 공놀이를 군대에 보급해 군사훈련으로 채택함으로써 로마제국 건설이라는 위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단련된 로마군단(Roman Legion)을 제국 건설과 운영을 위한 추력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로마의 군대는 유럽에서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각 점령지들을 관장하는 동시에 점령지마다 그들의 전투 공놀이를 소개했고, 전 세계에 전파했음은 틀림없다. 물론 여기에는 브리타니아(Britannia)’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던 축구 종주국, 영국도 포함돼 있었다.

   


로마의 하르파스툼(Harpastum)




 

 

▶ 이어지는 기사: http://www.sportnest.kr/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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