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교윤 (국제농구심판)

 

 

      입대를 10일정도 남겨두고 농구장을 찾았을 때 게임을 뛰는 선수들이 아닌 그 중심에 당당히 서있는 심판(Referee)의 모습에 매료된 그 순간을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우선 스포츠가 좋았고, 우리 생활에 법이 있듯이 스포츠에서도 정해진 룰을 잘 지키게 도와주는 심판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아주 빠른 경기진행 속에서 경기를 주도하고 통제해야하고, 감성적,  즉흥적 판단이 아니라 "룰" 과 "상식"에 기초한 합리적, 이성적 결정과 순전히 자기의 판단에 의하여 경기를 지휘하고, 독자적 결정(judge)을 하는 모습이....

 

그리고 제대 후 바로 실행에 옮겼다.
2001년 대한농구협회 심판학교 6기. 공인자격증 2급 취득후 이듬해 대한농구협회 경기부에 들어가 테이블 오피셜에 대한 전체적인 것을 배우며 간간히 심판도 보면서 1급 취득 후 조금 안되서 심판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감독이 선수의 의도와 행동을 알고 있어야 흐름(Flow)을 관리(control)하듯 심판 또한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어야, 심판다운 심판이 될 수 있다는 소신을 가지고  2006년 6월, 6년간 KBA(대한농구협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코치․감독과 같은 교육자로 충실하였고, 시그널․규칙정신 등 기초적인 부분에 중점을 두었다.

 

심판부에 들어와서 심판 내․외적 생활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심판이라는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성 때문일까? 나의 노력은 다른 모습으로 비춰지기 쉬웠고, 하루종일 다른 심판의 모습만 보는 날이 허다했으며, 심판은 3~4일에 1경기 정도로, 잡일이 나의 일과 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틈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노동일․스킨스쿠버․장사 등)하며 생활비를 마련하였지만 심판을 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기에 그것은 힘들기 보다는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되었다. 그 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였던 것은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울러 ‘좋은 심판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였고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해 할 수는 없었지만 나의 부족함 이라 받아들이고 심판 보는 것에만 “열정”을 다 하였다.

 

심판이 되기 전에는 스포츠를 보면 그 누구보다 미칠 듯이 환호 하였던 나,  up․down이 심하여 스스로를 컨트롤 하기도 힘들었던 나에게 심판이 된 후  농구가 아닌 다른 종목을 보게 되어도 심판이 공평한지 선수나 팀을 차별하지는 않고 똑같은 기준으로 보고있는지를 보게 되었고, 그 후 자연스럽게 스포츠가 다른 시야로 비춰졌으니 '심판'이라는 것으로 인해 내 삶의 모든 것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지 않나 싶다. 남들보다 특별하지도 많이 배우지도 않았던 ‘최교윤’ 이라는 사람에게 말이다.

 

 

 


