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학수(한체대 스포츠언론정보 연구소장) 

 

 

       1905년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한다. 조선은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는 조항으로 유명한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전 대통령은 1910년 미국 프로야구 시즌오픈 이벤트로 워싱턴 그리피스 스타디움 관중석에서 역사적인 첫 시구를 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존 에프 케네디 전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전 보스턴 시장 존 피츠제랄드는 1912년 펜웨이파크에서 벌어진 첫 프로야구 경기에서 시구를 맡았으며, 뉴욕시장이었던 알 스미스는 1923년 구양키즈 스타디움 개장경기에서 시구 행사의 주인공이 됐다.

 

 


야구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투구인 시구(First pitch)는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과 하는 형태가 많이 달랐다. 초기에는 스탠드에서 행사가 이루어져 현재와는 많이 다른 느낌을 준다. 근엄하고 무게있는 표정의 대통령을 비롯한 명사들이 스탠드에서 공을 던지면 필드에 있는 선수들이 이를 받는 식이었다.


시구는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시구가 언제부터 지금처럼 투수 마운드에서 하게된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아마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진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스탠드에서 투수마운드로 시구 방법이 바뀐 것은 관중들에게 흥미와 관심을 좀 더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관중석에서 그저 볼을 던지는 것보다는 선수들처럼 마운드에서 서서 실전처럼 하는 것이 관중들에게 더욱 어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부 전통주의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대중적인 분위기로 향하는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국 프로야구의 시구 행사의식을 제대로 벤치마킹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3월27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 삼성 라이언즈의 개막적 시구로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군부쿠데타로 정권의 기반을 마련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민의 관심을 사기위해 프로야구를 탄생시켰으며, 첫 시구를 직접 던졌다.


시구는 대통령, 시장 등 정치인이나 군 장성 등 정치 사회적으로 유력인사들이 수십년간 도맡아 해왔으나 요즘에는 스폰서들을 위한 마케팅 기회로 간주돼 이벤트성으로 변했다. 권력자보다는 연예인부터 지역 사회 봉사자까지 다양한 보통사람들이 참여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됐다.


주로 밤경기에 시구행사를 하는 미국 프로야구는 영화배우, TV 진행자, 스폰서 대표, 각종 이벤트 당선자 등에게 시구 기회가 주어진다. 지난 해 LA 다저스 스타디움서는 TV쇼 진행자 베어 그릴스가 볼에 불을 붙여 시구를 하는 포퍼먼스쇼를 해 인기를 끌었다. 예전 점잖고 엄숙한 표정으로 임했던 권위적 행사의 시구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미국 프로야구의 대부분 팀들은 외야석 A보드나 스코어보드에 광고를 하는 스폰서들을 유치하기위해 시구 행사를 활용하기도 하며, 시즌 티켓 보유자, 대량으로 티켓을 구입한 회사나 학교 대표자들에게도 시구 기회를 주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도 이벤트성 시구를 하는 것은 미국과 흡사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정치, 경제인들이 시구를 맡았던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2000년대 이후 시구를 하는 이들이 인기 여자 연예인, 스포츠 스타, 레이싱 걸, 지역 영웅 등으로 다양한 직업인들로 퍼져 나가고 있다. 탤런트 홍수아는 시구를 통해 눈길을 모은 대표적인 연예인이다. 홍수아는 2005년 7월8일 잠실 두산-삼성전 시구자로 나서 미니스커트와 하이힐 대신 캐주얼복에 운동화를 신고 야무진 시구를 던져 팬들을 놀라게했다. 이때 그의 피칭을 두고  ‘개념 시구’라는 말이 생겼다. 홍수아가 성공적으로 시구를 한 뒤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 레이싱 모델 이수정 등이 역동적인 투구로 시구를 던져 많은 관심을 끌었다.


지난 해에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하바드대 교수가 방한중에 한화-LG 잠실전 시구자로 나서고 싶다고 스스로 자원 했으며 소방대원, 만학도 부부 등도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다.


권위와 명예의 상징에서 보통 사람들의 무대가 된 시구의 변화된 시대상에 거부하는 한 팀이 있다. 전통의 명문 뉴욕 양키스이다. 뉴욕 양키스는 올 정규 시즌전 시구 세리머니를 줄였다. 한 시즌 10~20회로 제한한 것이다. 한 시즌 팀경기가 162회나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10차례 경기에 한 번 정도 시구를 하는 셈이다. 뉴욕 양키스가 제한적으로 시구를 하기로 한 것은 시구를 소중한 명예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란다.


미국과 한국 프로야구의 많은 팀들이 시구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전통을 꼿꼿이 지키는 팀도 있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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