3~4년이 지났을까...그러다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흔히 말하는 빅경기에 심판을 보게 되었고 과감하게 감독 T-Foul(테크니컬파울)을 주면서 흔들리지 않은 모습에 많은 경기와 결승전 심판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너무나 즐거웠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람을 조금씩 찾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하다보니 2005년 12월 2일 농구대잔치 결승전을 보고난 후 처음으로 재정되었던 (사)대한농구협회 최우수심판상을 수상하여 황금휘슬을 받는 일도 있었다. 정말 꿈같은 날이었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러던 중에 IWBF(대한휠체어농구협회) 휠체어 농구심판[2005년~현재]을 시작하였고, 또한 2004․2005년 전국 아디아스 길거리 3대3농구 심판팀장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2005년 아시아 3대3 농구대회 심판팀장으로 일하는 행운도 있었다. 언론과 인터뷰도 했었으니 촌놈이 출세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  싶다. 또한 선수들이 31~34도 되는 실외코트에서 뛰는 모습을 보면서 "경기가 심판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경기를 위해 존재 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부족함을 배울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2006년 6월 KBL프로 심판모집이 있었고 아울러 국제심판을 응시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같은 날 시험이 있었다. 어느 쪽이고 된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어느 한쪽은 분명 선택해야만 했다. 보름을 잠도 못자고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덜컥 KBL심판에 합격을 하였고, 모든 선수들이 프로선수를 바라듯 나 또한 프로심판으로 3년의 생활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NBA출신 심판의 교육과 비디오분석을 통해 다시 상황을 되짚어 보고, 경기를 하면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토론하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통해 지식을 쌓을 수 있었으며,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이였다. 심판능력도 향상되는 시간이기도 했고 그 시간 자체만으로도 좋았으나,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프로심판 생활이었다. 2009년 8월에 프로심판을 나오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픔과 목표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럴수록 숨 길 수 없었던 세계(?)에 대한 욕심! 항상 내 가슴속에 있었던 “국제 심판”이었다. 국제심판이 되기 위해 2009년12월 KBA(대한농구협회)에 복귀하였고, 미군부대 심판과 외국인 학교리그 심판[2009년 여름~현재]까지 볼 수 있었으니 좋은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2011년 1월에 국제농구심판 FIBA마크를 달게 되었다. 합격 결과를 20일이 지난 뒤 우연히 새벽에  WWW.FIBA.COM 홈페이지를 통해 나의 사진과 이름을 확인하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때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얼마 뒤, 지난해(2011년)에도 좋은 기회가 있었다. 중앙 아시아 챔피언쉽대회와 FIBA 국제 클럽선수권대회 “중립국심판”을 보았으며 동아시아대회 심판을 보기도 하였다.

 

 

 

 

"나의 꿈인 올림픽․세계선수권심판"을 목표를 두고 있는 나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 닥쳤으니 그것은 바로 언어, 영어였다. 국제대회 나가서 좀 더 자유롭게 영어를 구사 할 수 있다면 보다 많은 기회가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커져서 공부를 시작했다. 진도를 나가려해도 의지가 부족해서인지 원을 돌듯 돌고 있었고, 유독 어학만큼은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학원을 다니려 해도 주4~5회 매번 같은 시간에 다녀야 하니 전국대회 등 불규칙적인 스케줄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독학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알았고 정체기가 길어졌을 무렵, 체육인재육성재단의 국내연수 과정을 알게 되었고, 초급-중급-상급 체계가 잡혀 있으니, 더 없이 좋은 기회라 판단되어 지원하였다. 열정이 보였는지 너무도 감사하게 기회를 얻게 되었다. 10개월 코스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지만, 체육인재 육성재단 정동구 이사장님을 비롯하여 기회를 주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제 22회 FIBA 아시아 U18세 남자농구 선수권대회 심판으로 가면서도 수업에 빠지는게 아쉬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 최교윤은 그랬다. 농구심판을 하면서 많은 지적도 받고, 능력이 부족하다고 들으면서도 농구 선수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들로 인해 더욱더 매진 할 수 있었으며 그 많은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의 “국제심판 최교윤”이 될 수 있었다. 조금씩 즐기던 운동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 스트레스와 사춘기의 유혹들을 해소해 줄 만큼 운동을 좋아했었다. 97년, 37일간 전국일주 하이킹과 98년 백두대간 단독 종주(57일) 그리고 5번의 42.195km 마라톤을 완주하면서 나를 다스리는 법을 배웠고, 이렇게 그 무엇으로도 살수 없는 경험을 통해, 나태하지 않으려 했던 이때의 도전정신이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나의 부족함을 알기에 계속 도전 할 것이며, 지금 나는 “올림픽․세계선수권심판” 이라는 또 하나의꿈을 위해 ing 중이다.


 

심판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중압감과 부담감 때문에 코트에 서기를 꺼려했다면 결코 “심판”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를 믿고 있다.

I think there is no best referee.
I think if people can trust in that referee.

최고의 심판은 없다고 믿는다. 

신뢰 받을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심판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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